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을 만나는 계단

20120321_071422_35996c518611ac5633e825a632908ade.jpg

가슴 김승희

세상에서 말 한마디 가져가라고
그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가슴’이라고 고르겠어요
평생을 가슴으로 살았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가슴이 부풀었어요
가슴으로 몇 아이 먹였어요
가슴으로 산 사람
가슴이란 말 가져가요
그러면 다른 오는 사람
가슴이란 말 들고 와야겠네요
한 가슴이 가고 또 한 가슴이 오면
세상은 나날이 그렇게 새로운 가슴이에요
새로운 가슴으로 호흡하고 맥박쳐요

– 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2012

아프리카 동부 에티오피아에서는 ’13월의 태양’이 뜬다. 이 나라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13월이 있는 율리우스력을 쓴다. 12월이 끝나도 한 달이 더 있다. 1~12월은 한 달이 30일씩이고, 13월은 닷새다. 3000년 역사의 문명을 가졌고, 가장 오래된 인류의 뼈가 발견된 곳이다. ‘아프리카의 뿔’이란 별명을 가진 장거리 육상 강국이기도 하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거리에 가득해도 13월의 태양이 뜰 때면 새로 힘을 돋운다.

▶세밑에 김승희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희망이 외롭다’를 냈다. "남들은 절망이 더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다"고 운을 뗀다. "절망에는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비애의 따스함이 있다"고 했다. 김 시인의 가족 중에는 그녀가 오래도록 돌봐온 중환자가 있다."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이 있기에 그녀는 "’13월의 태양’처럼 다시 한 번 세상을 산 위로 들었다 놓을 마음"을 품는다.

▶흥겹고 들뜬 섣달 그믐에도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부도가 나 길거리로 내몰려도,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하는 가족 곁에 밤을 새우면서도, 힘을 내 웃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김 시인은"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은 끊지 말고,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는 온기 어린 다짐을 건넨다 (…중략….)

[만물상] 13월의 태양/ 김광일 논설위원/ 입력 : 2012.12.30 22:15

응시 김 승 희

사슬에 매인 루키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불쌍한 밥그릇 옆에
하염없이 목줄이 매여 묶여 있는 루키
—-루키야, 너는 왜 개로 태어났니?

하늘이 비치는 순한 눈동자를 들어
루키는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흰 옷 입고 걸어가던
어머니처럼 인자하게 한번 더 나를 바라보는 루키.
—-그런데, 너는 왜 사람으로 태어났니?

루키와 나.
그렇게.

– 시집 :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김승희(60) 시인은 나이를 모른다. 육십인데 이토록 시가 젊을 수 있다니. 시가 나이를 깨뜨리고 시대를 깨뜨린다.

마치 꽁꽁 얼어붙은 빙하를 우지끈 깨뜨리고 나아가는 ‘쇄빙선’ 같다. 쇄빙선은 먼저 ‘나’를 깨버린다.

“쇄빙의 아침이다/ 오늘 하루도 얼음장을 깨고 쇄빙의 시간 속으로 나간다/ 갈비뼈 있는 데서 피가 흐른다/ 쇄빙의 칼날 밑에 오늘도 네 사람의 학생과/ 한 사람의 교수가 자살했다/ 면류관 같은 얼음칼이 쇄골에 쿡쿡 박힌다”(‘서울의 우울 3’ 부분)

쇄빙은 그가 우리 시대를 꽁꽁 얼어붙은 언어의 빙하기로 보고 있다는 방증의 단어이기도 하다. 두꺼운 빙하를 깨고 천천히 나아가는 쇄빙선의 옆구리에 얼마나 깊은 상처가 새겨지는가. 그렇지만 그의 쇄빙의 시학은 빙하를 뚫고 나아가면서도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강물이 풀리면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과거 어느 대선 후보가 ‘사람이 희망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건 정치구호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영혼의 구호는 되지 못한다.

우리 시대에 과연 희망은 무엇인가.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서강대 국문학 교수인 김승희의 아홉 번째 시집 ‘희망이 외롭다’(문학동네)는 우리가 그토록 즐겨 쓰는 단어인 ‘희망’의 심층을 열어젖힌다. 예컨대 인간에게 희망은 얼마만큼 관습적이다. 모든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절망을 극복할 방책으로 ‘희망’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 학습된 천성에 가깝다.

