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못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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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한 장의 사진

지리산 청학동-삼성궁에 들렀을 때 그곳 주인(?)이

100년만에 핀다는 대나무 꽃을 우리 자리에 선물한 적이 있었다

몇 해 전 사적인 천기누설이라 그냥 사진만 보관했는데

그리라도 담아두길 잘 했다 싶다.

오늘이 한 장의사진 덕분에

대나무 그림들 찾아보다 사군자까지 복습했다.

오래 전부터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봤던 사군자전

그냥저냥 눈으로만 보고 넘겼는데

이번 DDP 간송문화전 4부…선비의 향기

두 번 다녀온 이후 찬찬히 복습하게 된 것이다

성북동 보화각에서 봄(5월) 가을(10월) 두 차례 열리던 간송문화전이

막을 내리고 DDP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된다 했을 때

참 많이 섭섭했다…나름 연중행사였는데…

한 번 가는 날 아침 일찍 서둘러 늦게까지

최순우 고택…심우장…성북구립미술관…

더러는 길상사까지 훑기도 했으니

어느 해 5월인지 10월인지 신윤복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방영 이후 갑자기 관람객이 늘어

심할 때는3시간 정도 줄을 선 경험도 있었다.

그 아니어도 벼르던 고정 관객들로

항상 붐벼 제대로 볼수 없었는데

이후는 더 했다…

심지어는 3시간 정도 줄을 선 경험도 있었다.

보화각…그 당시엔 최근의 건축으로 이름 날렸다지만

워낙 오래된 건물이다보니 제일 시급한 게 화장실이었다.

들어서면 입구에서부터 살짝 화장실 냄새가 나곤 했다.

내 코가 워낙 예민해서인지…

(프랑스인들은 냄새 예민한 사람은 개꽈로 취급한다던가…^^)

그래도 작품들 볼 욕심에 참을 수 있었는데

어느 해 전시회부터 그 아름다운 고색창연한 정원에 간이 화장실까지 들어선 것이다

더러는 전시 작품보다 일반에게 공개되는 정원 때문에 갈 때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산목련,불두화,파초, 담쟁이…등등…

이후 …이건 아니다 싶어 관계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고…

(. . . . . . .)

그리고

DDP 간송문화전 1.2.3.부 모두 가봤다.

이번이 4부. 사군자전

특히 대나무 그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청죽(晴竹): 맑은 날의 대

연죽(煙竹): 안개 속의 대

노죽(露竹): 이슬맞은 대는 제목만으로 시다

고죽(枯竹): 시들은 대

신죽(新竹): 새로 나온 대

통죽(筒竹): 큰 대

우죽(雨竹), 풍죽(風竹), 설죽(雪竹), 석죽(石竹)은 따로 설명 필요없겠고

묵죽(墨竹): 烏竹과 어찌 구별되는 진 아직 모르겠다(아시는 분 설명 부탁해요~~)

녹죽(綠竹)도 몰랐는데…녹색으로 채색한…대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된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이번 4부는

탄은(灘隱) 이정(1554~1626) 삼청첩 전부편히 볼 수 있다

이정 풍죽을 오마주 한 작은 전시실 오래 머무르시길

1.2.3편 길어서 빠진 운미(芸楣) 민영익(1860~1914)풍우죽(風雨竹)등 몇 몇 작품들은

전문가들의 상세한 설명까지 남겨본다…정리하면서 익히려고

이번 전시에서는 이정의 삼청첩(잡글 2편에 상세 소개) 전부와

복구 과정까지 세세하게 모니터로 볼 수 있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기획이다

간송미술관 측이 보물을 얼마나 귀히 여기며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여서 더더욱…

이번에 두 번 다녀온 이후 ‘발로 쓰는 전시회’ 에 두서없이 올린 것도 4회 째다.

그냥 보관하고싶어 간송 본부에서 ‘드르륵’ 한 이유는 짧은 식견으로 누가 될까 겁나서이다.

100점을 교체 전시 중이라하던가? 그러니 무슨 수로 다 소개하겠는지…

전문가들이 뽑아 준 몇몇 작품들…1.2.3회에까지도 다 못 옮기고

보관하고싶은 몇 작품만 더 ‘상세하게’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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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문화전 4부- 장소: DDP

매.난.국.죽 – 선비의 향기~8월 30일까지

1. 사군자(四君子)란 무엇인가?

