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P 배움터2층 디자인 박물관 들어서자 마자 도슨트가 설명을 시작하겠다 했다. 훈민정음 혜레본 앞에서 그 당시 천원에 팔았는데 간송선생은 만천원을 선뜻 지불했다 한다 천원은 지금 돈으로 서울에서 웬만한 집 한 채 값으로 잘 보존해 준 분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 값이고 만원은 귀한 보물애 대한 값이라 했단다. 주일이라 바로 앞 아이들이 많은 걸 확인한 도슨트는 "…이후간송 선생은피난갈 때도 품에 품고 다니고…" ‘잘 때는 베개 안에 넣어 보관을 하여 우리까지 잘 보고 있’다는 설명을 하자 아이들이 "우와~~" 감탄사를 연발했다. 감상 포인트: 1.이정의 삼청첩과 금니작품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사군자 중 국이 빠진 매,난 (국)죽을 그린… 당시만 해도 국화는 빠졌는데 심사정 이후 국화가 합해졌다던가? 2. 이번 전시 포스터이기도 한 이정 풍죽을 가운데로 좌,우 얄쪽 벽에오마주 한 영상물 차동훈-풍죽예찬이 특히 볼만했다 소쇄소쇄 댓잎이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하며… 이정은 매화를 워낙 좋아해서 공주 집 근처에 200여그루의 매화를 심고 수시로 그렸다 했고 미디어 작가 차동훈은 전국의 대나무를 찾아다니며 제작한 미디어 아트다. 도슨트는 관객들께 혹시 5만원 지폐 있나 물어봤고 그 중 한 분이 선뜻 내놓으니 설명을 시작했다. 원화랑은 너무나 다른 이정의 풍죽과 매화그림의 대가 어몽룡의 월매화를 겹쳐 조작한 바람에 문화재급 작품에 해를 입혔다고 욕을 많이 먹는다고… 참고로 5만원권 펼쳐 비교하며 보시길…얼마나 와전되었나를…;;
어몽룡(魚夢龍)/ 월매도月梅圖
3.
한 가운 데 제일 넓은 방엔 사군자를 알기쉽게 작품과 함께 설명하는 대형 스크린이 있고
여럿이 앉을 수 있는 넓은 의자도 있어 가족끼리 같이 감상하기 좋겠더라
4.
맨 마지막 방은 특별히 사진촬영이 되는 곳이라
아이들이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는 게 신기하여 이리저리 움직이고 다녔다.
맘에 드는 도슨트를 만나 엑기스만 잘 뽑아 쉽게 설명해줘서 고마웠다.
특히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어깨너머 낑겨서 보던때가 생각나
탁 트인 넓직한 공간에서 편히,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백매(白梅)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지본담채, 80.2×51.3cm
이 <백매>는 사군자 그림의 특징과 지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특유의 주춤거리는 듯 출렁이는 필선과 부드러운 선염으로 등걸과 마들가리를 그리고, 그 위에 수줍게 맺혀 있는 꽃봉오리를 소담하게 베풀어 놓고 있다. 통렬하고 강경한 기세를 담아냈던 조선 중기 묵매화풍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심사정이나 강세황으로 대별되는 조선후기 남종문인화풍의 고아하고 유연한 문기(文氣)와도 분명한 간극이 있다.
김홍도는 매화를 통해 강인한 기세를 보여주고자 한 것도 아니었으며, 고아한 품격을 보여주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매화에서 올곧은 선비의 절조보다는 시인의 풍류를 찾고 싶었던 듯하다. 그러니 가슴속의 시정과 흥취를 감각의 흐름에 따라 붓 끝에 실어 담아내면 그뿐이었다.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 어렵게 받은 그림 값을 다 들여 매화음(梅花飮; 매화를 즐기며 마시는 술)을 즐겼다던 김홍도에게는 결연하고 기세등등한 매화보다는 이처럼 소탈하고 정감 있는 매화가 훨씬 마음에 끌렸을 것이다.
