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습) 청담 – 채호기 시인

지독한 사랑 – 문학과 지성 시인선 119

발행일: 1992-05-08

自序

펴내고 자르고 닦아도 죽은 몸은 되살아

나지 않으리

감추어도 감추어도 드러나는 상처 . . . . .

자기 상처를 어루만지며,차라리 그 상처 속

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나고 싶다.

(. . .중략. . . .)

1992년 4월

채 호 기

[ 뒤 표지 글 ]

무슨 말을 또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해온 많은 훌륭한 결과들 위에서 나는 갈 곳 몰라 허둥댄다. 나의 세계에는 잠시 캄캄한 어둠뿐인 바깥 세계를 볼 수 없고 몸으로 더듬어 간신히 사물들을 감지할 뿐이다. 그리하여 내 몸은 세계를 파악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바깥을 보지 못하는 눈은 어쩔 수 없이 안을 향하게 되고 안에도 어둠과 밝음이 있음을 비로소 알아 가고 있는 중이다.

나의 시쓰기는 내 바깥에 있는 세상에 순진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순진한 마음으로 나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세상의 몸과 내 몸이 닿았을 때 나는 내 정신과 몸이 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을 위한 길은? 나는 잘 모른다. 배추벌레처럼 조금씩 꿈틀거릴 뿐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의 짧은 부딪침이 피워내는 짧은 불꽃을 등대삼아.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150

발행일: 1994-12-23

두 번째 시집 『슬픈 게이』에서 시인은 죽음으로 마감된 한 사람의 중단된 삶을 이어서 대신 살아가는 다른 한 사람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한 몸의 소멸을 넘어 다른 몸으로의 거듭나기라는 테마의 육화인데, 몸을 바꾸어 사라져가는 한 사람과 바꾼 몸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지난한 사랑과 무모하고도 고통스러운 열망을 게이의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언어로 형상화한다.

[뒤 표지 글]

시는 몸에서 흘러나온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삶의 흔적들이 몸에 새겨진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다. 몸을 변화시키면서 우리는 삶을 변화시킨다. 시는 삶을 변하게 한다(변하게 하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내 삶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려고 몸부림친다. 시를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고 삶의 변화를 통해서 시는 계속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시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시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이 부서지거나 새롭게 덧붙여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몸은 즉각적이다. 몸은 반응할 뿐 반성하지 않는다. 물론 몸은 생각에 의해 조종되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몸은 생각보다 빨리 간다. 뜨거운 것이 몸에 닿았을 때 뜨겁다고 생각하기 전에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시가 삶의 불투명성과 싸우려면 몸의 비이성적인 속성을 제 것으로 해야만 한다.

이 세계 안에 우리는 몸으로 있다. 몸이 없이는 우리는 이 세계에 있을 수 없다. 이 세계 아닌 다른 세계, 내 몸 아닌 다른 몸?…끝이 없다면…..영원히

날아가는 돌팔매. 저기 날아가는 물음표가 떨어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삶을 바꾸기 위해 시를 쓴다. 삶은 바뀌는 곳에만 있다.

사진 : 정익환

수련– 문학과지성 시인선 264

발행일: 2002-06-14

2002년 제2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인의 말]

시는 늘 불가능을 향해 뜨거운 구애의 눈길을 던지는데, 또한 그 불가능은 ‘가능하지 않음’이 아니라 ‘가도가도 가능함에 다다르지 못함’이다. 아시다시피, 그 채워지지 않는 도정이 바로 아름다움이 솟아나오는 지점이다. 감히 그리고 수줍게 말씀드린다면, 내 시가 늘 그 도정에 있기를 나는 바랐다. 아아, 언제까지 열정이 허물을 덮을 수 있을 것인가. – 2002년 6월 채호기

[뒤 표지 글]

