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교수·병원과장직던지고
2009년쪽방촌무료병원으로
지하철1호선영등포역에서신도림방향으로1-2분,불과30여m를걸어가면’이곳이서울일까’란생각이들만큼초라한동네가나타난다.집과집을양철지붕으로이어붙인쪽방들.
이곳영등포쪽방촌골목한가운데붉은벽돌로지어진오래된3층건물의요셉의원이있다.이요셉의원에는세상가장낮은곳에서아파하는이들을보듬으며살아가는이가있다.‘영등포슈바이처’신완식(61)박사다.
의대교수·병원과장직던지고
2009년쪽방촌무료병원으로
지하철1호선영등포역에서신도림방향으로1-2분,불과30여m를걸어가면’이곳이서울일까’란생각이들만큼초라한동네가나타난다.집과집을양철지붕으로이어붙인쪽방들.
이곳영등포쪽방촌골목한가운데붉은벽돌로지어진오래된3층건물의요셉의원이있다.이요셉의원에는세상가장낮은곳에서아파하는이들을보듬으며살아가는이가있다.‘영등포슈바이처’신완식(61)박사다.
요셉병원은1987년‘가난한이들의아버지’로불리던고(故)선우경식박사가‘세상가장낮은곳의사람들’을위해세운무료병원이다.선우경식박사가2008년갑자기세상을떠난후,그와함께사라질뻔했던이곳을지키겠다며나선이가신완식박사다.신박사는감염내과분야한국최고권위자다.2년전만해도신박사는가톨릭의대교수이자여의도성모병원내과과장,가톨릭중앙의료원세포치료사업단장과가톨릭생명위원회위원까지겸직했던,대한민국에서가장잘나가던의사이자교수였다.
이곳에선늘부끄러워진다
그가2009년2월,정년까지6년이나남아있던교수직을내던지고단한푼의보수조차받지못하는요셉의원으로옮겨왔다.그리고지금치료비한푼낼수없는노숙자와행려자의상처를어루만지며그들과함께이곳영등포동쪽방촌을지키고있다.
1월6일,2012년의첫금요일에찾은요셉의원2층.진료실에서만난신완식박사의얼굴은세상그누구보다행복하고편안해보였다.
그는“이곳에서가슴으로웃는법을알았고,세상에감사할줄아는삶을찾았다”고했다.
“제가이곳에서가장많이하는말이‘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입니다.대학병원에서의사로,또교수로부족한것없이나만을생각하며살때는좀처럼꺼내지않았던말이지요.제가진료에만전념할수있도록저보다일찍나와아침부터저녁까지아무대가도바라지않고묵묵히청소를해주시는분들.술취하고,더러운행색으로밀려드는환자들을마치자기몸을씻어내듯닦아주면서도단한번‘힘들다’는말을꺼내지않는자원봉사자들을하루도빼지않고마주하게됩니다.그분들을마주하면서‘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란말이저절로나오게되더군요.이분들뿐아니지요.차가운우리사회로부터상처받고쓰러졌던분들이다시세상속으로돌아가려노력하는모습을보일때면하루에도수십번‘감사하다’는말을하게되더군요.그분들을통해오히려제가사는것에대한고마움을느끼고있는거지요.”
“요셉의원에종종들러목욕봉사를해주시는분이계십니다.얼마전그분이병원에오신날하반신을못쓰는행려환자가실려왔지요.얼마나안씻었는지몸전체에서심한악취가났어요.치료를위해발과항문을반드시씻겨야했는데몸에서나는악취때문에저조차발과항문주위를씻길엄두를내지못했습니다.그때그봉사자분께서조용히행려환자의옷을벗기더니환자의발에따뜻한물을몇번적시더군요.그리곤그발에입을맞추셨지요.그순간봉사자분의표정에선더이상악취란없는것처럼보였습니다.이후발과항문주변까지깨끗이씻겨주셨지요.”그는“불과30여분쯤이었다”며지금껏자신의기억이담아낸‘가장성스럽고아름다운장면’이었다고했다.“‘천사가살아있다면그모습이아니었을까’란생각이들더군요.그러지못했던제자신에게‘부끄럽다’란게어떤건지처음알게됐습니다.또하루하루를반성하며사는법을그제야알게됐지요.지금은그분같은천사들과같은공간에서숨쉬며살고있다는사실이감사한것임을배워가고있습니다.”
신박사는자신이누군가에게많은것을베풀고있다는말을단한번도꺼내지않았다.대신자신을둘러싼모든것으로부터감사함을배울수있어고마울뿐이라고했다.
잘나가던의사이자교수였던그가영등포쪽방촌의무료진료소에둥지를튼이유는무엇일까.
“2년전이나지금이나많은이들이‘남들은못해서안달인의대교수를,그것도정년을6년이나남겨두고왜그만뒀냐’는게가장궁금한모양입니다.사실딱히답할수있는이유가없어요.저도그이유를잘모르니까요.”
그는“막연히‘의사신완식,교수신완식’으로만인생을마치고싶지는않았다”고했다.“의대졸업과레지던트과정까지마치고전문의가됐을때‘이제개업해서돈많이벌어야지’하는생각을잠깐했었습니다.그때아버지께서‘힘들게공부한만큼세상과사람들에게도움되는삶을살아야한다’고몇번이나얘기하시더군요.그말에개업을접고학교에남아교수까지했던겁니다.근데50줄에접어들면서그때아버지가했던말이또생각나더군요.물론구체적으로‘뭘해야할까’를그려놓은건아무것도없었어요.”
2008년말부터2009년초사이,신박사는곧60줄에들어서게될자신을생각하니‘지금뭔가하지않으면아무것도못할것같다’는생각이들었다고했다.
