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꽃의 고요’

황동규-‘꽃의고요’문학과지성시인선312

-더딘슬픔
불을끄고도어둠속에얼마동안
형광등형체희끄무레남아있듯이,
눈그치고길모퉁이눈더미가채녹지않고
허물어진추억의일부처럼놓여있듯이,
봄이와도잎피지않는나뭇가지
중력(重力)마처놓치지않으려쓸쓸한소리내듯이,
나도죽고나서얼마동안숨죽이고
이세상에그냥남아있을것같다.
그대불꺼지고연기한번뜬후
너무더디게
더디게가는봄.
-손털기전
누군가말했다.
‘머리칼에먹칠을해도
사흘후면흰터럭다시정수리를뒤덮는나이에
여직책들을들뜨게하는가.
거북해하는사전들치며?
이젠가진걸하나씩놓아주고
마음가까이두고산것부터놓아주고
저우주뒤편으로갈채비를해야할땐데.’
밤중에깨어생각에잠긴다.
‘얼마전부터나는미래를향해책을읽지않았다.
미래는현재보다도더빨리비워지고헐거워진다.
날리는꽃잎들의헐거움.
어떻게세상을외우고가겠는가?
나는익힌것을낯설게하려고책을읽는다.
몇번이고되물어관계들이헐거워지면
손털고우주뒤편으로갈것이다.’
우주뒤편은
어린날숨곤하던장독대일것이다.
노란꽃다지땅바닥을기어
숨은곳까지따라오던공간일것이다.
노곤한봄날술래잡기하다가
따라오지말라고꽃다지에게손짓하며졸다
문득깨어대체예가어디지?두리번거릴때
금칠로빛나는세상에아이들이모이는그런시간일것이다.
-실어증은침묵의한극치이니
아이빈자리!
자주만나이야기를나누던‘누구’가
의자하나달랑남기고사라지고
오랜만에만나사람이
그‘누구’와무척가깝지않았어요?물을때
느낌만남는자리.
목구멍에잠시나마머물게할무엇이나타나지않는….
나름대로무심히지나칠수있는공터만있는….
-참을수없을만큼
사진은계속웃고있더구나,이드러낸채.
그동안지탱해준내장더애먹이지말고
예순몇해같이살아준몸의진더빼지말고
슬쩍내뺐구나!생각을이한곳으로몰며
아들또래들이정신없이고스톱치며살아있는방을건너
빈소를나왔다.
이팝나무가문등(門燈)을뒤로하고앞을막았다
온가지에참을수없을만큼
참을수없을만큼하얀밥풀을가득달고.
‘이것더먹고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온몸에서썰물처럼빠질때
네마지막으로느끼고본게,참을수없을만큼?
동체(胴體)부듯욕정이치밀었다.
나무앞에서멈칫하는사이
너는환한어둑발속으로뛰어들었다.
-영포(零浦),그다음은?
자꾸졸아든다
만리포천리포백리포십리포
다음은그대한발앞서간영포.
차츰살림줄이는솔밭들을거치니
해송줄기들이성겨지고
바다가몸째드러난다.
이젠누가일러주지않아도알것같다
영포다음은마이너스포(浦).
서녘하늘에해문득전해지고
해송들사이로바다가두근거릴때
밀물드는개펄에나가낯선게들과놀며
우리처음만나기전그대를만나리.
-서귀(西歸)를뜨며
실비속에두루마리수천개풀려굴러오듯밀려오는저물결
벼랑넘어와흩어지며일렁이는저소리.
벼랑끝에한줄로매달려턱걸이하고있는섬쥐똥나무들
멋지게휘는해안도로에뛰어들진못하고
얼굴만내밀고있다.
채정돈안된도시,그래더정다운서귀포떠나
태평양끼고남원가는길,
물결소리마음대로들락거리게창열고천천히달리며
길금세끝나지않기를빌며
후둑이는빗방울목덜미에맞는마음어둡지않다.
다시올때는차도유리창도목덜미도없이
물결로오리.
태평양벗어나지귀도에서
속쓰린물새들과한뎃잠한번자고
말목곡선으로멋지게휘는해안도로에오르기전
평생턱걸이로매달려있는나무엉덩이들을
한번씩힘껏떠밀어주리.
고개돌려내려다보는나무들,
머리를타고넘어가라?
타고넘긴!
머리들사이에머리하나더끼운다.
해안도로에젖은사람하나가고있다.
서귀에왔다간다.
-홀로움/외로움
시작이있을뿐끝이따로없는것을
꿈이라불렀던가?
작은강물
언제바다에닿았는지
저녁안개걷히고그냥빈뻘
물새들의형체보이지않고
소리만들리는,
끝이따로없는.
누군가조용히
풍경속으로들어온다.
하늘가에별이하나돋는다.
별이말하기시작했다.
-먼지칸타타
세월이가면모든게먼지탄다고생각했으나
책도가구도벽에기대논표구한사진도
먼지탄다고생각했으나
지난25년간뒹군연구실비우려보름동안
벽가득메운,겹으로메운,때로는세겹으로쌓은
책들을버리고털고묶으며
시시때때로화장실에가물틀어놓고
먼지진득한두손비비다보면
먼지는과거어느한편이아니라
전방위,그래미래로부터도오는것같다.
하긴몇년후에온다는혜성의꼬리에도먼지가있고
앞날먼지미리켜켜이보이는사람도있는데.
먼지와반복을나르며
3층화장실창밖으로훔쳐본여름하늘,
어느틈에검은구름하늘을덮고
이리쏠리고저리쏠리는빗줄기에
플라타너스잎들제정신이아니다.