김승희는 이러한 관습을 뒤집는다.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희망이 외롭다 1’ 부분)

김승희는 희망을 깨뜨려버린다. 이는 한국문학에서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지점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희망을 너무나 남발했는지도 모른다. 김승희에 따르면 인간은 희망에 대해 알고 있기에 희망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희망이 외롭다 1’의 다음 연은 이어진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중략)//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은 외롭다”

희망은 전지전능으로 우리 곁에 자리 했다. 누군가 병이 깊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바싹 붙어 앉아 ‘희망을 가지라’고 속삭이기도 한다. 하지만 희망이라니. 우리는 희망 병에 걸린 환자인 것이다. 그토록 희망은 쉬운 것인가. 차라리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희망이 외롭다 1’)인 절망에 몸을 묶을 지니,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고치는 것보다 허물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오늘에// 내일의 빵이 모든 희망의 할머니였다고 쓴다.// 서울이여, 서울에서/ 희망도 스펙이라고 쓴다. 지우고/ 희망은 오늘/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외설이 되었다고 쓴다”(‘서울의 우울 17’ 부분)

김승희는 우리 시대에 남발되고 있는 희망의 내면을 성찰하고 있다. 우리는 희망 속에 참혹한 절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김승희가 말하는 희망이란 절망에 몸을 묶은 역설의 시학인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10 Comments

  1. 비바

    03/03/2013 at 14:35

    잘 읽었습니다.

    읽고보니 비바는 좀 경박한 거 같아요…ㅎ
    비바가 누구게요? ^^   

  2. Myran

    03/03/2013 at 21:13

    당연히 희망이 더 어렵지요.
    가장 편한 ‘포기’가 없으니까.
    그리고 혼자 몰래 키울때가 많으니까.

    절망엔
    포기도 있고, 위로도 있고, 구설수도 있고…^^

    절망 다음에 오는 것이 희망이라 생각해요.
    바닥에 닿으며 다시 솟아 올라오는 것처럼.
    희망의 다음은 또 다른 희망이거나 더는 희망을 갖지 않는 일,
    이라고 하면 좀 억지스러울까요?

    아직은
    희망은 외설이면 안됩니다.
    순정이라야지.

    청담에 못가는 심통 댓글쯤으로 여기세요. ㅎㅎ
       

  3. 겨울비

    03/03/2013 at 21:34

    이렇게 옮겨주시는 글이 얼마나 좋은지요.

    꼭 제 안에 들어왔다 나가신듯.

    13월이 닷새라는데 열흘쯤 13월을 살았나봅니다.

    시인께 드리는 메일에 썼었지요.

    포스트잍이 붙어 있는 ’13월의 이야기’를 들고

    여행을 떠난다고…   

  4. 참나무.

    03/03/2013 at 22:43

    낯설은 아이디…누구신가 했는데 조르바님!

    비바~라스베가스~~ 엘리브 프레슬리가 먼첨 떠올랐지요
    자주 들러주셔요 만세~~할게요…^^
       

  5. 참나무.

    03/03/2013 at 22:46

    본문 열심히 읽고 달아주는 마이란 댓글은 늘 감동…

    숲속나라 빗물 동네에 새로 올라올 글들 봄꽃보듯 그렇게
    조용히 기다릴게요 뜸 많이 들이진 말고…^^
       

  6. 참나무.

    03/03/2013 at 22:53

    여독은 좀 풀어졌을까…

    있지도 않은 25시라든가 ..
    ’13월의 고요’에 관하여 이번에 시인 만나면 어떤 분이 또 질문하길 기대하며…

    ‘…눈물처럼 미세하게, 바늘 하나처럼 투명하게, 비눗방울처럼 덧없이.
    (…)
    바늘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는 목소리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 가시는 남아 누군가의 떨리는 영혼에 깊숙이 박여 있어 무섭도록 낯선 13월의 이야기를 열어가야 할는지도 모른다…..’

    ‘무중력과 침묵’에 관하여 음미하며 읽었어요
       

  7. cecilia

    04/03/2013 at 09:42

    저도 김승희 시인에 동감합니다.

    이번 주 프랑스 남자 시인 시집 발표에 가야겠습니다.   

  8. 참나무.

    04/03/2013 at 10:10

    상세한 후기 기다릴게요 세실리아 님…^^   

  9. 초록정원

    08/03/2013 at 13:47

    신을 만나는 계단..
    어?? 이거 참나무님표 계단인데?? 시인의 시제목인가?? 하고 다시 읽었어요.
    그랬더니 역시~~ ^^

    여유로운 날이 오면 저 계단 참나무님과 걷고 싶네요.
    올가을쯤엔 그런 날 오려나요.. 한동안 정말 정신없이 살았으니
    허락해 주시리라 믿고 싶어요.
       

  10. 참나무.

    08/03/2013 at 13:51

    대환영입니다…^^
    지금 우리 같이 있어요

    기억력 참 좋으시다…
    같은 제목 포스팅 몇 개 될겁니다..^^
       

Leave a Reply

응답 취소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