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배경음악


달밤

황동규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은 달빛 달빛.

시집; 三南에 내리는 눈,민음사 1975

몰운대행(沒雲臺行)

황동규

1

사람 피해 사람 속에서 혼자 서울에 남아
호프에 나가 젊은이들 속에 박혀 생맥주나 축내고
더위에 녹아내리는 추억들 위로
간신히 차양을 치다 말고
문득 생각한 것이 바로 무반주(無伴奏) 떠돌이.
폐광지대까지 설마 관광객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길들의 고요.
지도를 펴놓고 붉은 볼펜으로 동그라미 하나를 치고
방학에도 계속 나가던 연구실 문에 자물쇠 채우고
다음날 새벽 해뜨기 전 길을 나선다.

2

영월 청령포를 조심히 피해 31번 국도를 탄다.
상동 칠랑에서 국도를 버리고
비포장 지방도로로 올라선다.
중석 걸러낸 크롬 옐로우 물이
길 옆 시내 가득 흘러오고
저단 기어를 넣은 `프레스토’가
프레스토로 떤다.
차 고장 없기만을 길의 신(神)에 빌며
망초꽃이 모여선 길섶을 지나
아다지오로
덤프트럭 자국 깊이 파인 언덕을 오른다.
길의 신이 급커브를 약간 풀어놓으며
아슬아슬한 낭떠러지를 보여준다.
크롬 옐로우가 꿈결처럼 몸을 바꿔
흑인 영가로 흐르기 시작한다.
흑인 영가의 어두운 음을 끼고
에어콘 끄고도 헐떡이는 차를 천천히 몰아
온갖 생물학이 모여 썩고 있는 쓰레기 낟가리를 돈다.
아! 폐광 하나가 검은 입을 벌리고 비탈에 박혀 있다.
입술 위로 너와지붕이 튀어나오고
그 위엔 다듬지 않은 풀들이
수염처럼 자라고 있다.
빠지고 남은 이빨처럼 녹슨 쇠기둥 두 개가 박혀 있고
녹슨 밀차 한 대가 굴 밖으로 나오려다 말고
뒤틀린 선로 위에 심드렁하게 서 있다.
들이밀면 머리부터 씹힐 것 같아
목을 움츠리고 슬쩍 몸을 들이민다.
귀가 먹먹
아 사람 사라진 사람 냄새!
천정에서 물 한 방울이
정확히 머리 위에 떨어진다.

3

고개가 가파르다.
자장 율사(慈藏律師)가 진신사리 봉안했다는 정암사 가는 길
그도 헐떡이며 넘었으리라.
앵앵대는 소형차를 길가에 그냥 내버리고 싶다.
가만, 자장이며 의상(義湘) 같은 쟁쟁한 거물들이
경주, 황룡사, 부석사를 버리고
왜 강원도 산 속을 방황했을까?

왜 자장은 강원도 산골에서 세상을 떴을까?
입적지(入寂地) 미상의 의상도
강원도 산골의 행려병자가 아니었을까,
이곳 어디쯤에서?
가파른 언덕을 왈칵 오르자
해발 1280m의 만항재.
태백시 영월군 정선군이 서로 머리 맞댄 곳.
자글자글대는 엔진을 끄고 차를 내려 내려다보면
소나무와 전나무의 물결
가문비나무의 물결
사이사이로 비포장도로의 순살결.
저 날것,
도는 군침!
황룡사 9층탑과 63빌딩이
골짜기 저 밑에 처박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없이도 마음이 온통 시원하다.
잠시 목숨을 잊고 험한 길 한번 마음놓고 차를 채찍질해
황룡사, 63빌딩, 정암사를 순식간에 지나서
정선 쪽으로 차를 몬다.

4

화암약수터 호텔 여주인은 웃으며 말했다.
“제철인 데다 버섯 재배농가 회의로
정선군 모든 방이 다 찼지요.
몰운대 저녁노을이나 보시고
밤도와 영월이나 평창으로 나가시죠.”
표고버섯죽 한 그릇 비우고
길을 나선다.
신선하고 기이한 뼝대
저녁빛을 받아 얼굴들이 환했다.
그 위에 환한 구름이 펼쳐진 길
그 끝을 향해.

