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자식을 내가 낳았더라도…

비록 자식을 내가 낳았더라도

 

 

일찍 온다던 똘똘이(손주의 태명)가 오후 6시가 가까워서 도착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토요일 일찍 새아기가 똘똘이를 데리고 먼저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들이 퇴근하여 함께 오기로 하는 바람에 늦게 도착한 것이다. 피차 바쁘게 살아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일찌감치 부모님을 찾아뵙고 나머지 일정을 달리 활용해 보겠다는 계산도 깔려있는 눈치다. 금년 5월은 연 나흘 연휴라는 드물게 맞는 행운이 따라서인 듯.

 

「뭐 그리 복잡하게 하노. 머시마는 머시마 대로 바로 집으로 오면 되고, 똘똘이 에미는 자기 차에 똘똘이 태우고 오면 되는데.」

「글세 말이시더. 지 신랑이 그래 하자는데 어짜겠노 따라 해야지.」

 

아들의 일터는 사하구 하단에 있고, 저들의 집은 창원이라 아들이 오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여 귀가한 뒤 마누라와 아들을 데리고 오려면 그리될 밖에 없었다.

 

둘 다 만혼이어 화명동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 용케도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다가 안타깝게 유산을 하는 바람에 창원으로 이사를 하도록 조처하여 조금 떨어져 살게 된 터였다. 새아기의 직장이 창원이어서 임신한 채 운전하여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 몸에 무리를 준 것이라고 판단하여, 대신 아들이 창원에서 하단으로 출퇴근을 하기로 바꾸도록 한 것이다. 거꾸로 귀성이라는 말도 있듯이, 알고 보니 창원과 부산의 교통은 화명동에서 하단까지의 이동보다도 오히려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우리도 젊은 시절을 겪어와 알지만  5월이 되면 참 골치 아팠다. 무슨 행사가 그리 많은지 5월만 되면 눈앞이 캄캄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이 연이어 닥쳐오길 한다. 가족 중 누구의 생일이 5월에 끼어있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뜻 깊고 기분 좋은 날이면 땡이지 무슨 불만이냐 싶지만, 그날은 모조리 돈이 들어가야 하는 날이기에 그렇다.

어른이라야 홀어머니 한 분이지만, 아이가 둘이었다. 형편이 넉넉하다면야 아무 염려 근심이 없을 일이나, 젊은 날의 우리는 아닌 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핍진한 생활에 전전긍긍해야 했었다. 첫아들을 얻었을 때는 때꺼리가 없어 이웃집 식당의 아줌마가 갖다 준 누룽지를 삶아먹으며 견뎌야 하는 어려운 시절도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다 아내의 젖이 유종에 걸려 젖을 먹일 형편이 되지 못해 아기에게도 누룽지 삶은 국물을 먹여야 할 때는 참으로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지금도 아내는 아들이 겨울이면 추위를 잘 타는 걸 보고 어릴 때 젖을 제대로 먹이지 못해서 그렇다며 한숨을 쉴 때가 있다. 그런 형편이니 명절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더욱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가난하면 그런 뜻을 받쳐주지 못하는 노릇이었다. 그걸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요즘에도 아이들에게 결코 그와 같은 부담을 주지 않으려 조심하는 편이다. 참으로 고마운 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아내도 자식을 팔아 유세를 하려는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는 것이 기특하다고 여겨지면서도, 어떨 때는 그런 아내가 야속할 때도 있긴 했다. 우리가 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그만큼 자기 살길을 틔워줬으면 당연히 효도 차원에서라도 부모에게 보다 더 잘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서운함이 이따금씩은 고개를 쳐들어서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자식들에게 절대 짐 지우는 요구는 하지 말라고 엄격히 나를 통제(?)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이 부모를 외면하고 불효하느냐 하면 그건 전혀 그렇지 않다. 불과 3년 전이기는 하지만, 해운대 마린시티에 아파트를 장만하여 들어가 살라고 한 것도 아들이다.

 

2년 전에 가족들이 제주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서귀포의 어느 박물관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라 내가 새아기에게 말을 건넸다.

 

「칠순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내 칠순 때는 잔치를 벌이느니 그동안 사진을 좀 찍어 사진전을 열면 어떨까? 그동안 쓴 글도 모아 책을 한권 펴내고 죽었으면 하는데?」

그랬더니 새아기가 3초도 안 걸려 대꾸하기를

「아버님, 너무 멋있어요. 좋구말구요. 그렇게 하세요, 꼭」

 

그러고 나는 곧 이때의 일을 잊고 지났다.

금년 설이 지나자마자 새아기가 전화를 걸어왔었다.