한기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에 추위를 무릅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청초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주위를 맑게 하는 난초,

모든 꽃들이 시들어 가는 늦가을에 모진 서리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국화,

칼날 같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옛 문인들은 이들의 생태와 특성을 보고 군자를 떠올렸다.

군자에 비유되며 시문과 그림으로 사랑받던 이 네 가지 식물들이 17세기 이후에는

‘사군자(四君子)’라는 이름으로 함께 불리기 시작했다.

그 명확한 이유와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사계절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봄-난초, 여름-대나무, 가을-국화, 겨울-매화로 설정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봄-매화, 여름-난초. 가을-국화, 겨울-대나무로 계절과의 조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계절 감각에 따라 변화를 준 것으로 보인다.

군자의 상징성을 지닌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는 오랫동안 문학과 예술의 핵심적인 소재로 사랑받았다.

특히 사군자 그림은 조형성과 미감에서 동양화의 특징과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이다.

2. 사군자를 사랑한 문인들

사군자는 특히 문인들에 의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중국 전국시대의 초나라 문인 굴원(屈原,기원전 343-278)은 임금에게 자신의 충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가 죽기 전 자신의 절개와 충성심을 표현했던 것이 바로 난초였다. 중국 동진의 서예가 왕휘지(王徽之)는 “이 사람(此君)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겠는가?”라며 대나무를 친구로 여기며 사랑했던 인물이다.

대나무 없는 곳에서는 잠도 잘 수 없어서 거처하는 곳에 대나무가 없으면 반드시 옮겨 심은 다음에야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고 한다. 국화를 사랑했던 대표적 인물은 귀거래(歸去來)의 주인공 도연명(陶淵明)이다. 조정의 관직과 복잡한 세상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도연명이 담장에 핀 국화를 꺾어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던 일은 수많은 문인들에게 은일의 상징으로 사랑받았다.

간밤의 빗소리에 떨어질 꽃잎을 걱정했던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은 해마다 이른 봄이 되면 나귀를 타고 아직 눈 녹지 않은 산속으로 매화를 찾아다녔다. 송나라 문인 임포(林逋)는 서호(西湖)에 은거한 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집 주변에 삼백여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기르며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아 평생을 지냈다.

사군자를 사랑했던 역대 문인들의 이러한 이야기(story)들은 훗날 문인화가 발전하는 북송대에 이르러 중요한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3. 사군자를 그리다

화훼화(花卉畵: 꽃그림)의 일원으로 그려지던 사군자는 북송대에 이르면 문인화의 대표적인 주제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대문호 소식(蘇軾)을 비롯한 북송대 문인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기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하며 그림에 내포된 의미와 상징을 중시하는 문인화의 이론을 마련했다. 그림의 본질은 대상의 외형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내면세계 또는 화가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군자의 상징성을 지닌 사군자는 문인들이 자신의 생각과 삶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 가장 유용한 소재였다. 특히 문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글씨의 필획과 사군자를 그리는 필획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더욱 문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사군자는 화려한 채색을 사용하는 것 보다는 먹으로만 그리는 수묵화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묵매, 묵란, 묵국, 묵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내용과 기법에서 모두 문인들에게 가장 적합했던 사군자는 문인화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4. 조선시대의 사군자 그림

4-a 국법으로 정한 1등 그림

국법으로 정한 1등 그림 고려 중기 이후 문인 귀족들에 의해 그려지던 사군자는 조선시대 더욱 크게 유행했다. 화원(畵員)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산수나 인물화 보다 대나무 그림이 더 중시 되었을 정도였다. 세종대왕과 문종(文宗), 안평대군의 3부자가 모두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탁월했고, 당대를 대표하는 화원화가인 안견(安堅)과 사대부 화가 강희안(姜希顏) 역시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다만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그 기량과 품격, 특징들을 확인할 수 없다. 몇몇 기록들을 통해 북송대 문인화풍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전통, 고려말 유입된 원나라의 문인화풍, 사행(使行) 등을 통해 접하게 된 최신의 명나라 문인화풍이 공존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4-b 조선의 모습으로 그려진 사군자

