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 자화상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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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 유안진

이른 봄날씨처럼
변덕스런 우리 사랑 끝엔
전신에 꽃부스럼 돋아나는 발진으로
모진 신고를 견디어야 했습니다만

만약
그대와 내게 용기가 있어
여름날 장마처럼 오래오래 울더라도
여름 대낮 태양 같은 사랑을 했더라면
죽은 나뭇가지에도 잎은 우거지고
새들이 그 품에 깃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대와 내가
이성과 정열을 잘 다스려
가을 햇볕같이 성숙된 연정을 이어왔더라면
지금쯤
가을 이삭 같은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임이며
어쩌다가 우리는
서로가 너무 강하고 몸만 도사리고
자제와 분별로 싸늘히 식히고 식힌 나머지
소한 대한 추위를 불러오고 말아
얼음장 두꺼운 가슴 바닥에
실낱같이 흐르는 그리움 한 줄기로
삼동三冬을 어리석게 살고 있을까요
.

– 빈 가슴 채울 한마디,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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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유 안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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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오십년 살고 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비와 이슬이 눈과 서리가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수리부헝이 울어대는 이 겨울도 한 밤중, 뒷뜰 얼음 밭을 치달리

눈바람에, 마음 헹구는 바람의 연인, 가슴속 용광로에 불지피

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 없는 불쌍한 희망을,

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삭아질수록 새우젓갈 맛나듯이, 때얼룩에 쩔을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 묻히고 더럽혀지며, 허상에 넋을

잃어 진실을 놓치며, 죄업에 혼이 빠져 정직을 못 가리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 멀리 떠나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다, 허공이 오히려 더 살만한 곳이며, 흐르고 떠도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
문득 뒤 돌아다 보니
나는 나는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었어라.

– 유심 2004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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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山길 유안진

찬비 뿌리는 가을날에는
옷자락이 다 젖도록
남산길을 걸으리라

홀린 듯이 이끌리는 밤길 문득 멈추고
돌층계에 엎드려 우는
낙엽 한장 주우리라

주소도
사연도 없는
그저 기러기 피빛 울음인

사모치거라
사모치거라 이 못난 짓
지워지지 않거든 더욱 사모치거라

인연 비록 엇갈린 길목이었다 해도
걷고 걷다가
가랑잎으로 누우리라.

– 빈 가슴 채울 한마디, 1991

* Dmitri Shostakovich Romance

Song Young Hoon(Cello), Hong Soh Yu(Piano)

A Live Recording of 206th The House Concer

19 Comments

  1. 산성

    25/02/2011 at 23:20

    詩를 읽다 보면 궁금해지는 것.
    어느 세월 쯤…에서야 이 시가 왔을까.
    시인에게.

    빈 가슴 채울
    그리움 한 줄기…면

    괜찮지 않습니까

    새 한마리, 늦게사 발견했습니다^^

       

  2. 겨울비

    25/02/2011 at 23:32

    제 안에 들어왔다 나가신 것만 같이 뽑아내신 시들…
    제 자화상은 쓸 것도 없겠습니다.
    저는 오늘 내일 식물들과 보내야 하니
    좋은 시들 또 오면 까페에도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진명시인의 아침시도 좋던데요.
       

  3. 참나무.

    26/02/2011 at 02:03

    새 한마리..설명않아도 찾으셨군요 – 손 덥썩…^^

    이만하면 깨끗한 녹음이라 아끼는 음원이랍니다
    연주끝나고 우레와 같은 소리 속에 제 박수도 섞여있어서 아마…^^
       

  4. 참나무.

    26/02/2011 at 02:03

    제 자화상은 사진으로 다 공개되었네요

    잠깐 제 앞에 왔다 포르르 날아가버린 까치 한 마리와
    다시는 꽃 피울 수 없는 아마릴리스…저 긴 잎파리들…

    조인스 닷컴 부러 찾는 수고 줄여주셔서 더 고마워요
    오늘 아침 이상국시인의 변명.
    ‘…내성으로 뭉친 염결한 주체…’ 에 밑줄그었습니다
    이진명 시인 아니면 廉潔, 이런 단어를 어디서 만날지…
       

  5. 도토리

    26/02/2011 at 02:36

    새 한마리가 흐린 하늘에 희망처럼 앉아있군요.
    후후.. 저도 찾았습니다…^^*   

  6. 揖按

    26/02/2011 at 03:27

    시와 음악으로
    삶이 아름다와지고 마음이 편안해 지는,
    그래서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우러나는
    참 행복한 사람들 …

    항상 할 일이 많아 긴장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7. 산성

    26/02/2011 at 05:46

    흠, 저~기 홀로 앉은 새

    아무래도
    그동안 날아온 길
    그 길 위에 앉아 있는 듯… 합니다.

