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8 (목)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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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은 마종기 시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시입니다. 조용필이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로 불러 더욱 친숙합니다. 마종기 시인의 산문집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에는 삶과 죽음으로 헤어지면서 이 시를 주고받은 부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폐암으로 죽어가던 남편이 "언제 한번 시간 날 때 읽어보라"며 이 시를 종이에 적어 아내 손에 쥐여줬습니다. 하지만 오랜 병간호에 지친 아내는 무심히 치워뒀다가 남편이 세상을 뜬 뒤 유품을 정리하면서 비로소 시가 적힌 쪽지를 펼쳐 듭니다. 시를 읽은 아내는 울었습니다. 그리고 마종기 시인의 주소를 수소문 끝에 알아내 시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시가 죽은 내 남편을 내 옆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나는 그가 그리울 때면 늘 이 시를 읽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다가도 내 남편은 내 옆에 다시 와 줍니다. 그리고 나직하게 이 시를 내게 읽어 줍니다. 이 시가 나를 아직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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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을 처음 읽었을 때, 저도 이 부부처럼 이승과 저승으로 헤어져도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노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마종기 시인을 만나 이 시를 쓰게 된 이유를 물었다가 뜻밖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시인은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연루돼 조사를 받고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아동문학가 마해송)가 1966년 세상을 떠날 때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고 합니다.그런 회한을 품고 살았지만 미국에서는 의사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러다가 영영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 시를 쓰게 됐답니다. 그러니까 이 시에 나오는 바람은 조국을 떠나 타국 땅을 떠도는 시인 자신이고, 바람의 말은 고향의 그리운 이들과 이별한 채 살아가는 자신의 심경에 대한 토로인 것이지요. 자신은 비록 먼 미국 땅에 있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라며 "부디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시는 시인을 떠나 읽은 이의 마음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마종기 시인은 이 시가 사랑시로 읽히는 것에 대해 "시가 가지는 의미의 다양성이 다이아몬드처럼 시를 빛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게도 영원히 곁에서 지켜주고 싶은 이들이 있습니다. 훗날 제가 떠나더라도 바람이 불 때마다 그들이 저를 곁에 있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습니다.

출처 :[김태훈의 알콩달콩 詩] 그가 그리울 때마다 이 시를 읽습니다2015. 10. 8 (목)

Renaud Capuçon – Brahms – Double Concerto, Op 102 – Chung

8 Comments

  1. 바위

    08/10/2015 at 07:37

    갑자기 떠난다는 제목을 보고 놀랐습니다.
    요즘 조블이 폐쇄 된다니 많은 분들이 떠나는데,
    참나무 님 마저 떠나시나 해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제야 놀란 가슴 쓸어내립니다.ㅎㅎ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2. 참나무.

    08/10/2015 at 12:43

    그러게요…가끔 운영자들이 낚시성 제목으로 바꿔서 올려주기도 하지만
    (더러는 글 내용 속속들이 안읽었구나…할 때도 있었고요.
    그분들은 또 얼마나 바쁘겠는지…하며 그냥 넘어가지만…ㅎㅎ)

    근데 오늘 제목은 오해하기 쉽게 대문에까지 실렸네요…쯧…
    급히 올리고 나가느라 좀 전에야 확인했네요- 오늘 좀 많이 바빴거든요.

    ( 12월까지 머문다고 몇 번 말했는데 …
    naver 주소 잠깐 올린적도있지만 이번 일로 만든 건 아니고
    예전에 청담 카페가 naver여서 그 때 잠깐 만든거라…

    백업하라 난리지만 씰데없는 게시물이 많아 지우기도 보통일이 아니어서…;;
    생각없이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고있네요 )
       

  3. 바위

    08/10/2015 at 12:55

    조용필의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은 저도 좋아하는 노랩니다.
    작곡자 김희갑 씨의 부인 양인자 씨가 작사를 했었지요.
    (작곡자에 대한 전, 후 부인들의 얘기는 좀 알지만 생략합니다.)

    덕분에 브람스의 음악까지 감상해서 행운입니다.
    정명훈 씨의 지휘를 오랜만에 봅니다.
    괜찮은 지휘자를 도와야 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쪼잔할까요.
    정치하는 인간들은 그렇게 국고를 축내면서
    좋은 지휘자 대우 좀 잘 해주었다고 난리니 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4. 참나무.

    08/10/2015 at 14:51

    네 김희갑 양인자 작곡 작사 좋은 가요들 몇 곡있지요

    정명훈 사태…정말 부끄러운…우리나라 문화계 수치지요

    내한한 적도 있는 카퓌송 형제들도 주시하시고요~~
    당밤음 내내 듣고있었어요…
       

  5. 睿元예원

    09/10/2015 at 05:19

    저도 놀랐습니다.
    문이 닫히는 날까지 함께 건강하게 지내시길요.~~~   

  6. 참나무.

    09/10/2015 at 09:50

    그러게요…영자씨가 좀 심심하셨나봐요- 제가 맨맨한지…ㅎㅎ

    전 이별타령하는 사람들 별로 안좋아합니다 사실은…
    갈 때가더라도… 왜 난리들인지…

    그대로 있다가 자폭할 생각인데…
    글쎄 맘이 변할 진 잘 모르겠고요
    -사람 일이란 게 확실한 게 뭐가있겠는지요…;;
       

  7. 雲丁

    12/10/2015 at 01:34

    참나무님과 친근하게 오가는 사이는 아니지만, 제목에서
    싸늘함을 느껴 들어왔어요. 날이 추워가는 시점이라선가봐요.
    참나무님 안내로 천사이셨다는 아픔이 배여드는 겨울비님 소식도 접하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8. 참나무.

    12/10/2015 at 01:53

    제 성격상 저런 제목은 절대 못올리는데…
    그냥 [마종기 시인- 바람의 말] 할걸 그랬지요…;;

    운정님…사실은 제 딸아이 실명과 같아(한자는 틀리지만)
    가끔은 놀래곤한답니다 – 조블엔 또다른 운정님이 한 분 더 계시지요…

    저도 답글은 못남겨도 아침숲향 님 포스팅 자주 읽습니다
    최연숙 시인이시지요…
    연제였나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서도 최연숙 시인의 시를 본 듯해서
    혹시 조블 아침숲향 운정인이실까 한 번 문의하고싶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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