우리나라 사군자 그림의 전형은 조선중기에 확립되었다. 신숙주의 증손 신잠(申潛)은 대나무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고, 신사임당(申師任堂)은 화조화 뿐만 아니라 대나무 그림 역시 매우 잘 그렸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묵죽화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이정(李霆)은 굳세고 탄력 있는 필치와 독특한 화면 구성으로 조선 묵죽화의 전형을 이룩했고, 어몽룡(魚夢龍)은 간결한 구도와 담백한 필치로 조선 묵매화의 기틀을 확립했다.

이후 이정의 외손자인 김세록(金世祿) 등이 이정의 묵죽화풍을 계승하였지만 한계를 보였고, 조속(趙涑)과 그의 아들 조지운(趙之耘)이 어몽룡의 묵매화풍을 계승하며 세련미를 더했다.

4-c 문사의 아취와 시인의 풍류가 깃든 사군자 그림

조선후기에는 다양한 사군자 그림들이 그려졌다. 유덕장(柳德章)은 이정의 묵죽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여유롭고 윤택한 필치로 자연스러움을 배가시켰다. 조선후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심사정과 강세황에 의해 중국의 화보(畫譜)를 바탕으로 하는 사군자 그림들이 유행했다. 심사정은 회화성을 중시했고, 강세황은 문인 취향의 우아함을 강조하며 명나라 문인화풍의 영향을 반영한 사군자를 그렸다.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도(金弘道)는 사군자를 통해 시정과 흥취를 담아내며 서정성이 풍부한 작품을 다수 남겼고, 역관 출신 임희지(林熙之)는 거칠고 분방한 필치로 표현성이 강한 난죽화를 주로 그렸다.

4-d 서화일치의 품격과 망국대부의 자화상

사실성을 중시했던 조선후기 화단의 풍토 속에서 다소 침체되었던 사군자 그림은 조선말기에 들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그의 문도들이 있었다. 김정희는 그림에서 절제된 이념미와 서예적 필치를 강조했는데 묵란을 통해 그의 창작 이론을 실체적으로 구현해 보였다.

추사를 추종했던 조희룡(趙熙龍)은 추사의 묵란을 흡사하게 구사했지만, 매화와 대나무 그림에서는 자유분방한 필묵의 기교로 강렬한 시각적 감흥을 이끌어내며 추사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반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왕실의 엄중한 풍모와 당당한 기개를 바탕으로 스승인 추사의 묵란화를 계승하여 ‘석파란(石坡蘭)’이라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이룩했다. 가학(家學)을 통해 추사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계승한 민영익(閔泳翊)은 중국 상해에 망명하여 살면서 나라를 잃은 망국대부의 울분을 난죽화로 승화시켰다


청죽(晴竹: 맑은 날의 대) 신위(申緯, 1769〜1847), 지본수묵, 118.0×62.0cm

신위는 10세 무렵부터 시서화 삼절로 불릴 만큼 천부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입니다. 그래서 청년기인 정조대부터 이미 세간에 예명(藝名)이 오르내렸는데, 그중에서도 묵죽은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일컬어질 만큼 명성이 높았습니다. 신위의 초년시절 묵죽화 수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스승 강세황이었습니다. 14세의 연소한 나이에 70세의 강세황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신위는 강세황을 조선왕조 400년 동안 수묵 사생을 제대로 한 유일한 인물로 상찬하고, 죽석에 대해서만 배운 것이 한이라고 회고하고 있을 만큼 강세황을 존숭하였습니다.

이에 신위의 묵죽화에 강세황의 자취가 짙게 드리워진 작품이 적지 않은데, 예보(禮甫)라는 자(字)를 가진 인물을 위해 그려 준 묵죽도 그중 하나입니다. 길고 가는 죽간을 V자 형태로 벌려 공간을 분할한 화면 구성, 피마준을 위주로 하고 몇 개의 태점으로 처리한 바위 형태 등에서 강세황 묵죽화와 유사성이 감지되며, 윤택한 필치로 엄정하게 묘사한 댓잎의 양태와 바위 묘사도 강세황 노년기 묵죽화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댓잎의 묘사는 강세황보다 더 한층 날카롭고 강인하며 기세가 충만합니다.