5

몰운대는 꽃가루 하나가강물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엿보이는 그런 고요한 절벽이었습니다. 그 끝에서 저녁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앉아 있었습니다.
새가 하나 날다가 고개 돌려 수상타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모기들이 이따금씩 쿡쿡 침을 놓았습니다.
(날것이니 침을 놓지!)
온몸이 젖어 앉아 있었습니다.
도무지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시집;몰운대행. 문학과 지성 1991

Vladimir Sofronitsky plays Schubert Impromptu Op. 142, No.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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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에서 첫 눈 소식을만날 때

필연처럼 슈베르트 즉흥곡이 흐릅니다

영화 ‘포 미니츠’, 혼자살던 크뤼거 선생 생각하다

황동규 시집을 꺼내봅니다

ㅇㅇ 에게

93년 9월 14. 화.

3:15 p.m

학교에서 ㄴㅅ이

– 또 한 번 새로운 가을을 기다리며…

A4용지에서 오려낸 류시화 ‘민들레’를 붙이고

초록색 만년필 글씨가 그 다음 장에있는 황동규 몰운대行 시집입니다

7년 반을 파킨슨씨 병을 앓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옛친구는

‘엄마랑 같이 죽어버릴 생각도 했’ 다는 전화가 어제 늦은 밤에 왔답니다

"…내가 말을 다 못한다…내가 말을 다 못한다…"

이말로 시작하여이 말로 끝이나는 통화를 저랑은 가끔하면서

가족관계도 다 깨어졌다 합니다

아무 것도 해줄 게 없어 저는 그냥 이런 전화나 자주하자 합니다

황동규 ‘풍장’ 연작 시들 몇 편 뒤적거리다 시집을 닫습니다

시집 뒷장 첫머리엔

행복이 없을 때 정말 행복해질 수 있다

피하던 감기가 걸렸을 때 비로소 감기에서 해방된다

중략… ….

이즘에 와서 피부에 닿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아니고 삶의 존엄이다.

근에 피부가 민감해졌다.

불행의 뒷문은 행복이다. 단 뒷문이 있다면

이라 하셨네요

다시 슈베르트 다른 버젼의 즉흥곡들 찾아보며

아침 시간을 거의 다 보내고 있습니다

…………..

2010 11.9일 화. 참나무.

4 Comments

  1. summer moon

    09/11/2010 at 03:43

    친구가 미처 다 하지 못하는 말
    다 알고 들어주는 친구…

    참나무님을 생각하며 전화를 찾는 친구의 가슴에 번질
    따뜻한 정이 제게도 느껴지는거 같아요

    우정이나 사랑은 참 다른 모습으로
    우리들 삶 곳곳에서 함께 한다는거 자주 깨닫게 되요.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정까지도…   

  2. 참나무.

    09/11/2010 at 03:57

    …제 친구는 가끔 동생들께 화풀이를 하나봐요…;;
    자기 하는 일 단 하루라도 해 보고 비난하라 그러면서…

    솔직히는 남동생 부부나 친 여동생이 절대 하지못할 걸 잘 아니까요
    모두 직장과 아이들이 있으니 혼자사는 친구처럼 어머니께 올인할 수도 없구요…;;

    서머문도…요즘 혹시 선택이 필요한 시기 아닌지요 – 아주 조심스럽게 살째기…;;

    부디 현명한 선택으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라…

    친절한 답글 고마워요…^^

       

  3. 겨울비

    09/11/2010 at 16:01

    오래 전에 읽었던 시들을 올려주셔서
    황홀한 회귀라고…
    저녁 내내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찾으며 보냈어요.
    결국 못 찾고 말았지만 다른 시인들의 시집이며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을 챙겼습니다.

    아픔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는 날들.
    몸이 불편하신 부모님을 모시는 일에 대해
    열려있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요.
    외할머니를, 친정아버지를 기꺼이 솔선해 모시는
    아가씨를 보며.
    친구분 일도 남의 일 같지 않아요.

       

  4. 참나무.

    09/11/2010 at 22:25

    황동규 선생님 틀림없이 음악에 빠져 지내실꺼야
    저 혼자 확인하게된 게 몰운대 행이었어요

    달밤을 지으실 땐 혹 드뷔시 듣고 계셨을꺼야..이러면서…

    크뤼거 선생도 제 친구랑 동격으로 생각이났구요
    실존인물이라 그러지요…

    전 겨울비 님과 반대편에서 이번 일을 생각했답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많이 힘들어서 어쩌지요 가족들이…;;
    오늘도 즉흥곡 다른 버젼을 찾아듣고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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