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기 – 정진규

 

Hunting - Sungsic Moon

Hunting  2007/  pencil on paper /  24.5 x 35.5 cm

 

연필로 쓰기 – 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반편도 거두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을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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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형과 함께 토끼를 잡으려 뒷산 깊숙이까지 올랐다가 어둠에 쫓겨 황망히 하산했던 기억을 그린 문성식의 ‘숲과 아이’. 아름드리 나무 숲 사이로 잦아든 어둠과 어린 소년을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연필 드로잉으로 세밀하게 표현했다.[사진제공=국제갤러리]

< 글ㆍ그림= 문성식(화가)>- 헤럴드 경제/ 참고; google

 

어릴 적 형과 동네 야산을 누비며 놀다가 언제 어두워졌는지도 모르게 어둠이 급속도로 우리를 삼키는 것 같은 때가 있었다. 형과 나는 겨울에 토끼나 너구리 따위를 잡으려고 산에 갔고, 때로는 영지버섯이나 칡을 캐기도 했다.

한낮의 숲은 셀 수 없이 많은 낙엽의 색과 물질감이 너무나 깊고 풍부하고 아름다웠다. 빛과 나뭇가지가 만드는 수많은 그림자, 아름다운 나무의 모습, 청명한 바람과 차갑고 맑은 공기가 그때 내겐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때 내 머릿속엔 온통 짐승뿐이었다. 숲에서 동물을 발견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도배했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동물의 흔적을 쫓거나 우리에게 뭔가 재미있는 것을 찾아 숲의 구석구석을 헤맸다. 우리는 힘들지 않았고 매우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놀다 보면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도 모르게 주변이 어둑어둑해졌고, 숲 속에서의 어둠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우리를 삼킬 듯 덤벼들었다. 그것들이 우리 주변으로 스며들 땐 낮의 숲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은 오간 데 없고, 우리 마음에는 짐승에 대한 열정도 서서히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그 두려움은 느리지만 거대하고 어린아이인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인 어떤 것이었다. 주변은 어느새 아주 미미한 빛만이 남아 겨우 나뭇가지의 형태만이 감지되는 상태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의 검푸른 공간과 같은 질감의 비현실적 공간이 내 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어둠 안에서 격정과 두려움을 느꼈다. 심장이 빨리 뛰었고 오직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둠이 우리를 삼키려 할 때 우리는 부리나케 산을 내려와야 했다. 형과 나의 마음은 갑자기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격정적이 됐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깊은 어둠의 산을 서둘러 빠져나와 포도밭을 지나 흙길을 지나 이윽고 다다른 흰 시멘트길에 발을 내디뎠다. 아,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빈 손으로 내려온 우리는 동네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향했다. 좀전의 우리를 엄습했던 두려움은 서서히 사라졌다. 형과 나는 집에 도착해 조금 전 일은 다 잊고 평소처럼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저녁을 식구들과 먹고, 9시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안방에서 할머니 젖을 만지며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참조- 인터뷰 세상은 말이 없고 현실은 비극적

베니스비엔날레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했던 문성식 씨가 국제갤러리의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 ‘숲의 내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22349881

 

7 Comments

  1. 김진아

    07/04/2011 at 00:26

    아…오늘 아침에도 연필 때문에 한바탕 난리굿을 치뤘는데 ㅎㅎ

    작은 아이, 아침이면 더욱 예민해져서, 솔직히 머리가 아파요오.^^

    연필을 꼭 홀수로 가져가야 하고,
    것두 색깔별로에 지우개는 또 세개이상이어야 하고…

    긁적거린 종이까지 버리기가 아까워 모아 놓으니,
    것두 처리 곤란이고…

    연필..로 그린 나무,숲..터널,

    참, 이 그림들 생각을 많이도 조각내어 떠올리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   

  2. 참나무.

    08/04/2011 at 11:04

    제가요…어제도 이 전시회 다시 다녀왔답니다
    아마 처음일겁니다 개인전을 두 번 간 일은…

    숲과 아이는 2층 계단 입구에 있는 작은 연필화지만
    보고 있으면 가슴이 찌잉~~해지는 그림이지요

    ‘소쩍새…’ 까만 밤하늘에 방사형으로 별을 그린 작품, 어제가 전시 끝날이라
    다시 못 볼 것 같아 도저히 아쉬워 안되겠더라구요
    참 하릴없는 사람처럼보이지요…ㅎㅎ

    저도 홀수 좋아해요 락커룸도 가급적이면 홀수를 이용하거든요…^^
    잘 모아두세요 어렵지않은 일인데…
    전 산호맘 그림일기 지금도 가끔 생각난답니다
    엄마그림일기라도 산호일당들께 보여주면 얼마나 재밌어할까 싶어서…^^
    그러고보니 문성식씨 그림스타일과 닮은 부분도 있었네요    

  3. 산성

    10/04/2011 at 21:21

    지난 금요일 들렀었지요.이렇게 젊은 분이라니…
    그림으로만 짐작하기에는 50은 가볍게 넘었을 듯한…^^
    마감시간이어서 쫓기듯 본 것이 안타깝습니다.

    마스터스,타이거 우즈가 이글 샷을 놓치고
    최경주는 보기를 하는 바람에 공동선두 자리 내어 주고…
    근처 소음을 전합니다^^

    참나무님
    오늘 하루,밝은 하루!!

       

  4. 참나무.

    10/04/2011 at 21:39

    풍경을 인물화처럼 만 번 이상 덧칠을 했다지요
    제작 기간이 길어 그의 전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합니다
    그러게 아직 도록도 완성이 안되고,
    전시회 이후 국제화랑 사이트에서 판매한다니…

    아직 젊은 나인데 그토록 자연에 심취하다니…대단한 젊은이지요
    동시접속입니다아~~^^
       

  5. 참나무.

    10/04/2011 at 21:45

    아이구~~ 산성님은 또 골프까지…!

    (우리집 청년이 요즘 바쁜 와중에도 주말만 되면 골프에 빠져 난리던데…^^)

    밝게 시작…멋진 인사 고맙습니다아~~

       

  6. 도토리

    11/04/2011 at 09:17

    그림이 맘에 꼭 듭니다. 저두요…
    글도 좋고
    그림 속 아이의 애잔한 뒷모습도 뭉클합니다.
    문성식… 기억하고 싶습니다…^^*   

  7. 참나무.

    11/04/2011 at 23:01

    네에 직접 보면 더 좋아요…
    개인적으로 극세밀화에서 찾기 힘든 서정성까지 돋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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