“그냥‘무언가를하고싶다’라는막연한생각에서사표를냈던겁니다.어쩌면막연한공명심이나정의감을하늘에계실아버지나,제주변누군가에게보여주고싶었는지도모를일이지요.뭐그렇게의대와병원에사표를냈던겁니다.”
2009년초사표를낸그길로신박사는작별인사를위해자신을마냥믿어주기만
지난1월6일서울영등포쪽방촌요셉의원에서진료를받기위해긴줄을서있는노숙자,행려자,외국인근로자들.
“행복한자원봉사자얼굴보며대학병원과장때는잘하지않던‘고맙습니다’를말하게됐다”했던가톨릭중앙의료원장최영식신부를찾아갔다.
“사표내고처음찾아뵌분이최영식신부님이었지요.자리에앉자마자‘제가사고를쳤습니다’라고고백했어요.신부님께선‘행여그런말하지마시라’며농담인줄아셨나봐요.자초지종을말씀드렸더니‘생각했던것보다빠르긴했지만언젠가그렇게할거라짐작은했었다’며웃으시더군요.그리곤‘이제뭐하시게요?’라고물으시기에‘아직계획이없어요’라고솔직히말씀드렸어요.그러자‘전부터상의하고싶은말이있었다’며2008년돌아가신선우경식박사님과요셉의원이야기를하시더군요.입으로꺼내진않으셨지만신부님눈이‘신박사님그곳에둥지를터주실수있으신지요’라고계속말씀하시는걸알았어요.사실제가어른들말씀참잘듣습니다.(하하하)고민이고뭐고,‘아왜그런자리이제껏얘기안했냐’고말한후,다음날부터요셉의원으로출근하기시작한겁니다.(하하하)”
그도울고,요셉병원사람들도울고,쪽방촌사람들도함께울었던기억하나를꺼내놓았다.
“이곳을찾는이들은노숙자나행려자입니다.돈도없고,연고도없지요.생각하는것이상으로상황이좋지않습니다.아마여기에오기전까지병원은커녕약국에서감기약한번얻어먹어보지못한이들이대부분일겁니다.견디다견디다,더이상못견딜지경이돼서야이곳을찾아오지요.근데그때는대부분손쓰기힘들지경이랍니다.”
그가처음이곳에둥지를틀고얼마안됐을때일이라며입을열었다.“교도소에서나와이곳저곳을떠돌던이가있었습니다.어떻게하다가‘욱’하는바람에사람을죽였다고하더군요.그죄로20년을교도소에있다나왔지만그를받아줄이가우리사회엔없었던겁니다.그렇게세상을떠돌다병을얻었어요.알고보니폐암이었지요.손쓸수없는상태에서마지막으로이곳을찾았던겁니다.”
신박사는의사도,이곳원장도아닌그냥그와같은인간으로서,그에게이제더이상혼자가아니라는걸알려주고싶었다고했다.“서울대병원에사정했더니치료는해주겠지만입원은안된다고하더군요.우리가데리고있으면서항암치료를받아보게했지만이미몸이견디지못했어요.마지막엔몸을전혀움직이지못하더군요.죽었습니다.제품에서그렇게무기력하게한생명을보냈단생각에저도모르게울었습니다.20년을넘게대학병원에있으면서수없이죽음을경험했지만눈물을흘리지않았던접니다.근데눈물이나더군요.머리를아주세게맞은것같았어요.이곳에서할일이무엇인지어렴풋이알것같더군요.”
그의눈이붉어졌다.신박사는금방이라도눈물이쏟아질것같이촉촉해진눈을손수건으로닦아냈다.
그는우리사회가고민하고풀어가야할의미있는이야기를꺼냈다.
“‘가난은나라님도못막는다’고하더군요.그래도이곳이지금처럼하루100명이넘는노숙자와행려자,외국인노동자들로붐비는곳이아니었으면좋겠습니다.할일이더이상은없어제가백수가되는세상이행복한세상아닐까요.이곳을찾는사람이많다는건결국우리사회가약자를끌어안아줄만큼포용력있는따뜻한사회가못된다는말이잖아요.나와다른이도품어줄수있는그런세상을보고싶습니다.”
정부·서울시지원한푼도없어
요셉의원은매일노숙자,행려자,외국인노동자등100명이넘는환자가밀려든다.기자가찾았던1월6일오후1시가조금넘어선시간역시초라한행색을한노숙자와행려자들의행렬이요셉의원정문을지나밖까지이어지고있었다.
그런환자들을볼때마다최고의시설과의료진이가득했던대학병원에서만생활해온신완식박사에게요셉병원의상황은안타까움으로가득했다.
“어찌하겠습니까.요즘은조금아쉽고,빠듯한이곳살림이저뿐아니라요셉의원가족모두를좀더열정적으로만드는에너지가아닌가하는생각을해보기도합니다.”
그가요셉의원의상황은비슷한전국의다른무료진료소들에비해그나마나은편이라고했다.“고맙게도주말이면자원봉사오는의사와간호사가꽤됩니다.또수술이나정밀검사가필요한환자를부탁하면내치지않고응해주는몇몇큰병원과의사들도있지요.이런혜택조차받을수없는지방보다는나은편입니다.”
그럼에도아쉬운건어쩔수없는일이다.요셉의원은정부나서울시로부터지원을받지않는다.코흘리개꼬마부터할머니할아버지들까지보통사람들이한푼두푼을모아보내준성금과자원봉사자들의열정만으로운영되고있다.신박사는그분들의이름과얼굴을알진못하지만꼭“너무감사하다”는말을전해달라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