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놀이 없이

봄날 ―도배일기 18

양지쪽엔 쑥이 제법 새순을 틔웠다
봄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른 봄날
모양낼 것 없고 생긴 대로 깨끗하게만 해 놓으면 되는 월세방 일은 쉽게 끝났다
연장을 챙겨 나오다 보니 주인이 대문에 종이를 붙인다
언뜻 보면 반야심경 한 구절 같은
‘삭을새놈 보증오십 월십오만 지름보이라’

보증금 다 까먹고도 안 나가는 통에
내보내는데 애먹었다며 투덜거려도
유리테이프로 꼭꼭 눌러 붙이는 솜씨 능숙하다

누군가 인생의 한겨울 삭히고 떠나며 남긴 게송치곤 남루하다.

– 강병길 ( 1967~ )


Nathan Milstein Beethoven Sonata for violin and piano 5 ‘Spring’ & 9 ‘Kreutzer’

그렇게 한겨울 난 사람 있었구나. 그 방바닥 따뜻했을까? 그가 바라보던 벽, 얼룩이 심했겠지. 그 얼룩의 내용들을 짐작해 본다. 애잔하고, 갑갑하고, 분노 또한 먼지처럼 일어나다 가라앉는다. 운명이나 탓했으려나? 도배로 그 얼룩들, 삶을 가린다. 그 집의 주인은 또 어떤가. 어쩌면 주인집 방의 얼룩이 더 복잡할지 모른다. 모르지 않는 처지에 나가라는 말 꺼내는 심정 어땠을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삶들이다. 남은 자가 대신 읊은 반야심경 닮은 게송, ‘삭을새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양지쪽 쑥의 새순처럼 모두 피어나시라 기원해 볼 뿐. 이 시인은 문막 어딘가에서 도배를 즐기며 시를 짓는다고 한다. 관념놀이 없이 생활로 싱싱한 시다.

출처 :[가슴으로 읽는 시]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

2 Comments

  1. 김진아

    09/04/2012 at 06:26

    아침 머그 잔 가득 커피 마시면서 오늘의 ‘시’를 읽었네요.

    ‘삭을새놈..’저 역시 읊으면서요.    

  2. 참나무.

    09/04/2012 at 06:44

    첨엔 제목을 ‘삭을새놈’ 했다가 좀 거시기해서말이지요
    *
    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
    문을 열면 능금밭 가득 능금꽃이 아찔하게 피어 있는
    그 풍경 아득하게 바라보며 비명을 치는 노파
    어깨 한쪽 맥없이 문설주로 무너진다
    능금꽃 시부적시부적 다 지고 나면
    서리치는 가을까지 몸서리칠 땅강아지 노릇이여
    그 모습 힐끗 일별하던 네살박이 손자 놈이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중얼거리며 나자빠진다

    꽃은 지고 인자 우에 사꼬 – 이 중 기
    *
    마음바다에서 건져올린 시- 고맙습니다아

    잘 모르는 시인이라 찾아봤더니 농사 지으며 시를 쓰신다네요
    도배 시인이나 농부 시인 성자가 아닐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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