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설 때 계획:
1.예배 2.Lotus coffee 3.인사동 선갤러리 4.라메르갤러리 5.아라아트센터–>집으로
집 떠난 후 바뀐…
1.
설교 시간 졸 때가 많았는데- 아이구 잡혀갈라…^^
새로 부임한 목사님 말씀은 기다려진다.
가끔은 문학이나 철학 강의 듣는 것 같기도 하고 고품격 농담도 참 잘 하시는데 대부분 신도들은 경직되어 있어서 재즈 들으며 차렷 자세로 듣는 관중들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새로 부임하신 채수일 목사님 프란치스코 교황님 방한 때 대표로 편지드리는 소임을 맡으시고 어제 일부 소개하셨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다. 카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언제 전문을 소개하고플 정도로 -프란치스코 교황님 영화가 상영된다는데 알아볼 일이다.
2.
스푼 때문에 감동먹은 날(금지된 커피여서 더더욱)
3.
불발 -언제부터 일요일이 휴일이었을까?
단색화 그리는 귀한 여류화가인데…다른 날 다시 잡아야지
4.
동백…사진촬영 금지라 할 말 없음.
대신 같은 건물 3층: 한국여성미술작가회, 처외삼촌 산소 벌초하듯 휘리릭 ~~
인사동 네거리 갤러리 미술세계 특별기획 2016 한국미술의 오늘전 -100人 안보고 온 거 후회막급, 그러나 다시 되돌아 갈 기분도 아니고 체력도 바닥이라
아라아트센터로 가는 지름길, 인사동 가면 인사하고 가는 회화나무
지푸라기 옷-이름이 뭐더라?
겨울동안 벌레 모아 봄에 태우는 거?
그리고 아라아트센터 강찬욱 개인전
누구처럼 눈물흘리진 않았지만 히말라야 정기와 작가의 강한 氣를 흠뻑 받아서인지 집으로 곧바로 올 계획 접고…교보문고까기 가기로 맘 바꾸고
아라아트센터 근처 동산방 화랑도 들리고 예성화랑 그리트 다시 보고싶었는데 불행히도 휴일…
이제 인사동도 강남처럼 주일은 휴일인 화랑들이 많아졌다.
새로 형성된 청진타운(?) 뒷길 청진옥 무슨 행사 중일까. 점심시간 많이 지났는데도 줄이 길기고 하다?
횡단보도 건너기 직전 화이트데이구나 발렌타인 데이 선물 받은 분들 사탕준비하시고오~~
# 예기치 못한 일
궁금하여 언제부터 한 번 가볼 예정이었는데 어제 다녀왔다.
광화문 교보문고 서점 내부에 새로 생긴 교보아트스페이스
3월기획전- 매화문기:
故이대원, 송영방, 박항률,최한동, 이 인, 김성복,
오관진, 오만철, 이이남, 성태진, 성영록, 김준식
12분의 작품들이 무료로 개방되어있다.
광화문 교보 가시면 들러보시길…
성태진- 너무 서두르지 마 /목판에 조각 후 아크릴채색
오만철-반추/ 백자도판
좁은 공간을 벽으로 잘 분활하여 시민들의 쉼터로 마련 한 건 좋은 데 아래 작품은 정면에서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잘 담을려면 유리벽을 뚫고 나가야하는데 잘은 몰라도 바깥에서 보기좋으라도 일부러 위치 선정을 하지않았을까~도 싶었고.
오관진: 비움과 채움 (복두꺼비) 150 x 150 한지에 혼합재료
할 수없이 집에와서 팜플렛으로 . . .
김성복: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 / 스테인레스 스틸에 아크릴채색
교보 바닥엔 매화로 장식된 조각이 마치 매화향을 뿌리는 듯 달리고 있었다.