 

「아버님, 저번에 아버님 칠순 때 사진전시회 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저희가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내가 말은 그렇게 했었지만 사실은 내심으로 긴가민가하면서 준비에 소홀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사진에 입문한 기간도 일천한데다, 전시할 만한 작품 수도 미미할뿐더러 책을 내겠다면 그간 쓴 글을 정리하는데만도 시간이 적지 않게 소요될 터였다. 거기에 수중 무일푼인 내가 자녀들의 힘을 빌려 내 욕심을 채운다는 것이 스스로 용납이 안 되었고, 부담을 주기도 싫었던 탓도 있었다. 평생을 나는 내 것이 아닌 한 자식에게라도 경제적 부담을 안기기 싫어했다. 아비의 능력이 까지라 아이들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키운 미안함과 자책감도 있었고, 결벽증 비슷하게 나는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을 스스로 경계했다. 욕심은 만 가지 화근덩어리임을 살아오면서 절실히 보고 깨달은 때문인지도 몰랐다.

 

「고맙구나.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미쳐 내가 준비를 못했네.」

「그러시담 지금부터 준비하셔서 끝나면 얘기해 주세요. 알아보니 돈도 얼마 안 든다던데요.」

「응, 그래? 그렇담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아버님, 준비 끝나시면 언제든 말씀주세요. 그리구 여행은 언제쯤 가실 계획이세요?」

「5월 중으로 생각했는데 그쪽은 날씨가 춥다네. 소휘(딸애)가 6월이나 7월에 가라고 하네.」

「아가씨가 그러셔요? 그럼 아버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작품 준비되면 꼭 연락주시구요.」

 

우리 새아기는 착하다. 공학박사로, 굴지의 대기업 연구소에 근무하는데, 시아버지의 이같은 희망사항을 들어주지 못 할 만큼 형편이 궁색하지 않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기대해서 나쁠 일은 아니다. 친정이 크게 부자인 것도 아니면서 배우고 자란 바가 있어서 그런지 항상 어른에 대하여 그 마음 씀이 여간 예쁘지 않아서 내가 내심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

 

내 생일은 많이 빠르다. 설이 지나자마자 들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생일상을 제대로 받기가 어려웠다. 명절 끝의 음식 뒤처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요즘이야 누가 회갑잔치를 하는가. 어른도 아이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믿는 구석이다. 그 대신 칠순잔치로 대체시키는 경향이 유행인데. 우리는 잔치라는 단어에 두드러기를 느끼는 타입이어 싫다고 했더니 대신 여행을 보내드리겠다고 하여 그거야 내가 좋아하는 바라 냉큼 좋다고 하여 결론이 내려진 상태다. 모든 수속은 딸애가 맡기로 해서 우리는 통보만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실로 우리 내외는 이순의 나이가 되도록 여행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세월을 살았다. 친구들 모임에 참석해 보면, 외국여행을 마치 제집 안방 나들이 하듯 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서 마음이 우울한 경우가 많았었다. 최초의 해외여행이 2011년에 이르러야 가능했으니 어지간히도 힘든 인생살이였음이 여실하다 하겠다. 그런 이후로 매년 한두 차례는 어김없이 아들과 딸이 번갈아 해외로 보내줘서 구경은 잘 한다만 나이가 있으니만큼 장거리로 걷는 여행은 부담일 수밖에 없어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다. 제주도 구경도 다섯 번이나 다녀왔으니 이런 호사가 없다. 그럼에도 제주도는 또 가고 싶다. 내 욕심이 너무 과한가?. 덕분에 이웃들로부터 듣는 덕담이 있다.

 

「자식들 잘 키워놓더니 늘그막에 보기 좋네.」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솔직히 들어서 기분 나쁜 얘기는 아니다. 자식을 잘 키운 것이 아니라 저들이 스스로 잘 자라 준 덕택이라 생각한다.

 

내 사랑하는 손주 똘똘이가 할아버지 댁에 왔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가 할아버지에겐 삐죽삐죽하면서도 가까이 오는 걸 보고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

「참 희한하다. 핏줄은 못 속이제, 어떻게 알고 할아버지한테는 스물스물 안기노 말이다!」

 

똘똘이가 우리 집에 오면 빠뜨리지 않고 꼭 하고 싶어 하는 행동이 하나 있다.

서재로 쓰는 내 방의 탁상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이다. 할아비가 늘 그 자리를 점령하고 앉아 책을 보거나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는 모습을 꼭 그대로 따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거실에서 할머니와 놀다가도 내가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우면 금방 일어나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할아버지 흉내를 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내가 그랬다.

「우리 똘똘이는 할아버지 의자가 세상에서 제일 탐이 나는 모양이다.」라고.

 

언젠가 아들 내외더러 일러 준 말이 있다.

 

「똘똘이를 어떻게 만들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다 저절로 된다. 다만 환경을 잘 만들어주고 아이에게 흉한 모습을 절대 보이지 마라. 책이 많은 방에서 되도록 많이 머물게 하고,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자연스레 보이도록 해라. 그렇게 하면 굳이 공부하라고 채근하지 않아도 아이는 공부 잘 하게 된다. 주고받는 말씨도 고운말을 쓰고, 아이에게는 절대 성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해라. 가능한 한 빨리 적성을 파악하여 적응이 쉽도록 유도하고,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도와줄 뿐 부모의 욕심으로 어떤 걸 강요하지 마라. 지금까지 하는 걸 지켜보면 큰 흠 없이 잘 키우고 있다는 믿음이 간다만 애비가 좀 게으른 성품이라 집에 오면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는 버릇이 있는데 그건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요즘은 아이가 있는 데서는 TV를 아예 켜지 않으니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좋다. 부모가 건전한 상식과 사랑을 지니고 있다면 아이는 절대 잘못 될 리가 없는 법이다.」