오히려 강세황보다는 이정, 유덕장 계열의 묵죽화풍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신위가 단지 스승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대 묵죽화풍의 장처를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이처럼 신위는 조선 묵죽화의 전개에서 심사정, 강세황에 의해 시도되던 남종문인화풍 묵죽화 양식의 완성도를 높였고 동시에 청대묵죽화풍을 새로이 수용하여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이는 조선후기 묵죽화풍의 종언이자, 조선 말기 묵죽화풍의 선구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신위를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평가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묵죽(墨竹) 김진우(金振宇, 1883~1950), 지본수묵, 137.3×50.5cm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는 12세 어린나이에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문하에 들어가 항일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였으며 묵죽으로 항일의지를 표출한 당대 최고의 묵죽화가였습니다. 김진우는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국내로 들어오던 중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출옥 후에는 묵죽에 전념하여 서화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드높였고 이런 항일정신은 많은 민족지도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김진우의 묵죽은 일세를 울렸습니다. 이 그림은 김진우가 51세(1933년) 가을에 친 쌍폭의 대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진우 묵죽은 대 마디 사이의 줄기는 자로 잰듯 반듯하고 성글은 댓잎 덕분에 전체 대 줄기가 한 눈에 잡혀 막힘이 없습니다.

대는 화면 가운데 밑에서부터 올라와 휘지 않고 곧게 끝까지 갑니다.댓잎은 칼같이 날카롭고 대줄기는 창처럼 곧아 바람이 불면 쨍하고 울릴 것 같은데 이런 냉기 탱천함이 김진우 묵죽의 참된 모습입니다. 진정 묵죽으로 항일한 김진우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림입니다.

풍우죽(風雨竹: 비바람 맞은 대)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지본수묵, 135.0×57cm

묵란화와 더불어 민영익의 예명(藝名)을 더욱 빛내주는 분야가 있습니다. 묵죽화입니다. 묵란화에서 쌓은 명성에 비해서는 다소 뒤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묵죽화에서도 민영익의 예술적인 재능은 여전히 빛났습니다. 민영익이 묵죽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상해에 망명한 30대중반부터인 듯합니다.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처지로 이국에서 여생을 보내야만 했던 자신의 처지와 심회를 묵죽화로 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군자 중에서도 불변의 기개와 절조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소재인 대나무의 의미와 상징이 새삼 절실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망명전 조선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집이 죽동(竹洞)에 있었으니,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묵죽화를 통해 풀어내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면 중단에 바위를 배치하고, 그 주변에 대나무를 그려 넣은 전형적인 죽석도 형식입니다.

바위는 갈필과 윤필, 담묵과 농묵을 적절히 섞어가며 입체감과 질량감을 살렸습니다. 그 상하로 줄기 몇 개를 담묵으로 그려 넣고, 짙은 먹으로 댓잎을 베풀어 놓았습니다. 댓잎의 필세가 워낙 강렬해 바위나 대줄기는 부수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묵죽화 특유의 꼿꼿함이나 장쾌함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댓잎만으로도 강한 호소력과 진한 감동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합니다.

댓잎은 한결 같이 지면을 향해 쏟아져 내립니다. 굳센 기세로 보건대, 시든 모습은 아닙니다. 비바람에 쓸린 풍우죽(風雨竹)입니다. 군자의 기백은 살아있으나, 모진 세파를 만나 시달리는 대나무의 모습을 통해 이국땅에서 망명객으로 살아가야하는 회한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석죽(石竹: 돌과 대)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지본수묵, 30.0×44.6cm

강세황이 묵죽에 쏟은 관심과 열정은 남달랐습니다. 강세황은 만년에 ‘노죽(露竹)’이라는 호를 즐겨 썼고, 현전하는 노년기 작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묵죽입니다. 그런 점에서 묵죽은 강세황의 만년기 회화 세계를 대표하는 분야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석죽>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통활한 공간감을 중시하는 여유로운 화면 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세황은 “매화와 대나무를 그리는 데는 비어있는 듯하고 시원한 느낌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할 만큼 여유롭고 상쾌한 구성을 중시했습니다. 담박하고 소략한 공간 구성은 이런 강세황의 지론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윗부분이 잘린 듯한 형태의 전면의 대나무도 다소 특이하게 보이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화면 밖으로 유도하며 풍부한 공간감을 연출하는 데 한 몫하고 있습니다.

