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닷컴]의사신부의 ‘거룩한 우울증’

의사신부의‘거룩한우울증’

동아닷컴2011.12.7

평생세계빈민찾아의료봉사‘또다른이태석’김중호신부

72세의노(老)신부는느린손놀림으로한참동안사제복을가다듬었다.마침내손녀뻘되는여기자와마주앉은그는숨을골랐다.그리고말문을열었다.

“그래,내가우울증에걸린이유가궁금하다고요.하긴하느님을모시는신부가우울증에걸렸다니이상하게들릴만도하죠.”그가담담하게말을이어갔다.“나는평생돈때문에스트레스를참많이받았어요.그래서우울증에걸린거래요.”

김중호신부(사진)는그렇게그동안꺼내지않았던인생이야기를시작했다.

○서울대의대생,사제의길을택하다

일흔을앞둔2008년어느날.갑자기밥한술넘기는게힘에부쳤다.밤에는누워도도통잠이오질않았다.서울성모병원사제관에서사람과마주치는게싫어막내여동생집으로도망가다시피하길수차례.하루종일멍하니앉아있다돌아오는날이늘었다.식구도없이평생성직자로살아온오빠가걱정됐던여동생김남희씨(62)는병원에가보자고졸랐다.

“나는신부다.이모든고통도하느님의뜻일게다.”동생에게는이렇게말했지만의학박사출신인그는누구보다자신의상태를잘알고있었다.지금의증세가의학전공서적에서봤던전형적인우울증이라는것을.

병은쉽사리낫질않았다.2년만에자존심을버리고서울의한정신과상담실을찾았다.몇차례이어진상담끝에의사는그가아픈이유를진단했다.“평생너무과로하셨네요.돈을모아야한다는강박관념도심하시고요.”사실그는서울종로구안국동에서알아주던부잣집둘째아들이었다.아버지는고려대의대교수이자잘나가던외과의사였다.작은아버지들도모두의사였다.할아버지는집안의사들을모아종합병원을차리는게소원이었다.미리병원용지로쓸1653m²(약500평)의땅을사두기까지했다.가업을잇기위해형김명호씨와그는서울대의대에,셋째부호씨는고려대의대에진학했다.의사아버지와의대생삼형제는매일오후10시면부엌식탁에둘러앉아밤참을먹었다.새벽녘까지병원과학교이야기를하면서그의아버지는아들들과함께가족병원을차리는꿈을꾸고있었다.아버지의꿈이깨진건그가본과2년과정을마치던1962년겨울이었다.함께밤참을먹던식탁에서그는돌연의대자퇴를선언했다.“저의대그만두겠습니다.신부가돼야겠어요.”

초등학교시절그는매일오전6시면눈을떴다.학교에가기전매일동네성당에들러그날아침미사에쓸포도주와성경을준비했다.어린아이가복사(服事)일을기특하게잘해낸다는칭찬을들었다.

남과나누는것을좋아하던아이이기도했다.어머니가다섯남매에게똑같이나눠준간식을책상서랍속에숨겨뒀다가다음날형편이어려운친구를집에데려와먹이곤했다.동생들은가난한애들하고만논다고놀렸다.

▼사제복입은서울대출신의사▼

콜롬비아칼다스지역에서환자를진찰하고있는김중호신부.그는2003년부터2005년까지콜롬비아환자1798명을진료했다.

고이경재신부는그런그를눈여겨봤다.이신부는갈곳없는한센병환자들을위해경기의왕시오전동에만들어진‘성라자로마을’의초대원장을지낸분이다.그에겐인생의멘토였다.의대진학을앞두고공부에매진하던경기고재학시절이신부는넌지시말했다.“네집안에육체를고치는의사는많으니너는영혼을위로하는사제가되어라.”서울대의대에합격한뒤에도이말은늘귓가를맴돌았다.그러다그의영혼을지배해거스를수없는신(神)의명(命)으로다가왔다.

그의변심에아버지는노발대발했다.아들을하늘에뺏겼다는충격에한국가톨릭의사협회초대회장을맡을정도로신앙심이깊던아버지는이후몇년간성당에발길을끊었다.

