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왕소군(王昭君)1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변덕이 심하다. 따뜻하게 봄 날씨로 바뀌는가 하면 어느 듯 바람이 매섭게 불고 한파가 엄습하며, 비라도 내려 이 번 비가 그치면 기어 봄이 이 땅을 찾겠구나 싶은데 느닷없이 구름이 하늘을 덮고 황사가 하늘을 희뿌옇게 가로막으며 천식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기야 이맘때쯤이면 으레 찾아드는 꽃샘추위라며 뇌리에서 도외시하려 해도 그놈의 봄이 뭣이기에 좀처럼 제 얼굴을 쉽게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 시절로는 분명 봄일 시 분명한데, 가슴속으로는 여전히 봄이 아님을 거부하는 이 심정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까닭이란 말인가. 정녕코 봄은 왔건만 내 마음은 봄이 아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다는 뜻이겠다.

 

이 시구에는 애달픈 사연이 있다. 어느 시엔들 사연 없는 시가 있으랴만 유독 이 시에는 시인의 사연과는 무관한, 역사 속 비련의 한 인물의 운명에 대한 애틋한 감상(感傷)이 투사(投射)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중국에는 고래로부터 4대 미인이 운위되고 있다.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흔히 미색이 뛰어남을 묘사하는 글에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테면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는 최고 권력자가 미색에 취해 정사를 잊고 있다가 반란이나 시해를 당해 나라를 말아먹는 경우에 빗댄 말인 듯하다. 하지만 여인의 미모가 오히려 나라를 구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 주인공이 바로 왕소군(王昭君)이다. 이때는 구국지색(救國之色)이라 불러야 맞는가.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BC38),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 왕소군(본명-왕장(王嬙)도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병아리 감별사처럼 가려낼 수 없었기에 묘안을 짜낸 것이 궁중화가인 모연수(毛延壽)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화첩을 바치게 하는 편법을 썼다. 그걸 보고 괜찮은 인물을 골라 호색하려한 원제의 교묘한 술책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포르노사진첩 쯤 되는지 모르겠다.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배경이 있는 궁녀들은 화가에게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은 집안이 변변찮아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가난하여 뇌물을 바칠 여력이 없을 뿐더러 타고난 미모가 있었기에 있는 모습 그대로를 그려줄 것이라 믿고 모연수에게 로비를 하지 않았었다. 이에 뿔이 난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일부러 야료를 부려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려버렸다. 그러했으니 왕소군은 입궁한 지 수 년이 흐르도록 용안을 볼 수 없었음은 물론 성은을 입을 수 없었음은 어쩜 당연한 귀결일 수 있었다.

 

원제 경녕(竟寧) 원년(BC33),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당시 흉노족은 틈만 나면 한나라를 침공하며 정세를 괴롭히던 피곤한 존재였다. 그런 흉노족의 두목이 많은 공물을 싣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히 문안을 올리며 화친의 의사를 펼치자 원제도 크게 기뻐하면서 궁중에 있는 모든 미인을 풀어 호한야 선우에게 성대한 연회로 환대하게 했다. 호한야에게는 야심이 있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간절히 청하였다. 황제의 사위가 되어 혈육관계를 맺어놓으면 이것이 저절로 평화협정이 되어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없어질 것이고 지위도 한층 공고해질 터였다. 호한야가 호기롭게 원제에게 통 큰 제의를 먼저 하였고 원제도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기왕 공주를 시집보내려고 마음먹으려니 한껏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진수성찬은 물론이려니와 수많은 궁녀들을 불러와 그에게 술을 권하며 환심을 사게 했다. 궁녀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들어오는 가운데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호한야의 눈에 유난히 뛰어난 미모의 궁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왕소군이었다. 호한야는 왕소군에 필이 꽃혀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는 즉시 원제에게 새삼스런 제의를 한 것이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궁녀들 중에서 제 맘에 맞는 여인을 맞이할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 원제의 입장에서는 딸을 보내는 것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마음 가볍고 부담 없는 일이어서 쾌히 승낙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연회가 끝나고 호한야가 돌아가는 날, 원제도 그제야 비로소 왕소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연수가 그려 올린 화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천하일색 미녀였음을 확인하였지만 이미 호한야에게 주기로 약조한 황제의 명을 거둘 수는 없었다. 급히 궁으로 돌아가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고 모연수에게 속았음을 깨달은 원제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모연수를 참수하였다고 한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장안(長安)을 한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고 한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워 이별을 애닲아 했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와 노래 소리에 빠져 날갯짓하는 것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하여, 왕소군의 별명을 ‘낙안(落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데, 대륙적인 허풍과 과장이 빚어낸 언어의 유희에 다름 아니라 여겨진다.

 

왕소군에 대해서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남겨진 시에는 동방규(東方虯)소군원(昭君怨)이 유명하다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으니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 옷에 맨 허리끈이 느슨해짐은

非是爲腰身 허리 몸매를 위함이 아니다

 

그렇게 흉노 땅으로 인질이 되어 끌려간 왕소문은 미모에 지혜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여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나라의 전쟁은 없었다고 한다.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 왕소군은 한나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흉노의 관습에 따라 호한야의 본처 아들인 복주루(復株累)의 연지(閼氏, 선우의 황후)가 되어 딸 둘을 낳으며 죽을 때까지 살았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다. 왕소군의 묘는 내몽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남쪽 9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의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청총(靑塚)’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실려 있다.

 

春來不似春

하나의 독립된 시구로 음유(吟遊)되어도 충분히 가슴을 울릴만한 시구다.

봄이 되어도 마음은 아직 봄 같지 않다. 춥고 배고픈 겨울을 견뎌온 사람에겐 봄이 간절할 수밖에 없다. 억압과 부자유의 시절을 버티어온 사람에겐 해방과 자유가 절실 할 수밖에 없다. 가난과 질병, 고통과 번민의 세월을 이겨온 사람에겐 봄날과 같은 따뜻하고 향기로운 삶이 그리울 수밖에 없는 법이다. 어찌 봄에 대한 계절만을 가리킨다 할 것인가.

여기에는 꿈의 성취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가혹한 운명을 극복한 뒤의 지침과 허탈감, 지나간 시절에 대한 시원하고 섭섭함, 이루지 못한 사랑과 꿈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행복에 대한 처절한 갈망 등이 함축된 탄식이 아닐까.

기다리다보면 마침내 봄은 찾아올 것이다. 고귀한 것은 은은한 기다림의 인내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까지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인욕이다. 머지않아 봄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니 기다리자, 이 며칠의 꽃샘추위를 이겨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매화가 만발한 봄이다, 이미 봄은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음이다.

왕소군(王昭君)6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3월 16일 at 7:36 오전

    제가 몇번 댓글을 달았는데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댓글은 기본사이트 알림판으로 가서 승인하기를 눌러야 되거든요.

    이제 사진도 다 제대로 사이즈고 보기 좋습니다.

    • 靑睦

      2016년 3월 22일 at 3:18 오전

      부족한 위블로그 사용법을 일일이 지적하여 가르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더 의문되는 점은 포스팅을 한 후에 나중에 다시 들여다 보면 사진이 모두 배꼽으로 나타나네요. 그건 왜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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