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넘어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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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무장무장 흘러버렸고
당신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망설이다 묻어둔 그 말
물고기의 말이 되었고
강아지의 말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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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 틈에 홍방울새
칡덩굴 속에 꽃자주 꽃
그것들 그 말들
비집고 비집고 돋아난 것인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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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모든 나라에 속하고 싶고
다시 태어나고만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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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수년 만에 나타나 불쑥
입 밖에 낸다면
당신 그 소리 느닷없어 알아들을까

홍방울새 울음소리
빨갛게 맺는
열매로만 알아듣는 것처럼

언젠가 들은 소리라고
이마를 찌푸리고
누구였더라 무엇이었더라

엉기고 엉겨버린 것들
알아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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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로 기어올라가서
모래폭풍 속으로 달려나가서
바위구멍 속에 퍼부어두었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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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이 되어 수런거리는데
순간에 빈 바람을 부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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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데려가 달래나
어디로 어떻게 불러보나

제목도 거창하게 고(孤)를 달고

잡글 하나 올릴까 하다 그냥 넘어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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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무장무장 흘러버렸고
당신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망설이다 묻어둔 그 말
물고기의 말이 되었고
강아지의 말이 되었고

잎사귀 틈에 홍방울새
칡덩굴 속에 꽃자주 꽃
그것들 그 말들
비집고 비집고 돋아난 것인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그 말 모든 나라에 속하고 싶고
다시 태어나고만 싶어

그래 수년 만에 나타나 불쑥
입 밖에 낸다면
당신 그 소리 느닷없어 알아들을까

홍방울새 울음소리
빨갛게 맺는
열매로만 알아듣는 것처럼

언젠가 들은 소리라고
이마를 찌푸리고
누구였더라 무엇이었더라

엉기고 엉겨버린 것들
알아볼 수 있을까

산꼭대기로 기어올라가서
모래폭풍 속으로 달려나가서
바위구멍 속에 퍼부어두었던 말들

대숲이 되어 수런거리는데
순간에 빈 바람을 부르는데

어디로 데려가 달래나
어디로 어떻게 불러보나


– 최정례, 당나귀 귀의 숲 – 2002 현대문학상수상시집 에서

4 Comments

  1. cecilia

    26/08/2011 at 09:28

    그렇죠. 어떤 순간에 떠올랐었지만 진실로 굳어지지 못하고 만 말들…

    글쎄 구태여 뱉어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2. 참나무.

    26/08/2011 at 09:46

    그러게요 사진이 다 말해주는 듯 해서
    이럴 때 마치맞은 시가 생각나더라구요.

    예전에 올려주긴 남아공 이야기도 저는 참 좋았는데…
    쿨하신 세실리아 님…^^*   

  3. 겨울비

    27/08/2011 at 22:15

    시 올리러 들어와
    자꾸 보는 풍경들과 시가
    孤합니다.
    처서도 지났구나…

    뒤늦게 축하드려요.
    한상우선생님은 올리신 글 읽고 여기서 처음 알았지요.
    그 인연 지우지 못하겠습니다.

       

  4. 참나무.

    28/08/2011 at 14:50

    그러게나 말입니다
    카드 한 장은 자축의 의미로 괜히…;;

    외출했는 데 아들 부부가 깜짝쇼 한다고
    풍선들고 고깔모자 쓰고 ‘짜안’ 나타나더라네요
    마침 울집 남자라도 있었기 망정이지…ㅎㅎ

    흥 깨어지게 해서 미안하다 그러니
    다시 고깔모자쓰고 제대로 축하받고 …
    탈탈 네식구 외식하고… 그리곤 지들 집으로 가버리고

    ‘ 한 세대는 가고.. ….’
    나도 그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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