그는기어이그해봄,7년과정의가톨릭대신학대에입학했다.2년째라틴어와기도를배우던때서울대에서연락이왔다.올해복학하지않으면퇴학처리된다고했다.자퇴처리된줄알았지만아버지가남들모르게휴학처리를해뒀던것이다.다시한번신부와의사사이의갈림길에서고민하던그를신학대학장이불렀다.“의대생은여자한테인기가좋다고하던데….속세에흔들리지말고반드시돌아오겠다고약속하여라.그리고돌아오거든의술은반드시어려운사람들을위해써야한다.”

2년뒤인1966년8월그는연애의유혹을뿌리치고의대를졸업했다.그리고약속한대로신학대로돌아왔다.남은5년과정을마치고1973년사제품을받았을때그의나이는34세였다.이제어려운사람을위해의술을베풀겠다는두번째약속을지킬때였다.

○가시밭길을걷다

지금은없어진혜화동성신고지도신부로재직하던1975년여름,그는서울의모든쓰레기가모인다는난지도한복판에서있었다.쓰레기썩는냄새가코를찔렀다.‘이런난장판속에4000명이살고있다니….’빈민촌을돌보던수녀의요청을받고처음가본난지도였다.온실속화초처럼자랐던그였기에충격은더컸다.미안한마음반,약속은지킨다는마음반으로10년간일요일오후마다난지도로갔다.꼬박세시간을앉아줄선환자들을보살폈다.‘한두번오다말겠지’하던그곳사람들도어느덧그를기다리기시작했다.

의사출신신부가난지도수녀원에임시진료소를차렸다는소문이돌자구로구시흥동,관악구신림동등달동네에서방문요청이쇄도했다.혼자감당하기버거워진그는서울대의대동기와가톨릭학원소속의사들을총동원했다.매달당직표를짜후배의사들을봉사현장에데리고갔다.하루쉬는주말,가기싫다고버티는후배에게는“의술을베푼다고생각해서는안된다.그들로부터겸손해지는법을배워라”라고했다.

그렇게15년이흘렀다.1987년의어느일요일,그는처음으로난지도의료봉사를빼먹었다.학교에는2주간휴가를내고돌연미국행비행기에올랐다.뉴욕과마이애미를거쳐에콰도르수도키토로가는40시간이넘는비행길이었다.키토에서다시버스를타고달리기를8시간.그는해안가를따라펼쳐진‘팔마’라는작은마을에도착했다.그곳에는단한번도의사를만나본적이없다는사람들이있었다.먼동양나라에서의사가왔다는말에감기몸살환자부터신장병환자,암환자까지줄을섰다.40도가넘는더위속에말도안통해고역인2주였다.그2주간그는타이레놀한알을보물인양손에꼭쥔채뛰어가는아이들을만났다.부족한모유때문에영양실조에걸린신생아를품에안았다.그곳에서그는남은인생자신이가야할길에대한확신을얻었다.

한국으로돌아온그는전재산을빈곤지역에진료소를세우는데쓰기로결심했다.가톨릭대의대교수로,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장으로일하며모은돈이꽤됐다.그가속한가톨릭학원도그의뜻에동참했다.해외의료봉사를후원하기로했고‘국제의료봉사단’이라는이름도붙여줬다.

봉사단은이듬해까지에콰도르를다시찾아총2705명의환자를돌봤다.1992년부터1995년까지는아프리카케냐체송고치지역을,1997년부터2002년까지몽골토브도12개마을을갔다.1999년12월동티모르사태가발생했을때는김수환추기경의긴급지시로무슬림환자들을치료했다.사제복을입은그앞에무슬림환자649명이줄을섰다.생사의갈림길에서종교간갈등은무의미했다.

목숨이위태로웠던적도있었다.1992년찾아간케냐는더운날씨만큼이나모기가많았다.한번다녀올때마다온몸이모기에뜯긴상처투성이였다.오랜해외봉사를마치고국내연구실로복귀해밀린일을하던도중갑자기얼굴에열이확올랐다.체온은39도를넘은상태였다.잠복기를거친말라리아가발병한것이다.아프리카여행이흔치않던때라당시국내에는말라리아약조차없었다.가톨릭학원측에서영국에급히문의해일주일만에약을공수해간신히목숨을건졌다.말그대로죽다살아난것이다.

