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대북 공작’ 南 3000명, 北 250명 숙청된 98년이 분수령

‘대북공작’南3000명,北250명숙청된98년이분수령조인스닷컴201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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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오피니언리더의신문"국가정보대학원에서특강을마친국가정보원신입요원들이‘정보는국력이다’라는원훈(院訓)이걸린복도계단을오르고있다.[사진=중앙포토]노무현정부에서국정원고위간부를지낸A씨는본지기자와만나“국정원에가보니대공분야에는쓸사람이거의없어깜짝놀랐다”고자신의경험을털어놨다.몇년전일이지만최근김정일사망을까맣게몰랐던요즘‘국정원무능론’의역사가깊다는것을보여준다.한국최고의정보기관은언제부터이런지경이된걸까.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전직간부와탈북자의말을종합하면1998년은남과북에서‘북한공작’을둘러싼대형사태가벌어진분수령이었다.남한이먼저였다.그해3월말당시안기부대북공작국소속간부A·B씨는‘재택근무’명령을받았다.4월1일부로나가라는뜻이었다.휴민트(인적정보)를맡은대북공작국과대공수사국이조직개편으로없어졌다는게명분이었다.김대중대통령취임후한달조금지난때였다.새대통령은안기부에대대적물갈이폭풍을일으켰고북한파트도휩쓸렸다.국정원강제퇴직자모임인‘국정원을사랑하는모임(국사모)’의송영인대표는당시상황을“4월1일은국정원581명직원들이당한날”이라고표현한다.중앙정보부때부터29년6개월째근무해왔고이때는제주도부지부장이었던그에게새지부장은3월31일‘면직및재택근무’를통보했다.사유는‘한나라당서청원사무총장과의친분’이었다.그는1일내곡동으로항의하러달려갔지만총을들이대는방호요원에게막혔다.‘국내정보·정치파트의직원과북풍사건개입자들이다잘렸다’‘경상도70%가쫓겨났다’‘북한국이통째로없어졌다’는말들이난무했다.이즈음파견근무를마치고검찰로복귀한권영세국회정보위원장(한나라당)은“당시살생부가돌았다”고기억했다.송지부장은같은처지의간부들과‘버티자’고했다.그러나결국그를포함한2급이상간부33명은퇴직조치됐다.거기엔A씨등북한공작국소속간부,대공수사국간부,보안과장등이들어있었다.이가운데21명이99년3월30일면직취소소송을냈다.소송과정에서인사명령부같은자료가취합되면서물갈이광풍의면모가드러났다.98년4월1일의‘1차쇄신’의대상은부이사관급140명을포함해서기관급581명이었다.동시에안기부밖에선대공경찰2500명,기무사요원600여명,공안검사40여명이해직됐다.8개월뒤12월의‘2차쇄신’내용은300명의추가명퇴였다.대북공작국과대공수사국이없어졌지만면직되진않아‘일없이남은직원’들이대거나갔다.8개월사이900여명안기부직원이나가면서수백명북한담당인력도함께사라졌다.당시안기부내북한분석관이었던P씨는“이사관급이상간부수백명이당시쫓겨나는것을봤다”고했다.99년1월안기부는국가정보원으로이름을바꾸고쫓겨난자리를500명새직원이채웠다.모두이종찬원장-이강래기획조정실장때의일이다.(※21명은2003년9월12일면직무효소송에서승소했다.송대표는“대북담당들은대외접촉을꺼린다”고했다.)이처럼안기부가소용돌이에휘말려있던98년10월,북한에서도일이벌어졌다.2001년탈북했던김유송(53)씨의말이다.당시상좌로총참모부산하함경도무역회사책임자였던그는이때많은장성들이보위부로끌려가는것을봤다.친했던교도훈련지도총국장임태영상장(우리의중장),총참모부2전투훈련국장우명훈중장,64저격여단이상일소장등이다잡혔다.평소친하게지내던안피득총참모부부참모장과안산관에서만났다.군사건설국장출신안부참모장은97년금강산공사를완공해공화국영웅칭호를받은장성이었다.안부참모장은“자고나면옆집장성이없어져불안하다”고했다.그는인민무력부장성들사택에서살고있었지만왜그런지는몰랐다.후에그도체포됐다.김씨는보위사령부함북책임지도원김선우상장,김상욱고려호텔책임지도원등여러사람에게이유를물었다.모두“남한정권이북한사람을고용했던자료를북조선에넘겨줘서잡은것”이라고했다.김씨도99년9월13일‘정부전복음모’로체포돼9일간감옥쇠창살에매달려고문을받았다.끝까지혐의를부인했지만15년형을받았다가‘힘있는사람’의도움으로6개월만에나왔고이어탈북했다.사업차충남홍성에있는그를23일찾아갔다.