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하게 보낸 하루

아침으로 죽을 끓일 때가 많습니다. 어렵게 끓이진 않습니다. 옛날 정통 방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간편하게 팥, 녹두, 땅콩, 완두, 등등을 푹 삶아 믹서에 곱게 갈아 한 번 먹을 양 만큼 소량 포장 후 냉동 보관해뒀다가 미리 씻어 불려놓은 쌀로 알맞게 죽이 되기 직전에 한 봉지씩 넣지요. 녹두죽은 감기가 왔을 때 열이 날 때 좋고 팥죽은 가끔 새알심을 넣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추운 날은 찬밥으로 간편하게 경상도식 김칫국밥을 끓이기도 하고 입맛 없을 때, 술 먹고 온 다음날은  콩나물죽도  끓이지만 제일 싫증안나고 맨맨한 게 누룽지 죽입니다.  찬 밥 남아도 전혀 걱정없지요.  누룽지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뒀다 금방 끓이면 되거든요.  오래 전엔  토스터나 시리얼  계란 후라이로 더 간편하게 한 적도 있지만 남편이 언제부터인지 위장이 좋질않아  가급적 피합니다.

갑자기 죽 이야길 왜 하냐면 이상하게 죽 끓일 때마다 이진명 시인이 생각나곤 했는데 – 아마 그녀의 시 죽 집을 냈으면 한다.  때문인지…요즘은… 엄밀히 말하면 겨울비 님 타계 이후엔 덩달아 그녀까지 생각 나는 겁니다.  사카에서 청담시인과의 만남  제1회  초대 시인도 이진명시인었지요.  사실은 청담이란 이름도 그녀의 시 제목입니다.  오늘은 이상하게 그녀의 시집까지 모두 꺼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윤 잘 모르지만 겨울비 하면 또 가깝게 지내던 (‘아주’를 넣어야겠지요) 손풍금님이 덩달아 떠올라서… 내일 모래 그녀를 우리 동네에서 만나기로 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겨울비님 이야기  아니나올 수 없겠지요.

(… ….)

고대 영안실에도 황인숙 시인 이 현 화백과 같이 다녀가시고,김사인 시인은 혼자 다녀가셨다지요. 지금 생각하면 시집 한 권도 내지 않고 오로지 시 사랑만 하다 간 그녀는 어쩌면 행복한 여인 같기도 합니다. 오늘 아무 데도 안 가고 * 詩詩하게 보낸 하루여서 시집 꺼낸 김에 시 몇 수만 남겨두려구요.

*이진명 시인이 청담 모임에서 했던 말, 이후 가끔 쓰는


시낭독회 1.jpg

2009. 3.16  월: 제1회 청담, 시인과의 만남에서

002

청담(淸談)             이진명

   조용하여라. 한낮에 나무들 입 비비는 소리는. 마당가에 떨어지는 그 말씀들의 잔기침. 세상은 높아라. 하늘은 눈이 시려라. 계단을 내려 오는 내 조그만 애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때처럼. 눈시울이 붉어라. 萬象이 흘러가고 萬象이 흘러오고. 조용하여라. 한 해만 살다 가는 꽃들. 허리 아파라. 몸 아파라. 물가로 불려가는 풀꽃의 헤진 색깔들. 산을 오르며 사람들은 빈 그루터기에 앉아 쉬리라. 유리 병마다 가득 울리는 소리를 채우리라. 한개비 담배로 이승의 오지 않는 꿈, 땅의 糧食을 이야기하리라. 萬象이 흘러가고 萬象이 흘러 오고.

cd

이진명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1992년

 

003

 

단 한 사람 – 이진명

가스레인지 위에 두툼하게 넘친
찌개국물이 일주일째 마르고 있다
내 눈은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내 입도, 내 손도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별일이 아니기에,
별일이 아니기도 해야 하기에
코도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그동안 할 만큼 하더니 남처럼 스치고 있다

가스레인지 위에 눌어붙은 찌개국물을
자기 일처럼 깨끗이 닦아줄 사람은
언제나처럼 단 한 사람

어젯날에도 그랬고 내일날에도 역시 그럴
너라는 나, 한 사람
우리 지구에는 수십 억 인구가 산다는데
단 한 사람인 그는
그 나는
별일까
진흙일까

– 이진명 시집 ‘단 한 사람’  열림원, 2004

가스레인지 주변 닦을 때는
단 한 사람도 떠오르지요.