1973년시작한의료봉사는2007년에야끝났다.35년에걸친대장정이었다.그동안그가무료치료한환자는자그마치3만5000여명.가톨릭학원후배의사들은지금도봉사단을운영하고있다.그에게지난시간동안무엇이가장힘들었는지물었다.“아무래도비용문제죠.”기자를당황하게만든돈이야기가다시나왔다.다시생각해보니이해도됐다.8명규모의봉사단이해외로나가2주간진료를하려면아무리아껴도족히5000만원은든다.가는곳마다오지여서들어가고나오는교통비만수천만원이든다.준비해가야할약값도만만치않다.갈곳은많고비용부담은크니늘돈이문제였던것이다.

그래서그는주말마다성당을다니며추가헌금을걷었다.성모병원과가톨릭대의대는물론이고의사협회마다찾아가후원을요청했다.1년에한번씩은잘나가는서울대의대동문들을찾아다니며약값만내달라고부탁했다.구걸하는것처럼보일까봐,잘난척하는것처럼보일까봐속으로끙끙앓기를34년.그동안그도모르게스스로쌓아온스트레스가은퇴직후병으로나타났다.“나는그동안내가늙어가는것도모르고일만했어요.스스로를너무달달볶았나봐요.”

최근병세가상당히호전되자그는다시욕심을내고있다.내년봄날씨가따뜻해지면다시콜롬비아로돌아가겠다고했다.다만콜롬비아에봉사단을이끌고가려면또수천만원이필요하다.그는조금씩만정성을모으면그곳의빈민이처음으로약을먹을수있고항생제를맞을수있다고했다.그가이번인터뷰에어렵사리응한이유였다.

○에필로그

두시간넘게김신부의이야기를듣던기자는지난해세상을떠난이태석신부를떠올렸다.인제대의대와광주가톨릭대신학대를졸업한이신부는아프리카수단남부오지마을톤즈에서무료진료활동을하다암으로사망했다.‘울지마톤즈’라는다큐멘터리를통해그의선행은뒤늦게고국에알려졌다.

이신부이야기를꺼내자내내조용하게인터뷰를지켜보던여동생남희씨가말을꺼냈다.“이신부님이너무일찍가셨죠.하느님이아직우리오빠한테는시키실일이많나봐요.그래서잠깐쉬라고일부러병을주신건가봐요.”

▼부친형동생도…핏줄에흐르는봉사정신▼

인도네시아쓰나미상처도치료2005년3월인도네시아오지마을을찾아갔을때찍은김중호신부(뒷줄왼쪽에서다섯번째)와마을사람들의기념사진.김신부와가톨릭학원소속의사들로꾸려진국제의료봉사단은당시지진해일(쓰나미)사태로부상을당한1만2877명을치료했다.김중호신부제공

봉사와선행은김중호신부집안의내력이다.김신부의아버지인김웅규박사(1998년작고)는고려대의대외과교수출신으로서울가톨릭의사회와한국가톨릭의사협회초대회장을지냈다.서울종로구안국동에서외과병원을운영했던그는평소가난한환자에게서는돈을받지않았다.김신부는“아버지는우물쭈물하는환자가있으면나중에벌어서갚으라고말하던분”이라고회고했다.

4남1녀중맏이인명호씨(77)는서울대의대를졸업하고1978년정부파견의사를지원했다.처음아프리카우간다로갈때는몇년만있다돌아올생각이었지만그곳사람들의눈망울에반해24년간케냐말라위레소토에서진료했다.그는최근동아일보와의인터뷰에서“죽음을앞둔환자들을수술로치료해살리는보람으로살았다”고했다.

2009년부터우울증으로투병중인김신부를보살피고있는막내남희씨(62·여)는오빠앞으로들어온인세와월급을차곡차곡모으고있다.“돈이없어서의술을못배우는사람이있어서는안된다.한명이라도더의사가돼어려운사람을돌봐야한다”고강조해온오빠의뜻을받들기위해장학기금을마련하고있는것이다.훗날오빠가세상을떠나면가톨릭대에전달할계획이다.

형제중유일하게건축학도의길을간넷째자호씨(66)는현재건축업체인간삼건축회장이다.1990년대김신부의부탁으로서울구로구시흥동에‘전진상의료원’을무료로설계한것을시작으로최근푸르메재단어린이재활병원에도설계도를기부했다.

셋째부호씨(69)는고려대의대를졸업한뒤미국으로이민을떠났다.

김지현기자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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