내가 사는 동네 근처 연못에는 6월에서 8월까지 수련이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한두 해 여름 내내 자전거를 타고 수련이 핀 연못으로 달려가 한동안 수련을 쳐다보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내 몸 안에 수련은 하얀 멍처럼 피어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 멍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수련을 시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련(睡蓮)은 그 이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빛이 없는 밤에는 꽃잎을 닫고 자다가 낮에 빛이 있을 때 깨어나 꽃잎을 여는 꽃이다. 또한 뿌리와 줄기는 물속에 둔 채 타원형의 녹색 잎과 둥글고 여러 잎으로 된 흰(혹은 붉은) 꽃을 수면에 띄우는 아름다운 꽃이다. 수련 주위에 있는 물과 공기, 햇빛, 하늘, 수양버들, 부들 등이 모두 내 시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물속에 있는 작은 물고기와 물풀, 우리가 들여다볼 수 없어서 한없이 깊고 신비로운 수중 세계가 또한 내 시의 원천이 되었다.

나는 시를 쓰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몸과 언어에 대한 관심을 줄곧 시로 표현해왔는데, 수련은 형태적으로 그런 나의 관심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시 말하면 뿌리와 줄기를 물속에(보이지 않는 곳에) 감추고 꽃만 물 밖으로(보이는 곳으로) 내미는 수련은 언어를 몸으로 하고 느낌이나 생각을 그 언어로 표현하는 시와 형태적으로 동류의 것으로 내게는 받아들여졌다.

수련이 수중 세계의 신비를 알려주는 메신저라면 시는 바로 우리 몸이 부딪치며 겪는 세계를 의미화하여 알려주는 메신저이다. 나는 몸과 정신(혹은 감각과 의식)이 겹쳐지는 접점을 시로 표현할 수 있기를 열망하여왔는데, 수련 연작들을 통해서는 시와 수련(언어와 실물)이 겹쳐지는 접점을 시로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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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뜨겁다 – 문학과지성시인선 361

발행일: 2009-06-05

[뒤 표지 글]

어느 늦가을의 토요일, 답답하기도 하고 무료하기도 해서 읽던 책을 덮고 파주에 있는 감악산을 찾아갔다. 예전에 갔을 때 올랐던 능선 반대편 쪽에 햇빛을 받아 거울처럼 반짝이던 저수지가 고적하고 황홀해 보였던 생각이 나서, 이번에는 늘 가던 길을 버리고 그 저수지 편으로 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어렵게 찾은 그 길은 산자락에 있는 고요하고 아름답고 정겨운 마을 뒤편에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산길은 금방 깊어졌는데, 산으로 들어서면서 마을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희미하게 지워져가는 길 때문이기도 했다. 자꾸만 자신을 은폐하는 잊혀져버린 길답게 낙엽은 발목까지 뒤덮였으며 늦가을의 꽤 쌀쌀한 바람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한참을 올라가던 중에 갑자기 큰 돌 하나가 앞을 가로막으면서 길은 거기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나는 한순간 어떤 놀랍고 신비로운 느낌에 휩싸였다. 그것은 길이 사라져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유난히 검은 그 돌이 내게 말을 건넸기 때문이었다.그 말은 내가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이 아니어서 그 말의 의미를 해독해야만 했다.

나는 머리로는 그 말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몸으로는 그 돌을 타고 넘어갈 수 있는 길을 계속 찾았다. 나중에 그 돌을 우회하는 길을 찾기는 했지만,

나는 그 돌 주위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결국 산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산에 가는 이유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인데, 줄곧 그 돌이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날의 산행은 망쳐버리고 만 셈

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내가 언어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몸에 대한 문제를 늘 염두에 두고 시를 써왔는데, 몸은 단순히 피와 살과 장기로 이루어진 신체가 아니라 언어를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언어를 빌려다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들어 있으며 자신의 일부인 언어를 끄집어냄으로써 시를 쓴다. 그럴 때 몸을 떠난 시의 언어는 돌의 언어가 아닐까? 누구의 말도 아닌, 발화되지 않고도 거기 있는 침묵의 의미로서의 돌의 말, 언어의 몸으로서의 돌. 아무튼 여기까지 흘러온 내 시의 정거장에서 나는 다시 출발해야 한다.