매월만정(梅月滿庭: 매화와 달이 뜰에 가득하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지본수묵, 27.5×47.1cm
이<매월만정>은 조선중기 묵매화와 같이 올곧고 근엄하지도 않을 뿐더러 온축된 기세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다. 엄청난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빠른 붓질로 기괴하게 꺾이고 뒤틀린 가지와 툭툭 던지듯 찍어낸 몰골(沒骨)의 꽃들이 있을 뿐이다. 대기를 암시하는 오묘한 담묵의 번짐과 이지러진 달의 모양에서 촉촉하고 흥건한 정취와 감흥이 흠씬 묻어난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던 강직한 지사(志士)의 모습을 닮은 조선중기의 매화도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묵매화에 대한 미적 지향이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대담하고 거친 필치로 묘사한 매화의 가지와 줄기는 조선 중기 묵매화에서 보았던 강인함이 남아있어 온아하고 평담한 의취를 중시했던 중국의 명나라 문인들이 즐겨 그리던 묵매화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 명대 오파계 문인화풍을 추구하면서도 강경하고 명징한 조선적인 미감을 절충시킨 심사정 회화의 전반적인 특징을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향군자(國香君子: 국향이고 군자이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지본수묵, 22.9×27.0cm, 《난맹첩(蘭盟帖)》
“이는 국향이고 군자이다. (此國香也, 君子也. )”
국향 즉 나라를 대표할만한 향기라는 것은 난의 별호(別號)다. 군자라는 것도 역시 난초의 별칭이다. 그런데 난초 한 포기를 화면 한 가운데 단조롭게 그려 놓고 이런 제사를 붙여 놓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난의 본질만 단순하게 표현해 놓고 나서 이것이 ‘국향이나 군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난이다.’라고 간단명료하게 써 놓은 것이다. 참으로 대담한 발상의 화면 구성법이다.
중앙에서 솟아난 성긴 난초 잎새들 속에서 두 잎이 대각으로 교차하며 거침없이 좌우로 벋어나가서 화면을 압도하니 그 기백은 가히 고고한 군자의 기상과 같다 하겠다. 그 둘레에 꽃대를 솟구쳐 내고 꽃잎을 활짝 피워 내어 향기를 토해 내고 있는 꽃의 오연(傲然)한 자태는 국향의 모습 그대로이다. 제사(題辭) 뒤 끝에는 ‘정희(正喜)’라는 붉은 글씨의 작은 인장이 찍혀 있고 왼쪽 화면 끝 부분 중앙에는 ‘백정암(百鼎庵)’이라는 별호인이 찍혀 있다.
동심지란(同心之蘭: 마음을 같이 하는 난)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지본수묵, 27.3×37.8cm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란 이름으로 더욱 익숙한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난초 그림이다. 대원군이라는 왕실 출신의 신분적 배경과 19세기 후반 격동의 시대에 펼쳤던 정치적 이력으로 인해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강했던 이하응은 타고난 예술가이기도 하다. 이하응의 예술적 재능은 사군자 그림에서 탁월한 빛을 발했는데,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로부터 난초 그림에서 만큼은 최고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묵란화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그림은 그러한 이하응의 난초 그림 가운데 30대 중반의 건실한 자기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하응의 난초 그림을 모아 놓은 《석파묵란첩(石坡墨蘭帖)》 안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화첩이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며 김정희로부터 그림과 글씨를 배우던 이하응의 30대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추사의 예술세계에 공감하던 석파의 예술 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실제로 화첩에 수록된 다수의 그림들이 스승 추사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오른편 화면을 가득 채운 훤칠한 키의 난초가 일제히 왼편으로 잎을 벋었다. 훌쩍 자란 세 줄기 잎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가늘면서도 긴 줄기를 드리우고 있다. 짙은 먹으로 그려진 긴 난초 잎과 맑고 옅은 먹으로 표현된 짧은 난초 잎과 꽃대는 농담의 차이를 통해 화면의 깊이감을 보여준다.
향기를 뿜어내는 꽃대들 역시 잎과 함께 왼편으로 기울어 마치 한 마음으로 함께 하는 듯하다. 그림에 적혀 있는 글 역시 같은 맥락이다.
같은 마음의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同心之言, 其臭如蘭.)
『주역(周易)』의 13번째 괘인 ‘천하동인(天下同人)’에 나오는 글이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자를 수 있으며, 그처럼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고 한 것이다. 스승의 학문과 예술을 흠모하던 젊은 날 이하응의 기개와 의지가 엿보인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군자와 난초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자황양국(紫黃兩菊: 보라색과 황색 두 국화)
김수철(金秀哲, 1800경~?), 지본담채, 33.0×45.0cm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은 조희룡, 허유와 더불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추사의 그림 제자 중 한명이다. 김수철의 화풍은 경물의 대담한 생략, 간일(簡逸)한 필치, 감각적인 채색 등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다른 예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파격적이며 이색적인 것이었다.
