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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외곽의 ‘고려영’이란 지명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중국속의 한국사 기행(7)/조선일보 2010년 10월29일자 중국특집섹션]

북경 외곽의 ‘고려영’이란 지명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고유민 중국여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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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순의구에 있는 고려영진 인민정부./사진=고유민>

북경 동북쪽 순의구(順義區)에 고려영(高麗營)이란 곳이 있다. 고려영(高麗營)은 구체적인 유적지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려영’은 ‘고려의 군영‘이란 뜻이다. 하지만 ’고려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려영에 대해 처음으로 주목한 이는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安市城)에서 막혀 쩔쩔매고 있는 동안,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내몽고를 우회하여 지금의 북경지역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고려영은 이때 세운 군영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사에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지만,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호소력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적은 내용이 주목을 끈다. 박지원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일찍이 북경의 동악묘(東岳廟)에서 5리 정도 위치한 황량대(謊糧臺)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짓으로 곡식 창고를 만들어서 적을 속이려고 했다고 기록하였다. 청나라 때 고조우(顧祖禹)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라는 지리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문제는 왜 당태종이 북경 일대에 고구려를 속이기 위한 군사시설을 만들었냐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당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선은 요하(遼河) 부근이다. 북경에서 심양까지 700㎞가 넘는 점을 생각하면, 당태종이 왜 고구려를 속이기 위한 위장 시설을 국경에서 한참 먼 곳에 만들었는지가 의문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군대가 북경부근까지 쳐들어왔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국내의 한 방송사도 이런 추론을 근거로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 이와 달리 중국인들은 당나라 때 고구려 사신들이 거쳐가던 역참에 사신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일부 고구려 사람들이 거주하여 고려영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역참이란 말을 갈아타거나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국가에서 만든 교통망이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을 불러다 역참을 관리하도록 했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게다가 고려영의 위치는 고구려 사신들이 당나라로 가는 교통로라고 보기 어려운 곳에 있다. 중국쪽의 주장도 신빙성은 떨어진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북경의 동북쪽 군현에 고려장(高麗莊)이란 지명이 많다고 기록했다. 또 ‘독사방여기요’에도 현재의 북경시 동쪽에 위치한 통현(通縣) 서쪽 12리에 고려장이란 지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북경 동쪽의 영평부(永平府)의 풍윤현(豊潤縣)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고려보(高麗堡)가 있다는 기록도 있다. 이곳에는 병자호란 다음 해인 1637년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 논농사를 지으며 우리의 풍습을 유지한 채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려영’은 혹시 몽골인들이 세운 원나라에 끌려갔거나 자발적으로 건너갔던 고려인들이 거주했던 곳이거나, 조선 시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은 아니었을까? 지난 10월 중순 고려영을 방문하여 현지인들에게 지역 명칭의 유래를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는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다. 고려영을 의문부호로 남긴 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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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때 판첸라마를 위해 지은 수미복수지묘./사진=고유민>

열하의 피서산장은 조선 사신들이 청나라 황제를 만나기 위해 가야 했던 곳이다. 연암을 포함한 사신일행은 건륭제의 생일 잔치를 승덕에서 연다는 이유로 밤낮을 달려 승덕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열하라고 불리며, 승덕은 행정상의 지명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실제로는 여기가 지형적으로 험하고 중요한 곳을 차지하여 몽고의 숨통을 죌 수 있는 변방 북쪽의 깊숙한 곳이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천자 자신이 나서서 오랑캐를 막으려는 속셈이다”라고 하여, 청나라 황제들의 열하 행차가 몽골 지배와 관련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현재 청대사 연구자들의 견해와 일치하며, 심지어 우리나라에 번역된 ‘대청제국 1616-1799: 100만의 만주족은 어떻게 1억의 한족을 지배하였을까?’(이시바시 다카오)란 책에도 인용이 될 정도였다. 연암의 탁월한 정치외교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승덕의 볼거리는 피서산장과 외팔묘(外八廟)이다. 피서산장의 건물들은 북경의 자금성과 비교하면 수수하고 소박하여 황제가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사지서옥(四知書屋)은 건륭제 이후 청나라 황제들이 외국의 사신이나 친분있는 신하들과 만나던 장소였다. 조선 사신들도 이곳에서 청나라 황제들을 만났다고 한다. 외팔묘는 티벳의 수도였던 라싸에 있는 포탈라 궁을 모방해 만든 보타종승지묘(普陀宗承之廟), 판첸라마를 위해 지은 수미복수지묘(須彌福壽之廟), 세계 최대의 목조관음상으로 유명한 보령사(普寧寺), 몽골 사신들을 접견하기 위한 보락사(普樂寺) 등 티벳불교의 영향을 받은 8개 불교사원을 지칭한다. 연암과 사신 일행은 건륭제의 명령으로 이 외팔묘 가운데 찰십륜포(札什倫布), 즉 현재의 수미복수지묘에 있던 판첸 라마를 방문하였다.

