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도 잡아먹는 인터넷 – 박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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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生이 득시글거린다
내 피톨의 아득한 조상들.
살을 버리고,
누구나 풀씨 같은 알갱이들로 점점이 흩어지지만
어느 하루
지상의 한 켠에 쓸쓸히 당도하여
바람에 설레며
다시 자잘한 새떼로 날아오르는
저 작고 가벼운 알,
모든 끝은 다시 알이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로 시작하는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는 TV와 영화의 청춘물에서 인용될 만큼 한국 연애시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시력(詩歷) 50년이 넘은 황동규는 "내 정신의 외양은 책과 여행에서 형성된 모습을 갖고 있겠지만 아마 속 무늬는 음악이 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에선 음악을 예찬했다는 황동규의 시 ‘작은 평화’가 떠돌아다닌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의 말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로 시작한 시는 몇 행 이어지다가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상처받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며 끝난다.

한국시에서 지적(知的) 세련미를 대표하는 황동규의 시라고 보기엔 너무 감상적이고 직설적이란 느낌이 든다. 최근 "선생님이 쓰신 시 맞나요?"라고 전화로 물었더니 시인은 "제가 쓴 시 800여 편을 전부 다 외우고 있진 않지만 아무래도 그 시는 내 작품이 아닌 것 같네요"라고 했다. "음악에는 성악도 있는데 ‘인간의 말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쓸 수 있겠나요"라고 반문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시와 착각해 잘못 올렸을 듯하지만 이 시는 라디오 방송에서 황동규의 시로 낭송되기도 했다. 인터넷에선 유명 시인들의 시가 오자와 탈자투성이거나 몇 행이 통째로 빠지고 제목이 바뀐 채 돌아다닌 지 오래다. 정호승 시인의 대표시 ‘그리운 부석사’는 다른 제목으로 돌아다닌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라는 시에서 첫 행을 누군가 제목으로 잘못 올려놓자 많은 블로그에서 제목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로 통하게 됐다. 도종환·안도현 같은 유명 시인들도 비슷한 경우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시를 엉터리로 올리는 것도 문제지만, 시인이 공들여 쓴 시를 허락 없이 인터넷에 통째로 옮기는 것부터 엄밀히 말해 저작권법 위반이다. 시인들도 처음엔 "내 시를 읽어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이젠 인터넷 때문에 시집 판매량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사태에 당황하고 있다.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는 시인의 경우 2만부 넘게 팔리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공짜로 시를 읽고 퍼나르기가 유행한 탓에 주목받는 시인도 5000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다른 문화산업에 비추어볼 때 하찮은 숫자지만 가난한 ‘시인 부락(部落)’에선 몇 년 지어야 할 농사에 해당한다.

1970년대 민음사가 세로 쓰기였던 시집 판형을 가로 쓰기로 바꾼 ‘오늘의 시인 총서’를 내면서 한국 창작 시를 찾는 독자가 크게 늘어났다. 1980년대는 시가 한 시대의 정치적 감성을 이끌었기에 ‘시의 시대’로 불렸다. 100만부 넘게 시집이 팔린 경우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다. 20대 초반에 시를 즐겨 읽은 사람은 인문 교양서 독자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인터넷이 시를 잡아먹으면서 가뜩이나 실용서에 밀려 크게 줄어든 대형 서점 시집 코너가 오그라든다. 인터넷 횡포가 장기적으로 인문학까지 잡아먹을 수 있다. 시인이 궁핍한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시단에선 ‘가장 무거운 지갑은 빈 지갑’이라고 한다. 빈 지갑이 상징하는 빈곤의 무게에 짓눌려 시인들의 영혼이 날지 못하는 사회는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가 된다.

출처;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02/20101102019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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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스크린 도어의 시들도 온전한 게 별로 없답니다

더 망가지기 전멀쩡할 때가능한 한 담아두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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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1. 소리울

    05/11/2010 at 13:13

    한모금의 샘물에 새 아침이 느리게 흔들린다.
    그래, 한택수님의 시처럼…

    호수 같은 바다에 풍덩 빠졌던 붉은 해가 떠 오를 때
    아주 느린 흔들림도 보이더군. 아라클럽에서.   

  2. 산성

    07/11/2010 at 23:14

    박해현 기자의 이 글
    굉장히 찌릿…했었지요.

    詩도 저작권법으로 다스린다면
    일등으로 잡혀갈 사람 중 하나….저^^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법이어서…
    하면서 무거운 마음,피해 갑니다^^

    새 글들,천천히 돌아 볼께요…

       

  3. 참나무.

    08/11/2010 at 00:16

    그러게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 모두 위법자…^^

    … 양면성…늘 갈등하는 부분이지요

    어딜 다녀오셨을까
    저도 주말동안 집을 비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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