다소 엉성해 보일 정도로 여유로운 구성과는 달리, 대나무와 바위의 필치는 유려하면서도 엄정합니다. 우아한 정취를 중시하는 남종문인화풍의 토대 위에 조선 전통 화풍이 지니고 있는 굳센 미감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외적으로는 유연하지만 내적으로는 강경한 외유내강의 미감은 강세황 예술 세계의 핵심적 조형감각입니다. 이 <석죽>에서도 유감없이 잘 발휘되어 있습니다.

설죽(雪竹: 눈 맞은 대) 유덕장(柳德章, 1675~1756), 지본채색, 139.7×92.0cm

팔순을 일년 앞둔 묵죽 대가의 득의작입니다. 이 그림은 채색 설죽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대 그림에서 드문 경우입니다. 한겨울의 눈 쌓인 푸른 대나무는 추운 시기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의 생태를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초록 염료를 사용하여 착색 설죽을 탁월하게 그려냈습니다.

독폭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화폭이 가로로 넓어졌기 때문에 구성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8폭 중 하나로 제작되던 설죽과는 달리 왼쪽에 두 그루의 대를 더 배치하였습니다. 아울러 2개의 큼직한 바위로 두 무리의 대나무를 받치게 하였고 바위 아래의 눈 덮인 땅에는 풀 한포기를 더 그려 넣어서 여백을 채우는 동시에 오른쪽 풀과 어울리게 하였습니다. 초록의 대도 먹으로만 그릴 때처럼 농담을 달리하여 뒤의 대와 앞의 대를 구분하였고 눈 쌓인 댓잎의 표현도 이전의 어느 설죽보다도 더 자연스럽습니다. 댓잎들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원숙한 솜씨로 쳐내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생기가 흘러 달관의 경지가 느껴집니다.

눈 쌓인 바위는 윤곽선만 엷은 먹선으로 긋고 바위 표면은 비워두어서 눈 덮인 바위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설죽이나 연죽과 함께 자주 그려지는 풀들의 잎도 부드럽게 휘면서 눈을 이고 있습니다. 눈 쌓인 대밭의 정경을 여유와 생기를 담아 그렸는데 평생을 대 그림에 바친 노대가가 모든 역량을 집약하여 조선 대 그림의 손꼽히는 절품(絶品)을 만들었습니다

P.S.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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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학동 새벽 풍경 삼성궁 2011.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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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리산 청학동에서- 연차시음회2011.05.23

3.봄날 간다 – 최백호2011.05.27

Yundi Li (2010)Frederic Chopin

Andante spianato et Grande Polonaise Es Dur Op. 22

2 Comments

  1. 산성

    11/08/2015 at 09:45

    아직 제대로 다 읽지도 못했어요.
    이렇게 많은 자료,사장되면 아깝지 않겠습니까?
    조블에서 가장 파워플한 분이신데
    가만 계시지 말고 얼른 존속 운동에도 동참하시기를…
    기어이 한 말씀~

    흐르는 음악이 참 편안합니다.
    저는 핑크마티니로 더 열심히 들었어요.

       

  2. 참나무.

    11/08/2015 at 11:13

    안읽으셔도 됩니다 날도 더운데…
    내일 말복이면 더위도 사그러질테지요…

    솔직히 전 12월까지만 하고 블로그도 접을 생각으로
    옛글들 잠깐씩 짬내어 찾아보는 중이랍니다

    오늘 이 포스팅 역시…
    결혼식도 제 가족이어서…;;
    이런 시간도 있었구나…이러면서…
    그간 잘 놀았으니 별 후회도 없고요..;;

    핑크마티니…가끔 방송으로 들을 때마다 산성님 생각이난답니다
    전 랑랑보다 윤디 리 꽈라서…앞으로도 기억해주시길~~

    지금 찾아가볼게요~~
    끝까지 포기않고 동참 권하셔서 강고집 꺾습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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