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눈…

Erik Satie Gnossienne N°1 Alexandre Tharaud

[김병종의 新화첩기행] <26> 진해 흑백 다방에서(1)

사랑하는 이여. 오늘은 남쪽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여섯 살 무렵 쯤이었던가. 벚꽃놀이 떠난 엄마손에 이끌려 낯선 도시 진해에 내렸다오. 눈 닿는 데마다 벚꽃으로 뒤덮여 멀미를 일으킬 것만 같았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그 몽환적인 꽃나무 아래를 한도 없이 걸었던 기억이 나는군. 그 길을 가고 또 가면, 어디엔가 피안의 세계 같은 것이 나올 것만 같았어.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 찰나적 아름다움이 주는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오. 거리와 지붕들과 담벼락마다에 눈처럼 내려 부딪혀 소멸하는 그 순수하고 무잡(無雜)한 꽃잎들의 장례.그 기억은 오랜 세월 동안 낙인처럼 가슴에 상처로 남겨져 버렸다오. 꽃잎에 상처 입은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진해에 가려거든 부디 벚꽃 만개할 때만은 피하도록. 아름다움의 한 가운데마다 마알갛게 고여 있는 슬픔의 빛을, 혹 그대도 부풀어오는 그 꽃의 양감 속에서 언뜻 보아 버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진해에는 벚꽃말고도 설화(說話)처럼 숨겨 있는 한 이름이 있습니다. 흑백다방. 벚꽃놀이 인파에 섞여 둥둥 떠다니다가 그 흑백다방에 들러 커피향 속으로 녹아드는 ‘라크리모사(눈물의 나날)’한 곡 듣지도 않고 휑하니 올라와 버린다면, 당신은 진해를 제대로 만나고 온 것이 아닙니다.

흑백다방. 화가 유택렬과 피아니스트 유경아 부녀의 집. 생전에 이중섭과 윤이상과 청마와 미당과 김춘수 같은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사랑방 같은 곳. 음악감상실이자 연주회장이었고 화랑이자 소극장이 되어왔던 곳. 50년이 다 되도록 물처럼 고요하게 그 거리 그곳에 그 모습 그대로 있는 진해 문화의 등대. 아버지는 삐걱이는 목조계단 올라 그 집 2층화실에서 평생 그림을 그렸고 딸은 아버지가 일하는 동안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곡을 연주하여 차향(茶香)처럼 올려 보내드렸던 곳.

그 사이 바람 불고 비 내리고 꽃잎 분분하게 날리며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홀로 그린 수백점의 그림을 남겨둔 채 북청 고향길보다도 먼 하늘길로 떠나고 이제는 홀로 남은 딸이 밤마다 아버지를 위해 헌정의 곡을 치는 곳. 당부하노니, 혹 그대 늦은 밤 그 집 앞을 지나가거든 그 집 창문으로 번져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발길 멈추고 한번쯤 귀 기울여 들어주기를 ….

고흐의 ‘아를 ’처럼 진해를 껴안고 사랑했던 화가 유택렬. 일본식 목조가옥 그대로인 그 흑백다방 이층 아틀리에에서 창너머로 맞은 편 장복산이 비안개에 잠기고 진해 앞바다의 물빛이 눈부시게 푸르러질 때마다 두 눈이 짓무르도록 붓질을 멈추지 않던 그 사람. 그 잘난 중앙 화단이 그 이름 석자 위에 눈길 한 번 주는 법 없었건만 무심한 세월에 대하여 말하는 법 없었고 허명(虛名)에 허기진 적 없었던 크고 넉넉했던 자유인.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슬픔과 하나의 고독도 함께 깊어져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 그 화가 유택렬이 마지막 흑백다방을 떠나던 날 어느 시인은 그 이의 관위에 꽃 대신 이런 시를 놓았습니다

.…남쪽바다 보이는 구석진 흑백다방에서 /늘‘부르흐 ’바이올린 콘첼또를 듣던 /그 커다란 화가 /…사람, 사람 중에 유별난 사람 /사랑도 미움도 /꽃다발처럼 안고 /…먼저 가신 분 / 색색의 꽃종이 속에서 /은근한 묵향으로 피어나는 /남도조선의 고고한 화인(畵人)/우리들의 묵은 사랑과 함께 /여한없이 가시어라. (김선길, 북청화인)화가 유택렬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서울 공대 이병기 교수(서울대연구처장)로부터였습니다. 오래 전 해사의 교관으로 8년여를 진해에서 보냈던 그이는 벚꽃처럼 만발한 통제부 길을 홀로 자전거를 타고 오가던 추억에 대해 이야기 해주곤 했습니다.

어느 달 밝은 밤엔가는 술을 한 잔하고 그 벚꽃길을 가다가 그만 자전거가 나무에 부딪히는 바람에 넘어졌다가 주변이 너무 아름다워 울고 말았노라는 고백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진해를 말할 때면 그이는 늘 흑백다방과 유택렬, 유경아 부녀를 함께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끝맺음말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아름다운 곳,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름다움. 나야말로 반평생을 그 신기루를 쫓아 헤매다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운 풍광 속에 산다는 그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아 떠난 남쪽여행은 아주 뒤늦게야 이루어졌습니다. 진해에 함께 가기로 해놓고 우리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가급적 …벚꽃만발한 군항제 같은 때는 피하도록 합시다.”부산하고 들뜬 시간을 피해 늦은 밤 그곳에 도착하여 경아의 ‘대공(大公)’을 듣는 맛이 일품이라는 이유이지만 내게는 벚꽃 만발한 시간을 피하고 싶어하는 다른 이유가 숨겨 있다는 것을 그이는 차마 짐작하지 못했겠지요.