005

 

그 집에 누가 사나         이진명

그 집에 누가 사나
내가 사나
내 외로운 마음이 수족을 움직여
식기를 씻고 사나
그토록 기척 없다니
이슬비 벌써 반나절인데
지우산을 쓰고
오늘도 올라가본 언덕 아래
지붕도 방문도 마당도 대문도
숨죽인 옛 영화의 먼 화면만 같네
방문 열릴 것만 같아
마당의 흰 빨래들 홀홀 걷어들일 것만 같아
그 집에 누가 사나
거울 속에도 이슬비가 내리고
눕고 일어나고 걸어다니는 한 형상
긴 치마를 끌고
차를 끓이는 노부인이랄지
미망인이랄지
그 집엔 꼭 그런 형상이 살리
지우산에 이슬비 받은 지 오래
하루가 가네
기다려도 하루만 가네
조용할 그 부인의 거동 볼 수 없네
기다리는 마음이 지우산을 접고
이슬비 속을 내려
대문의 고리를 따지
어느새 안에서 방문을 열고 나와 가엾은
마당의 흰 빨래들을 걷어들이지
다시 옛 영화의 먼 화면처럼 숨죽이는 그 집에
누가 사나
내가 사나 내 외로운 마음이
손등에 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라
한차례 지우산을 흔들며 사나

이진명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겨울비님이 왜 이진명 시인을
많이 좋아했는지 알겠더라구요

여행         이진명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여자도 첫키스도 첫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번 똑딱 한 그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첫밤, 첫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을 터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을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빛줄기인 줄은

없었다. 그 이후론
책상도 의자도 걸어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날짜들을 스쳐서
그 날짜들의 어두운 경험과
홀로 여닫기던 말의 문마다 못을 치고 이제
여행을 떠나려 한다
흔들리지 못하던 나날들의 가슴에 금을 그으면
놀라워라. 그래도 한 곳이 찢어지며
시계점처럼 탱 탱 탱 피가 흐른다

보고 싶은 만큼, 부르고 싶은 만큼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은 만큼
흔들림의 큰 소리 넓은 땅
그곳으로 여행 가려는 나는
때로 가슴이 모자라 충돌의 어지러움과
대가지 못한 시간에 시달릴지라도
멍텅구리 빈 소리의 시계추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여행을 돌라오는 것이라 자꾸 틀린 말을 하더라도

시집 : 밤에 용서라는 말들 들었다. 민음사  1992

 

004

P.S:

겨울비 대신 가을비

001

세워진 사람 창비. 285 이진명 시집  9p.2008 3.20 초판

시에 나오는 지명들 다 아는 곳이다.
‘까르멜 수녀원’ 원장수녀는 사촌고모셨다
유일한 외부 수녀님이어서
계란 메주같은 거 자주 사기도 했던

  ‘http://cafe.naver.com/poemes.cafe <– naver 청담 카페

2 Comments

  1. 손풍금

    29/02/2016 at 08:06

    오랜만에 새벽에 컴퓨터 앞에 앉았어요. 낯선 장소가 익숙한 장소로 바꼈네요.^^
    성수동 순례길. 촌사람이 서울사람 되어서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무엇이 그리 허전했던지 눈가가 촉촉히 젖었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이 좋은 사람이 가고 없는데 눈은 또 어찌 그리 예쁘게 내리던지요.
    차 마시는 시간이 좋았어요. 언니^^
    오늘 이진명 시인의 시집을 가방에 담고 시장에 나갑니다.
    언제나 늘 감사한 참나무 언니^^

  2. 참나무.

    29/02/2016 at 11:30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위블 글쓰기 많이 힘들었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름다운 흔적은 맘에 다 담아뒀어요
    손풍금 덕분에 저는 더 행복합니다.
    이제 3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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