국화와 괴석이 어우러진 모습을 그린 이 작품도 김수철의 회화 세계의 특장이 잘 드러나 있다. 대체적인 윤곽만 윤묵(潤墨)의 매끈한 필치로 잡아낸 후, 담담하고 흥건한 붓질로 색을 올렸다. 조금 거친 듯하지만 활달하고 산뜻한 김수철 화훼화의 장처와 특성이 온전히 베풀어져 있다.
경물의 포치 또한 엉성한 듯하지만, 전체적인 균형을 고려하여 잘 짜여져 있다. 만개한 노란 국화와 봉우리를 맺기 시작한 자주빛 국화를 괴석 좌우에 대비, 조화를 고려해 배치했다. “필의가 조금 거친 듯하나 매우 편안하다. 위치도 자못 좋다.”라고 했던 김수철에 대한 추사의 평가를 절로 떠올리게 한다.
전통적으로 절개와 지조의 표상인 사군자의 일원으로 숭상되어 오던 국화를 이렇듯 탐미적인 인식과 기법으로 접근한 것은 사군자에 대한 김수철의 인식이자 조선 말기 문예의식의 다원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죽(石竹: 돌과 대)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지본수묵, 30.0×44.6cm
강세황이 묵죽에 쏟은 관심과 열정은 남달랐다. 강세황은 만년에 ‘노죽(露竹)’이라는 호를 즐겨 썼고, 현전하는 노년기 작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묵죽다. 그런 점에서 묵죽은 강세황의 만년기 회화 세계를 대표하는 분야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석죽>도 그중 하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통활한 공간감을 중시하는 여유로운 화면 구성이라 할 수 있다. 강세황은 “매화와 대나무를 그리는 데는 비어있는 듯하고 시원한 느낌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할 만큼 여유롭고 상쾌한 구성을 중시했다. 담박하고 소략한 공간 구성은 이런 강세황의 지론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윗부분이 잘린 듯한 형태의 전면의 대나무도 다소 특이하게 보이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화면 밖으로 유도하며 풍부한 공간감을 연출하는 데 한 몫하고 있다.
다소 엉성해 보일 정도로 여유로운 구성과는 달리, 대나무와 바위의 필치는 유려하면서도 엄정하다. 우아한 정취를 중시하는 남종문인화풍의 토대 위에 조선 전통 화풍이 지니고 있는 굳센 미감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외적으로는 유연하지만 내적으로는 강경한 외유내강의 미감은 강세황 예술 세계의 핵심적 조형감각이다. 이 <석죽>에서도 유감없이 잘 발휘되어 있다.
풍죽(風竹: 바람 맞은 대) 임희지(林熙之, 1765~?), 지본수묵, 108.0×53.6cm
수월헌(水月軒) 임희지(林熙之)는 역관(譯官) 출신으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여항화가(閭巷畵家) 중 한명이다. 난죽을 잘했는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임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나무는 강세황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했고 난초는 강세황보다 뛰어났다” 조선후기 최고의 난죽 대가로 명성을 떨쳤던 강세황보다 임희지가 더 낫다는 평가다.
〈풍죽〉은 임희지의 개성이 한층 두드러진 작품이다. 중앙 하단에서 시작된 두 줄기의 대는 곧 쓰러질 듯이 누워있고, 잔가지와 댓잎들은 강풍에 흩어져버릴 듯 날리고 있다. 이정이나 유덕장의 풍죽이 바람을 견뎌내는 강고함을 강조하고 있다면, 이 〈풍죽〉은 세찬 바람의 기세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작품 곳곳에서 엿보이는 과장된 묘사에서 바람은 단지 화가의 표현 욕구를 한껏 분출시키기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거침없이 화흥(畵興)을 분출시키는 임희지의 작화태도는 분명 조선중기 이정의 묵죽화는 물론이거니와 바로 전대의 강세황의 묵죽화풍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던 당시 청대묵죽화풍의 영향에서 그 일차적인 원인을 찾아야 할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풍죽〉은 조선후기에서 말기로 이행하는 시기의 묵죽화풍 변화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 중기 예술의 정수…풍죽예찬 일부 : SBS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