자화상

너는 갇혀 있다.
너만 바라볼 수 있는 너의 거울 안에, 너는 갇혀 있다.
네가 잠드는 집과 출근하는 회사, 네가 말하는 언어의 벽들이 너를 감금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감옥 안에서 너는 안락함을 느끼기 때문에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
아무도 너를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너조차도 네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는 거의 포박되어 있다. ─자기 자신의 감옥, 모국어의 감옥, 자각할 수조차 없는 거울의 감옥!

새 봄이 오면 새 풀들이 자란다. 너의 머리에도 머리카락이 자라고 새로운 언어들이 거품처럼 일어난다. 날아갈 듯 파닥거리는 거품은 희망인가?

비눗방울들은 터지고 사라진다.

새파란 목장에는 소들이 풀을 뜯어먹지 못해 야윈다. 풀들이 말한다. 군데군데 흰 꽃들, 손 흔드는 언어들. 소들은 먹는다. 말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되새긴다. 네 통화 방식으로는 소들이 더 이상 파릇파릇한 초록 귀에 속삭일 수 없다.


언어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의, 부랑자들의, 불쌍한 사람들의, 포기하는 사람들의 언어. 네게서 자라나는 언어들은 얼기설기 얽힌 가시철조망, 강철프레스 같은 세계가 골통을 압박하듯 너의 생활 반경을 옥죈다. 태풍과 어울리는 기차.

네 주위에는 너를 발견하는 눈이 없고, 너 또한 너를 바라보는 시선의 독방에 잠겨 근심과 피로를 녹여 없앤다. ─좁고 깊은 한없이 꺼져드는 목구멍이여! 시야에서 아득해지는 길고긴 기찻길이여!

너는 더 이상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 거울에 비친 너는 목줄에 묶인 원숭이인데, 거울에 비친 너를 보는 너의 눈동자는 사라져버릴 허망한, 그러나 물리적인 빛의 환영을, 너라는 하나의 오브제를 탐색한다.

구경꾼 가득한 서커스 천막이 네 거울 속에는 고독의 깊은 복도이다. ─아아, 어떤 언어도 한숨으로 번역되는 물결도 깊이도 없는 거울 표면이여! 얕은 미궁의 착란이여! 손가락은 뜨겁다 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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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는’시인과의 만남’ 준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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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기 시인, 저처럼 잘 모르는 분들이 많아

예습 하면서 몇 줄 남겨봅니다

긴 글들은 제맘대로 나눴습니다 -요즘 눈이 침침하야

문제 되면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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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 가는 골목길 꽃집이 새로 생겼더군요

꽃과 친한 분이 ‘아메리카 블루’라 했던 거 같은데. . .

자신없습니다

양일간 아름다운 분들을 만나네요

어제는 풍월당, 오늘은 사카에서. . .

곧한국을 떠날 분들이라

오늘 아니면 시간이 없어서. . .

두 분,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길 ~~

2 Comments

  1. summer moon

    14/09/2012 at 20:14

    한국에서 친구가 보내준 달력을 보니까 9월 18일이 ‘철도의 날’이라네요.
    기차를 타고 사카에 가서 채호기 시인을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름다운 이들을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헹복할까
    혼잣말하면서 조금 식은 커피를 마셔요.

    왜 지금까지 채호기 시인의 시들을 못만나고 살아왔을까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지만 이렇게, 지금에라도 알게 된 것이 참 기쁘네요
    물론 참나무님 덕분이지요
    이곳에 올려 주시는 것들 읽으면서 가까이 가고 있거든요.

    이분의 책들을 모두 보고 싶어요.
       

  2. 참나무.

    16/09/2012 at 11:45

    이런 모임 가지는 장점 중에 잘 모르는 시인들
    한 분 한 분 알아가는 재미도 있답니다

    지난 번 이진명 시인과 한집사는 김기택 시인도 잘 모르다
    진솔하게 풀어놓는 이야기 들은 후 참 좋아졌거든요

    활자로만 만나던 분들 만나기 전엔 설레임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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