일순,캄캄한하늘에칼집을내며번개가치고
화장실거울에띄운다먼지로빚은테라코타하나.
그가빙긋웃는다.
우르릉!
속이보이게빚다만인간하나여기있다.
-화성시남쪽가을바다
2003년장마뒤달포내린비에
눅눅해진마음들고나가말릴곳은
화성시남쪽바다가을햇볕속이리.
사당동서시간반거리
손등에닿으면그대로바스러지는빛알갱이들을
쉬지않고쏟아붓는하늘아래
물결도저혼자말없이일렁이는곳
갈매기도신경쓰지않고그냥떠있는곳.
미끼끼우다미늘에찔린손가락끝의쨍한아픔도
바늘뺄때입찢겨얼굴찡그린우럭도
서툴게서툴게살아남아있는곳.
바람에날린모자가황동색물결위에서한참망설이다
가라앉는곳.
-꽃의고요
일고지는바람따라청매(靑梅)꽃잎이
눈처럼내리다말다했다.
바람이바뀌면
돌들이드러나생각에잠겨있는
흙담으로쏠리기도했다.
‘꽃지는소리가왜이리고요하지?’
꽃잎을어깨로맞고있던불타의말에예수가답했다.
‘고요도소리의집합가운데하나가아니겠는가?
꽃이울며지기를바라시는가,
왁자지껄웃으며지길바라시는가?‘
‘노래하며질수도….’
‘그렇지않아도막노래하고있는참인데.’
말없이귀기울이던불타가중얼거렸다.
‘음,후렴이아닌데!’
-늦겨울비탈
두어식경동안마주오는차하나사람하나없이
2005년3월초,봄이오다만봉화군도로를천천히달린다
길양옆을스치는
여기저기마른풀과맨흙이드러나다다시눈발친비탈들,
오그라진지난해이파리몇줌간신히붙들고선참나무들
비늘갑옷풀다말고엉거주춤모여선소나무들
나무우듬지를감다손놓았던덩굴이
다시감으려고뻗은촉수가공중에멈춰있는늦겨울비탈이
우리에게지울수없는내면이있음을알려준다.
-정선화암에서
너무많은소리로고요하여
오늘밤쉽게잠들지는못할것이다.
풀벌레들이쉬지않고울고
밤새들이잠깐씩끊어계속노래하고
바람은물굽이에서가끔짐승소리를내고
달은가다걸음을멈출것이다.
누군가안에서속삭인다.
‘네삶의모든것,고요속의바스락처럼
바스러지고있다.
자,들리지?
허나후회는말라.
부서짐은앞서무언가만들었다는게아니겠는가?’
환한달빛속에서화암뻥대들이대신화답한다.
‘만든것은결국안만든것으로완성된다
꽃이지며자기생을완성하듯이.
때로우리도가슴언저리를내놓아
애써만든상(像)을부서뜨린다.
허나부서진곳떨어져나가면또새로운상,
수지않고쉴곳세상어느구석에도없고,
(나를향해가슴약간씩돌리며)
아그대안에내장되어있다.’
나는간신히말한다.‘달을그만가게하자.’
언제부터인가올빼미가혼자울고있고
여울을건너며달이
잔물결에깔았던은비늘을쓸어담는기척을낸다.
-다시몰운대에서
저기벼락맞고부러져죽은척하는소나무
저기동네앞에서머뭇대는길
가다말고서성이는바람
저풀어지기직전마지막으로몸매무시하는구름
늦가을햇빛걷어들이다밑에깔리기시작하는어스름
가끔씩출몰하는이름모를목청맑은새
모두노래채끝나지않았다는기척들.
나도몰래마음이뿌리내린곳,
뿌리몇차례녹다만곳.
내가나를본다
더흔들릴것도없이흔들리는마른풀,
끝이랄것없는끝
노래대하나뵈지않게출렁여놓고.
-시여터져라
시여터져라.
생살계속돋는이삶의맛을이제
제대로담고가기가너무벅차다.
반쯤따라가다왜여기왔지,잊어버린
뱃속까지환하게꽃핀쥐똥나무울타리,
서로더듬다한식경뒤따로따로허공을더듬는
두사람의긴긴여름저녁,
어두운가을바람속에눈물흔적처럼오래지워지지않는
적막한새소리,
별생각없이집을나설때기다렸다는듯날려와
귀싸대기때리는싸락눈을,
시여!
-봄비
조그만소리들이자란다.
누군가계기를한금올리자
머뭇머뭇대던는개속이환해진다.
나의무엇이따뜻한지
땅에속삭일때다.
-델피신탁(神託)
파르나소스산델피입구
길이왼편으로급히꺾이는곳,앞을막아선
엄청가파르고높은두바위가노래한다.
‘신탁은자유인에게내린다.너자신을알라.’
나는과연자유인인가?
아폴로신전폐허앞에서잠시생각에잠겼다
문득누가이마짚는기척이있어
정신차리니,신전에선가돌기둥뒤에선가
깊은목소리가들려온다.
‘조그만이름하나싣고무겁게떠돌리라.’
꿈꾸듯이내려다본다.
델피와저아래인간의항구사이
30년가뭄에거식증에걸린수많은올리브나무들이
햇빛아래고개숙이고있다.
얼룩나비하나눈앞에떠돌다월계수가지끝에서사라진다.
목소리가들려온다.
‘이름은나비와같다.’
어디선가다른나비하나나타나눈앞에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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