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의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시로 빵을 구울 수 있다’
– 송찬호 시집 ‘붉은 눈, 동백’
– 2000년 김수영문학상, 동서문학상 수상작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두 단락 때문에 …
데레사
14/01/2016 at 08:34
시로 빵을 구울수 있다구요?
시인들의 감성은 남다른것 같아요.
오늘도 좋은 아침.
행복하세요.
참나무.
14/01/2016 at 09:35
위블 답글창 수정, 링크까지 되는 건 좋은데
행간 조절이 불가하여 行에도 목숨건다는 시인들께
결례일 것같아 답글에 올렸던 시 제대로 올려볼 겸
음원 test중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 능력으로는 사이즈 조절도 안되고
흔적없이 음악만 곧바로 들리는 것도 안되네요
오늘 아침에도 내내 연습했지만…
긴 여행 앞두고 준비한 선물들
빠짐없이 챙기시길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