    수상한 숫자^^

       

  8. 참나무.

    26/02/2011 at 06:31

    날아갈까봐 문도 못열고 찍어 더 흐릿하네요

    ‘…희망처럼이라…용기를 얻어봅니다…도토리 님

    2년의 공백 , 당분간은 바쁘겠지만
    한가한 시간이면 이곳 정든 가족들 더 그립겠다… 싶네요

    *
    남의 떡은 더 크게 보여서는 아닐까요 읍안 님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 먹은만큼 행복하다"…링컨의 어록이 갑자기…^^

    *
    글쎄요 한참을 앉아있길래 텔레파시 왕창 보내긴 했는데
    다시 왔으면 좋겠지만…%%

    그래요…이젠 2000 그만 집착해야겠어요
    잡기들 숫자 올라가는 게 괜히 부끄럽더라구요
    글 지우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어서

    종소리 이젠 맘놓고 울려주소서…^^
       

  9. 산성

    26/02/2011 at 07:04

    종이 울리는 것은
    제 몸을 때려가면서까지 울리는 것은
    가 닿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둥근 소리의 몸을 굴려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려는 것은
    이목구비를 모두 잃고도
    나팔꽃 같은 귀를 열어 맞아주는
    그 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소리의 생이 다하려 하면
    뒤를 따라온 소리가 밀어주며
    조용히 가 닿는 그곳
    커다란 소리의 몸이 구르고 굴러
    맑은 이슬 한 방울로 맺히는 그곳.

    ‘종’ 정일근

    머나먼 길….2000회.

    감사의 마음으로…!!

       

  10. 참나무.

    26/02/2011 at 07:38

    잡문을 2000 여개나 올렸으면서도 제대로 종 한 번 못울렸는데
    저야말로 감사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이 귀한 시를…다시…^^*
    빚이 늘었네 하려다 ‘은혜’로 바꾸면서
    아들이 토요일이라 이제사 나가네요…
       

  11. 네잎클로버

    26/02/2011 at 15:03

    참나무님께서 올리실 때마다 새삼 가슴을 적시며
    너무 좋은 곡이예요.

    올려주신 유안진 시인의 시들도 좋구요.
    특히 서신…

    포스팅 수 2000..! 대단하세요.
    덕분에 저희들은 좋은 소식과 정보 듣습니다.
    저도 감사드리며..

    역시 산성님께서 먼저 발견하셔서 축하해주시고..,
    두 분의 정 나눔.. 아름다워요~ ^^   

  12. 참나무.

    26/02/2011 at 21:38

    고백하자면 2000회 서너 번은 지났답니다…;;

    로스트로포비치 로망스도 몇 번 올렸지만
    이번 음원은 실황이라…

    청담시낭송회 덕분에 또 유안진 시인의 시들을
    다시 들추어 보는 시간이 있어 좋답니다

    근데 네잎 님 글 올린 시간이…?
    밤을 하얗게 새운 건 아니신지…@.@
       

  13. 참나무.

    26/02/2011 at 21:52

    혹시 자화상이 실린 시집 소장하신 분 계신가요
    틀린 부분이 있어서 궁금해지네요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 묻히고 더럽혀지며, 허상에 넋을 잃어 진실을 놓치며, 죄업에 혼이 빠져 정직을 못 가리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진실보다 허상에 더 감동하며
    정직보다 죄업에 더 집착하여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

    아니면 시인께 직접 확인해 볼 일입니다….?

    — 줄친부분인지
    ( ) 부분인지…

    시인들이 가끔은 고치기도 하여 시집마다 다른 부분이 있더라구요
       

  14. 마이란

    27/02/2011 at 01:10

    저는 이 분의 ‘시’보다 ‘산문’을 먼저 접했나봐요.

