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시골동네어귀에교회가있었다.크리스마스무렵교회에서나눠주는사탕이탐나몇번인가갔다.마룻바닥에방석깔고찬송가를더듬더듬따라불렀다.낮게앉아쳐다보는강단과설교대가높고컸다.철들어다시찾은교회는어찌그리작던지.예배당엔방석대신긴의자들이놓여있었다.시멘트를발라버린바닥이유난히차갑고휑했다.여태종교를갖지못했지만50년전마룻바닥예배의푸근한기억이몸에새겨져있다. 강원도횡성산골짜기에의자없이맨마루만깔아놓은성당이있다.106년전성당지을때송판마루그대로다.순례자들은한쪽에쌓인방석을가져다깔고꿇어앉는다.제대(祭臺)를우러르며기도한다.넓지도좁지도않게아흔평남짓한예배당에앉으면고향에라도온것같다.무언가로서성이며살아온일상의앙금이가라앉는다.신자아니라도마음이편안하고정갈해진다.이땅에일곱번째로지은성당,한국인신부가처음세운성당,우리나라두번째본당이자강원도첫성당,가톨릭최초·최대신앙촌….풍수원성당이다. 장맛비가잠깐그친주말,횡성군서원면유현리로차를몰았다.양평6번국도따라가는90㎞길이번듯하지만90년대까지도좁은흙길로만닿던곳이다.주차장에차세우고순한언덕을오른다.작년늦가을비에젖어황금빛으로찬란하던잎들이어느덧진초록으로무성하다.걸음을뗄때마다아침안개옅게낀언덕끝에서붉은벽돌성당이조금씩얼굴을내민다.작고간결하고소박하지만모양새는명동성당을빼닮았다.22m종탑보다키가큰이백살느티나무두그루가성당문에푸른가지를드리웠다. 신발벗고한짝짜리여닫이문을밀고들어섰다.이른아침이어서예배당마루가텅비었다.열어둔옆문앞에수녀한분이앉아책을읽는다.제단도조촐하다.단정한스테인드글라스창으로아침햇살이은은하고따스하게비쳐든다. 벽을빙둘러가며예수수난부터죽음까지열네장면을담은’14처(處)’그림이걸려있다.석고로빚고채색한부조(浮彫)들이촌스럽도록투박하다.그아래쓰인글은더예스럽다.백년전성경말씀처럼고어(古語)투다.’예수죽을죄인으로판단함을받으심이라”성베로니가흰수건으로예수의성면(聖面)을씻음이라”예수기력이핍진하사제이차엎더지심이라”예수의성시(聖屍)를장사(葬事)함이라’…. 들고있던카메라가그럴싸해보였는지수녀님이"사진작가냐"고묻는다."그냥취미"라고하자"마룻바닥에누워둥근천장을찍으면멋지게나온다더라"며불까지켜준다.친절을마다할수없어누워서몇컷찍는데면셔츠·반바지에면장갑낀남자가왔다.일하는인부인가했더니도끼눈으로째려본다.제단의낡은카펫을바꾸러들어온주임신부다.머리허연자(者)가경건한성전(聖殿)에벌렁누워있으니어이가없었을것이다. 머쓱해서밖으로나왔다.외벽벽돌에도세월의더께가앉았다.붉은빛이많이바랬다.그나마잿빛,검은빛벽돌이드문드문섞여땜질이라도해놓은것같다.백몇년전벽돌을굽고쌓았을신자들의땀과기쁨이배있다. 1801년용인사는천주교신자마흔몇이신유박해를피해여드레를헤매다풍수원에숨어들었다.화전일구고옹기구우며믿음을지켰다.쇄국정책속에탄압은더욱모질었고곳곳에서신자가모여천명에이르렀다.1887년신앙의자유가열리고조선동부를아우르는본당이됐을땐이천명을넘었다.그환희와찬송이얼마나컸을까. 1896년세번째한국인사제정규하신부가풍수원에부임해왔다.그는제대로된성당을지으려고명동성당을본떠설계도를그렸다.신자들이산에서나무를베어오고옹기가마에서벽돌을구워냈다.강릉·양양신자들까지태백산맥을보름걸려넘어와일손을보탰다.몸과마음을쏟아부은공사끝에1907년성당이섰다.풍수원은광복후까지전국에서모여든신자들로붐비다본당들이가지쳐나가면서고즈넉한성지(聖地)로남았다. 풍수원에서’십자가의길’을걷지않으면절반밖에못보는셈이다.성당왼쪽뒤예수평화상(像)에서숲속언덕길이시작한다.판화가이철수가그림과글을새긴14처비(碑)가늘어섰다.’예수사형선고받으시다”십자가를지시다”두번째넘어지시다’….성당안과달리간명하다.작년가을잘익은밤송이가후드득떨어지던길엔싱그러운녹음이들어찼다.소나무몸뚱이에여름비먹은이끼가파랗다.예수의고난을따라묵상(默想)하는길,천천히걸으며삶을돌아보는사색의길이다. 풍수원엔세번째걸음했다.성호는그을줄몰라도갈때마다위안과평화를얻는다.머리가맑아진다.그래서원주용소막성당,익산나바위한옥성당,아산공세리성당도가봤다.거기깃든백년세월과믿음과헌신(獻身)을호흡하자면한결같이평온해진다.우리땅엔갈곳이참많다. 수석논설위원 조선닷컴2013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