피서산장의 입구인 여정문(麗正門)의 현판은 한자ㆍ만주문자ㆍ몽골문자ㆍ티벳문자ㆍ위구르 문자 등 5개 언어로 기록되었다. 이는 청나라가 5개의 주요 민족들을 통치했던 다민족 국가였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청나라가 만주인들이 세운 ‘오랑캐 왕조’라는 생각이 강했던 고루한 조선 사신들은 다문화와 다민족으로 구성된 청나라를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건륭제는 조선의 사신들에게 활불(活佛), 즉 환생한 부처라는 판첸 라마를 만나라고 권하였지만, 낡은 사상에 사로잡힌 조선 사신들은 판첸 라마가 중국인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 결과는 냉대로 돌아왔다. 연암은 “지금 북경으로 돌아가는 마당에는 측근의 신하가 나와서 전송하지도 않고, 황제 역시 한마디 위로의 말조차 없다. 아마도 우리 사신이 활불을 기꺼이 보려고 하지 않은 탓에, 처음에 받았던 대우와는 다르다는 탄식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적었다. 여기서 ‘사신’은 연암의 종형인 박명원을 지칭한다. 반면 연암은 열하일기에 판첸라마와 티벳불교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여, 지적인 호기심과 기록정신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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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 피서산장 여정문 편액. 5개의 언어로쓰여있다./사진=고유민>

필자는 박지원을 비롯한 조선 사신들이 묵었다던 태학관 자리라고 국내에 소개된 승덕 제8중학교를 가보았다. 이 학교는 승덕의 신개발구,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신도시의 대석묘촌(大石廟村)에 위치했다.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승덕시를 흐르는 무열하(武烈河)를 따라 꽤 멀리 내려가니 빈민촌같은 초라한 마을이 나왔다. 이곳이 과연 태학관 자리터일지는 의문이 들었지만, 학교 관계자, 호텔 직원, 지역 주민 누구도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다시 역사적인 고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고려보 사람들과 조선 사신 일행의 반목에 대해 기록했다. “같은 나라의 옛 정리를 생각해서 주인이 지키는 것을 그다지 심하게 하지 않으면, 그 틈을 노려 물건을 훔치기까지 하였으니,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점점 싫어하게 되었다. 매번 사행이 도착하면 술과 음식을 감추고 팔지 않으려 하고, 간절하게 요구해야 마지못해 필긴 하지만 바가지를 씌우고 혹 값을 먼저 치르라고 한다. 이렇게 되자 말몰이꾼들도 반드시 온갖 꾀를 동원하여 사기를 쳐서 분풀이를 하니, 서로간에 상극이 되어 원한이 깊은 원수를 보듯 한다.”

지금 중국내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200여년전 연암이 걱정했던 그 반목과 질시가 잔존한다는 점에서 자괴감이 든다. 우리 민족은 언제쯤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서로 다투지 않고 화합하고 단결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중국이라는 큰 무대에서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 활약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꼭 오기를 기대해본다.

3 Comments

  1. 백제인

    2010년 11월 19일 at 10:45 오전

    잘못 알고 계시는 군요 북경의 고려영과 고려장은 고려때 생겨난 겁니다. 조선황실에서 북경을 고구려의 수도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 들어본적 있습니까 조선시대기록을 보면 북경일대를 고구려의 수도로 보고 북경동쪽사람이 조선의 평안도사람과 똑같이 생겼으며 평안도말을 하며 언제부터 살았는지 묻자 그들의 조상때부터 오래도록 살았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때 북경주민들이 조선이 왜와함께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아 피난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696북경이 고구려의 국내성
    삼국유사에 고구려의 수도는 전성기에 호수가 20만이었다고 합니다. 금나라기록에 중도는 호수가 22만이었고 명나라기록에 북경성은 호수가20만이 넘었습니다.    

  2. 백제인

    2010년 11월 19일 at 10:52 오전

    고려장이란 말그대로 고려귀족의 영지이며 고려영은 말그대로 고려군주둔지입니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671국내성이 북경인 또다른 증거
    고려시대에 국내성의 경계에서 장성을 쌓았는데 마침 그 유적이 지금 통주시에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고려군이 장성을 쌓으면서 주둔한 것이고 요나라에서 고려군주둔지를 고려영이라고 이름붙인 겁니다. 고려장은 원나라떄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래 베이징동남쪽이 고려경계였습니다.http://blog.daum.net/manjumongol/794 베이징남쪽은 고려의 땅
    원나라가 고려에 설치한 14주에 신성주(지금 베이징남쪽에 지명이 남아있음) 요성주(어느누구도 요성을 한반도에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음 최소한 요동반도 요양시로 주장)가 있음을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3. 지기자

    2010년 11월 19일 at 1:44 오후

    백제인님의 의견,감사합니다.
    이 글을 쓴 중국여행작가 고유민씨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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