    갓 스물쯤 되었을 때
    마치 영화의 ‘트로이 카’ 처럼
    유안진, 신달자, 이향아… 의 산문집이
    친구들 사이에 자주 건너다녔거든요.

    그때 친구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었던 글이
    유안진 선생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였어요.
    그 친구들 중 세 명은
    아직까지도 정말 ‘지란지교’같은 친구들로 남아있고요.

    청담의 시 낭송회,
    가보진 못하지만 마음으로 함께합니다.
    어쩐지 청담의 시 모임이 끝나면
    제대로 봄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

       

  15. 참나무.

    27/02/2011 at 03:14

    맞아요 대부분 사람들은 유안진, 지란지교 동시에 떠올릴걸요
    트로이카 친구들 지금까지 …아주 잘한일이네…해요

    언젠가 한 번은 아다리되리라 믿습니다
    사카에 짜안 나타나는 일

    교회다녀왔어요 좀 전에…
    울동네 교회이야기 언젠간 한 번 풀어놓겠습니다

    삼일절 예배 미리 보는 교회가 몇 군데나될지 전 잘 모릅니다만
    꽃꽂이 앞에 거룩한 태극기도 버티고 있고
    독립선언문을 부목사님이 낭독했답니다 – 그것도 전문을
    그리고 모두 일어서서 애국가 4절까지- 이민시험도 아닌데말이지요…^^
    그러느라 막판에 부르는 주기도문은 빼시더라구요

    재밌는 이야기 한가지는 요담에…ㅎㅎ
       

  16. 마이란

    27/02/2011 at 06:07

    그 詩, 찾아 읽었어요. 참나무님. ^^
    제목으로 검색했는데 유안진.. 이라고 나와서
    이 시, 맞구나. 했지요.

    근데 시인께선 정말 춘천엔 안 가보셨나봐요.
    봄에 춘천에 가셨더라면
    시 속의 ‘진달래’가 아마도 ‘개나리’였을꺼라 생각하며
    혼자 웃었어요. 고맙습니다. ^^

    근데 그 교회 참 특이하네요.
    독립선언문 전문을 낭독하시다니!!
    괜히 뿌듯해질라 그럽니다.^^

    아. 그러고보니 저도 영월 금마리 생각나네요.
    올해도 삼일절 기념행사 열리겠구나..
    그 조각상 만든 사람은 삼일절이 언젠지도 모르고 지나갈텐데.. 하며.. ^^

       

  17. summer moon

    27/02/2011 at 06:24

    아, 어쩌면 !!!!
    유안진님의 詩들도 그렇고
    참나무님 사진들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

    그냥 온 몸에서 ‘싸우려던’ 못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거 같아요
    그래서 그냥 한곳에 머물러 있고 싶은….

       

  18. 참나무.

    27/02/2011 at 13:26

    인터넷에 떠다니는 시들 엉터리가 많아 옮기다 실수할까봐서…^^
    특히 行은 지맘대로라서 조심스러워서서

    작금의 한국교회들 병폐…문제 많다고
    그 당시 삼일 운동 정신을 기리자~~ 그런 취지겠지요
    삼일운동 정신이 인도 중국 터키로 번져나갔다고 …메모않아 다 잊어 죄송…^^

    ( 영월 금마리..기억해뒀다가
    하이에나씨 작품 찾아 인증삿이라도 올리고싶어라…^^)
       

  19. 참나무.

    27/02/2011 at 14:00

    1+1 = 과로사
    2+2=덧니
    덧니+덧니=드라큘라
    처럼 처럼 처럼
    정답은 정답이 아니니까
    ?표를 앞세우고 무모했던 한때도
    왜 없었겠나만
    초보적인 것에 조차도
    물음표가 없어졌다
    사는 데는 초보면 충분하니까
    물을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정답은 없으니까
    정답이 아니어야 정답이니까

    – 유안진. 넌센스
    *
    이런 재밌는 넌센스같은 시도 있답니다
    (혹시 찾아보니 오타낸걸 그대로 드르륵한 게 여러 개 찾아지네요
    시집 옆에 두고 오타 확인했어요 행도 바꾸고…;;)

    사진은 빼주셔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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