안개비가 내리는 늦은 밤 흑백다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실내공간 가득 퍼지고 있는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선율이었습니다. 생전 유 화백이 가장 즐겨 듣던 곡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 음악 너머로 고인의 작품들이 빛과 색채로 넘실대어 ,내가 생각했던 흑백이라는 집 이름을 무색케 했습니다. 숫제 음악의 파편들이 존재들처럼 공간으로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탁자 위로 천장으로 그리고 유 화백의 그림 위로 마구 부딪치고 부서졌습니다. 이 집에서는 음악과 미술이 서로 다른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늦은 도착에 맞추어 양산에서부터 올라온 시인 고영조 선생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던 유 화백이 스트라빈스키와 말러와 하차투랸 음악 속에서 늘 클레와 몬드리안과 세잔의 빛과 색을 함께 본다고 고백하곤 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확실히 그의 추상화 속에서는 진해바다의 깊고 푸른빛과 그 바다에 내리는 새벽안개와 바람에 날리는 4월의 벚꽃이 숨쉬고 있었습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음악이 침울한 ‘콜니드라이(神의 날)’로 바뀌면서 나는 자꾸만 흑백다방이 물 위에 떠있는 작은 섬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진해 자체가 커다란 호수 위에 뜬 도시 같기도 했습니다.

그 이름처럼 바다라기보다는 잔잔한 강의 포구 같은 도시. 일제는 이 풍광 좋은 바닷가 도시를 자신들의 이상도시로 꾸미려고 중원, 북원, 남원에 방사형 길을 내고 도처에 사쿠라마치(벚나무 길, 벚나무 숲)를 조성했지만 어느 날 이곳을 영영 떠나가야 했지요. 인생 뿐 아니라 풍경 또한 누구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왜 몰랐을까요. 경아씨가 아버지의 작품을 쌓아온 2층 화실로 안내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이가 남기고 간 그림들만은 내일 아침 두꺼운 커튼을 열어 진해 바다에 쏟아지는 햇빛과 맑은 바람을 맞아들여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인과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아틀리에에 올라가기 전 새벽바다를 찾아가 그 푸른 빛 앞에 먼저 서고 싶은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 흑백다방과 화가 유택렬 —————

지난 50년 가까이 많은 음악가, 미술인, 연극인, 시인들이 작품을 발표해 왔던 진해의 흑백다방은 6 ·25 전쟁 후 처음 ‘칼멘 ’이라는 상호로 문을 열었다. 이후 함경남도북청 출신의 화가 유택렬(1924~1999)이 월남하여 진해에 머무르면서 ‘흑백다방 ’으로 바꾸어 운영해오면서 2층을 자신의 화실로, 다방 공간 한쪽을 딸의 연주실로 삼아 부녀의 작품을 발표해왔다.

무속과 단청 등의 전통적인 소재 위에 고전 음악의 양식을 섞은 작품으로 10여회의 개인전을 열고 발표하지 못한 약 400여점의 작품을 남기고 타계한 유 화백을 이어 딸인 유경아(36)씨가 이 공간을 운영하며 매달 연주회를 열고 있다.

6 Comments

  1. 아카시아향

    20/12/2012 at 08:49

    참나무님, 감사합니다~^^

    진해 벚꽃을 여지껏 못 본 것이
    오히려 다행인건가 하는 ‘철.없.는.'(ㅎㅎ) 생각을 해 봅니다.
       

  2. 참나무.

    20/12/2012 at 10:25

    예전에 라크리모사 음원 심고 포스팅 한 게 있는데… 못찾겠더라구요
    다행히 최근에 흑백다방을 따님인 유경아씨가
    다시 새 간판 올렸다는 소식이 있길래…^^

    김화백님의 화첩기행은 괜찮은 시리즈라 생각한답니다.
    국외,국내 가리지않고…^^   

  3. 산성

    20/12/2012 at 13:19

    좋아하는(?) 단어들이 넘쳐나 한번 읽고
    조금 쉬다(?) 다시 돌아왔습니다^^

    덕분에 흑백다방,그 현장을 보게되는 행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꽃나무…
    괜히 서글프리하게 엄마 생각.
    전 이미 충~분한 엄마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 아이로 돌아가
    또 다른 엄마를 찾고 있답니다 ㅉㅉ

    에릭 사티,그리고 라크리모사…!

       

  4. summer moon

    20/12/2012 at 17:36

    참나무님 목소리가 겹치는 것만 같아요
    바로 앞에서 웃으시면서
    선물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화첩기행은 참 좋은 책들인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이 읽어도 눈으로 가슴으로 밑줄 긋고 싶게 만드는 것들이 있는…    

  5. 참나무.

    21/12/2012 at 01:55

    정미경씨랑 사귈 때 연애편지를 그렇게 잘 썼다지요
    김병종화백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림보단 글솜씨가 우위인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숨길 수가 없네요
    대단히 죄송하지만…;;

    진해…갈 곳이 한 군데 잇다는 건 행운이지요
    벚꽃 난분분’ 때는 피하고 말이지요…
       

  6. 참나무.

    21/12/2012 at 01:59

    화첩기행 읽다보면 가보고싶은 곳이 몇 군데 생기지요
    진해 흑백도 그 한군데…
    썸머문은 참 좋은 스승님을 두신 행운아셔요…

    요즘은 제 라이프 스타일이 바뀌었답니다
    초저녁부터 쓰러저버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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