 

요즘은 뉴스를 보기가 겁이 나는 세상이다. 자식을 죽이는 부모가 없나, 부모를 죽이는 자식이 없나. 다들 말세라고 부르짖는 험하고 악한 세상이다. 정녕 그렇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시대를 말세라고 하셨다. 복음서를 보면 말세에 일어날 징조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한 부분을 읽을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세상은 재난으로 점철될 것인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하였고 이것은 기껏 「재난의 시작」일 뿐이며,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하였으니 적어도 이 내용으로만 보면 오늘의 현실이 말세라고 믿는데는 티끌만큼의 의심이 없을 듯도 싶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이란 가족이 이룬 거룩한 생활공동체다. 혈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것만으로 가정이 영위되는 건 아니다. 가정이란 가족으로 구성된 생활공동체이기도 하지만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신비한 삶의 뿌리이기도 하다.

사랑이 부족하거나 너무 지나쳐서도, 믿음이 없거나 또는 과도한 믿음도, 화목해야 할 가정을 붕괴시키고 행복을 파괴한다.

특히 부모가 명심할 것은 자식을 마치 소유물로 착각하는 듯한 행태를 보일 때가 있어 기막히게 된다. 자식은 오로지 부모님의 몸을 빌려 이 세상으로 왔을 뿐 엄격히 따지면 완연히 다른 생명체이다. 그러기에 부모나 자식에게는 의무만 있을 뿐 권리 같은 건 없다. 사랑으로 키울 의무만 있지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겠다는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건 욕심이다. 자식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를 낳았으니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할 의무만 있지 부모님더러 뭘 어떻게 해달라는 권리는 없는 것이다. 착각들 하지 말라.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인생이란 각자가 살아나갈 궁리를 하며 지혜를 모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부모에게도 의지 말고 자식에게도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참된 인생의 도리가 아닐까 한다. 서로 의지하고 욕심을 가꾸는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우리 똘똘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자식이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의 거의 모두는 부모의 영향이다. 사랑받지 않고 자란 아이는 인간을 사랑할 줄 모르는 괴물이 된다. 보고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욕심이 강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니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모르는 철면피한 족속이 된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욕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자연히 성정이 거칠게 마련이다. 욕이 마치 유머인 줄 착각하며 자란 탓이다.

아이는 마치 하얀 솜뭉치 같아서, 물감이 뿌려지면 서슴없이 그걸 흡수한다. 물감의 색깔에 따라 희게도 빨갛게도 된다. 솜뭉치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타인에 의하여 물이 들기도 하고 옮겨지기도 할 뿐이다. 솜뭉치에 어떤 물을 들일 것인가는 부모의 하기에 달렸다. 솜뭉치는 물질이지만 아이는 인격을 갖춘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깨달아야 한다.

돈으로 아이를 잘 먹이고 잘 입힐 수는 있으나 인간성을 제대로 심어줄 수는 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보이는 것마다 배움의 대상인데 그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부모의 생활행태가 그릇되어 있다면 그 어린 것이 커서 무엇이 되겠는가. 비록 자식을 내가 낳았더라도 자식은 나의 종속물일 수는 없으며, 생활이 곤궁하고 힘들다고 남의 것을 함부로 훔치거나 사기를 쳐서 먹고 산다면 그 자식이 어떻게 되겠는가는 불문가지다.

[한 인간이 속해 있는 문화에 대한 가치관이나 세계관, 그리고 ‘타인(others)’과 접촉할 수 있는 잠재력도 (마찬가지로) 부모에 의해 결정된다.]-제러미 러프킨의 “공감의 시대

 

5월은 가정내의 이런저런 문제를 조용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각자의 의무만 생각하고 권리는 잠시 덮어두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해본 객쩍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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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출생 후 1년5개월15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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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출생 후 1년6개월13일째.

우리 똘똘이는 내가 자리를 뜨기만 하면 이렇게 자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할아버지 흉내를 낸다. 혹시 내가 노트북을 끄고 나오면 나의 손을 잡아 끌고 들어가 부팅을 해놓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기특한 것은 한번 자리에 앉으면 끈기있게 자리를 고수하는 걸 볼 수 있다. 집중력과 안정성을 엿볼 수 있어 좋다.

1 Comment

  1. 산고수장

    2016년 5월 19일 at 2:24 오전

    우리들의 자화상을 읽었습니다.
    지금시점 내 어릴때 본 할아버지 할머니의 당당하시던 모습은 어디가고
    그저 나약하고 유순하기만한 우리의 모습을 많이 보고삽니다.
    다만 손자 손녀를보면 귀엽고 함께 놀면 즐겁고…

    저도 26일이면 두돌이되는 늦둥이손자가 있습니다.
    보고 또보아도 또 보고싶습니다.ㅎ

    건강하시고 행복한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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