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돌아온 원더우먼을 보고 실망한 것은

원더우먼

 

오래된 기억은 단편적으로 남기 마련이다.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당시 정황이나 분위기처럼 여러 가지가 혼합되기도 한다. 심지어 그 기억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가끔 왜곡되기도 하고 취사선택되기도 하는 기억의 특성 때문이다. 여럿의 입을 맞추고 나서야 그 기억이 정확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미국 드라마 ‘원더우먼’의 경우 예쁘고 날씬한 여배우가 주인공인 드라마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게다. 그 여배우의 이름이 린다 카터(Lynda Carter)이고 미스 아메리카(Miss World USA 1972) 출신이라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녀가 왜 수영복 차림으로 뛰어다니고 신분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드라마를 보기에는 너무 어렸던 게 사실이다. 그냥 예쁜 배우가 아니라 정말 예쁜 배우라는 것도 커서야 깨닫게 됐으니까.

1975년부터 시작되었으니 벌써 40여 년이 훌쩍 넘은 드라마다. 흔히 말해서 강산이 바뀌어도 네 번은 바뀌었을 세월이다. 100% 확실하다고 확신하는 기억조차 왜곡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예쁘고 날씬한 여배우가 나오는 드라마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영화 ‘원더우먼'(Wonder Woman, 2017) 개봉 소식을 듣고 기억의 파편을 맞춰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원더 우먼’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 린다 카터라는 미녀배우를 대신할 여배우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는지가 궁금했다. ‘600만 불의 사나이’가 리 메이저스여야 하고 ‘소머즈’는 린제이 와그너여야 하며 ‘맥 가이버’가 리처드 딘 앤더슨이어야 하는 것처럼 ‘원더 우먼’도 린다 카터여야 하지만 40년의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최소한 비슷한 분위기라도 내주길 바랬다

영화로 ‘원더 우먼’을 본 솔직한 심정은 ‘다소 실망스럽다’였다. ‘원더 우먼’역을 맡은 갤 가돗(Gal Gadot)은 린다 카터처럼 여리하지 않은 데다 지나치게 우람하기까지 했다. 물론 갤 가돗 역시 미스 이스라엘 출신으로 미스 아메리카 출신인 린다 카터처럼 미인 대회 출신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기준이 여성미만 강조하던 예전과 달리 건강미까지 추구하는 걸로 바뀌다 보니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원더 우먼은 그냥 여자라고 할 수 없다. 남자 못지않은, 아니 어느 면에서는 웬만한 남자보다 더 강인한 여전사다. 그러니 린다 카터처럼 가녀린 여자가 맡을 역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미스 아메리카 출신인 린다 카터가 원더 우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섹스 어필을 통한 남자들의 눈요기 거리의 목적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 중간을 지향하고 있다. 갤 가돗으로 하여금 적당히 예쁘고 적당히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린다 카터만큼 예쁘지 않거니와 ‘에일리언 2’의 시고니 위버처럼 강인한 여전사의 모습도 아니었다. 갤 가돗은 2016년 작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2016)에서 이미 원더 우먼으로 출연했다지만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입장에서는 갤 가돗의 원더 우먼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스토리도 다소 불만이다. 영화 ‘원더 우먼’은 다이애나의 출생의 비밀을 시작으로 그녀의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을 그리고 있는데 히어로 영화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그런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다 보니 실망스럽게 다가왔다. 이미 마블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히어로 액션을 원더 우먼에서도 보아야 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문득 린다 카터의 오리지널 원더우먼이 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 영화보다 더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원더 우먼 (Wonder Woman, 2017)
액션, 모험, 판타지, SF | 미국 | 141분 | 2017 .05.31 개봉 | 감독 : 패티 젠킨스
출언 : 갤 가돗(다이애나/원더우먼), 크리스 파인(스티브 트레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