-당시사태의원인은날조아닌가.“아니다.그들이박정희대통령때‘김일성에게충성해서인민군의최고자리까지올라가라’는지령을받았다고분명히들었다.”-사람수를어떻게알았나.“감옥에서들었다.남에서전향시켜북으로보낸사람,북에서직접포섭한사람이50명정도고나머지는그들에게협력한사람일것이다.모두장군100여명,당간부150명이상이체포되고일부는사형됐다.”이두사태의관계를단정할수도없고그래서도안된다.다만권영세국회정보위원장이이두사건의관련성은알수없으나이와관계없이과거남쪽에서북한내첩보망을일부러공개시켰었다고국정원일각에서주장한다고말한점은주목된다.이종찬이물러나고천용택원장이들어온뒤에도‘인적쇄신’은계속됐다.계급정년을단축시켜‘고참’을정리했다.당시국정원고위간부였던김모씨는“서기관에서부이사관이되는기간을7년에서5~6년으로줄였다”고했다.이같은신구인력의대거교체가대북정보수집에미친영향에대해만난사람모두가“위축됐다”고말한다.6·15남북정상회담을두달앞둔2000년4월,군정보기관의실무고위자유모씨에게국정원기조실데스크의전화가왔다.“대북공작을완화하고템포를늦추라”는것이었다.이씨는“그런일을전화로접수못한다.문서로달라”고했다.소용없었다.예산이뭉텅잘려나갔다.그는“2006년노무현정부때까지계속20%정도씩줄였다.김만복위원장때는예산이거의반토막났다.내가다루던100억원규모의휴민트예산도거의반토막났다”고말했다.예산이주니인력도줄었다.강제퇴직은안시켰지만남는팀원을야전으로보내면적응못하고결국퇴직했다.그런상황은정보활동에악영향을미쳤다.유씨는“활동내용은법에공개금지돼있어말못하지만활동이둔해졌고정보소스개발이안되고정보의질이떨어졌다”고했다.국정원이나군정보당국의정보수집과공작은탈북자,북한국적중국인(조교),조선족,러시아동포,조총련등을거쳐북한내부와연결된다.단계가복잡해질수록돈이더든다.휴민트활동비삭감은우선정보당국의활동을줄이고이돈에의지하던휴민트사슬에타격을준다.유씨는“돈이아니면사람을부릴수없어휴민트가척박해지는현실에서예산이줄어드니일이더어렵게됐다”고말했다.그러다보니같이일을했던탈북자들이다른돈에흔들리게됐다.이중첩자로도돌아섰다.그래서2005년에국정원에서‘탈북자사용자제’지시가내려왔다.탈북자역할이컸던북한내부첩보망이크게위축됐다.여기에일본도방해가됐다.유씨는“일본이한국보다10배쯤더돈을쓰면서동영상이나자료,정보를가져간다”며“돈이적은우리는정이나의리로정보원을대하는데아직은다행히통한다”고했다.그러나탈북자박모씨의말은다르다.“한국정보당국은너무짜다.일본은적어도세배이상을준다.한국이자료에100만원을준다면최하300만~500만원을준다.영상은훨씬더준다”며“그런게쌓이면김정일사망같은대형정보가일본으로기울수있을것”이라고했다.이렇게정보사업이상업화되면서공작이나침투등을통해굵직한정보를가져오는‘원조휴민트사업’이위축되는현상도생긴다.한직원은“조금위험하다싶거나남북관계를긴장시키는대북공작은하려들지않고몸을사린다”고지적한다.결국모든상황들이평소정보의질을떨어뜨리고초특급정보수집도어렵게만드는방향으로향한다.국정원고위직에있던외교부출신고위인사는“첫브리핑때내가아는북한인사를엉뚱하게설명하더라”고했다.또다른전국정원고위인사도“사람들은국정원이첩보영화에서처럼김정일의일거수일투족까지다알고어마어마할것이라고기대한다”며“그러니그런기대를갖고임명된새원장이브리핑을받을때알려진것보다조금진전돼있을뿐인것을보고다놀라게된다”고했다.그는“통신·감청을제외하면휴민트에의존하는정보는신문사보다각별히빠를것도없다고보면된다”고말했다.권영세국회정보위원장도“종합분석력을빼면국정원의정보수준이시민사회보다크게차이나지않는다”고했다.이런현실을이명박정부가개선할것으로기대하기도어렵다.국사모송영인대표에따르면이명박대통령초기국정원부흥의기대가있었다.송씨는“2008년대통령특명에따라김성호원장이국정원과거사조사에나서연인원3000명이6개월간동원돼1만5000쪽짜리보고서를냈다.그런데김원장은퇴직하기전양지회(퇴직국정원간부모임)에서‘보고서가알려지면안된다.여러사람이다친다’고했다”고전했다.이후국정원은부흥에서거리가멀어졌다는것이다.최근국정원간부들을만났던전직간부는“이정부들어와대북업무조직을재편하고경쟁구도도만들었지만‘몇몇이인사를휘두른다’는불만이팽배해있다”며“많은이가‘사고안치고복지부동하며사는게좋다’는분위기”라고전했다.다른고위간부도“국정원내5인방을말하는사람도있다”고했다.중앙SUNDAY구독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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