책 살 게 있어서 일부러 갔는데 줄이 길기도 하였다
오른쪽 바로받기는 줄이 짧아 물어봤다
인터넷으로 주문 후 1시간 안에 곧바로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란다
언제 생겼을까…인터넷 구매 마일리지 혜택도 못받고
그냥 정가대로 사서 아깝지 말입니다
어제 교보 주일이라 사람들 참 많았다.
등단 50주년 기념소설집: 김원일 -비단길
하필 이 분 옆자리에 앉게 되어 퍼떡 담 주일 사인받을 생각으로
위치를 몰라 검색하니 소설 J-1 제일 안쪽이었다
역시 집 떠날 땐 계획에 없었던 예기치 못한일.
라 크리모사- 아르농쿠르 추모 연주 들으며…
아참~ 영화 동주(2015) 이후…
윤동주 열풍 직접 확인- 반갑고 눈물겹고…
데레사
14/03/2016 at 12:15
나는 참나무님 활동력이 부러워요.
요즘 허리가 시원치 않아서 많이 못 걷거든요.
남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종합병원이라… ㅋ
참나무.
14/03/2016 at 15:16
방콕하려다 무리하여 나갔는데
좋은 그림보며 기운을 얻은 것같네요
데레사님은 운동 꾸준히 하시고 중국어 공부에다…
관리 잘 하고계시잖아요- 바둑 중계방송까지…^^
친구분들이 데레사님 많이 부러워하실걸요
저는 나이값 못하고 하나에 꽂히면
통제가 잘 안되어 무리하는 병이 있답니다^^
홍도토리
14/03/2016 at 18:32
참말로 대단하셔요.
남들 일주일은 걸려야할 동선을 하루 한나절에 휘리릭 다녀오시다니요!!
그나저나 청진옥에선 뭣때문에 길게 줄을 섰대요..?
(호기심 천국..)^^*
참나무.
14/03/2016 at 22:42
제가 인사동 근처는 자주 다니니
최단거리 길도 잘 알고있고
아직은 걷는 거 좋아하고 그래서일겁니다.
저도 사실은 궁금해서 가차운 거리면 물어보고싶었고요
청진옥 근처가 예전 피맛골 일대여서
한 번 마스터해야겠다…하고있지요
참나무.
17/03/2016 at 12:54
1.
지난 2014년 8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즈음하여 한국의 개신교계를 대표하여 글을 써달라는 천주교회의 부탁을 받고 제가 편지형태로 쓴 글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교황님의 올 해 방한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셨고, 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위해 두 번째 방한한 후, 25년 만에 이루어진 세 번째가 되는 셈입니다. 이번 방한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124위 시복시성이 주목적이지만, 꽃동네를 방문하고 평화와 화해의 미사를 드리는 것도 계획되어 있습니다. 방한 그 자체도 큰 의미가 있지만 교황님의 이번 방한이 특별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교황님의 즉위 후 보여주시고 행동하신 교황님의 파격적인 모습이 가톨릭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전 인류에게 큰 충격과 도전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황제가 아니니 교황이라고 부르지 말고 교종이라고 호칭할 것, 해방신학자 보프의 복권, 사생아에게도 세례를 허용한 일, 동성애, 이혼, 낙태에 대해 교회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 시리아에 대한 군사개입 반대와 시리아를 위한 기도의 날 선포, 아르헨티나 신자들이 로마에서 열리는 즉위식에 오려고 하자 축하미사에 오는 대신 여행비를 자선단체에 기부해달라고 당부한 일,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수 천 명 의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와 운전자들을 축복한 일, 바티칸 은행 개혁, 팔레스타인 분리장벽에서의 기도 등 가톨릭교회만이 아니라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신 교황님은 선출된 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나같이 모자란 놈을 교황이라고 뽑아준 분들을 주님께서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교황님은 풍부한 유머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셨습니다. 즉위식이 있기까지 일반 사제관에서 머물면서 평범하고 소박한 생활을 해서 놀라게 하신 교황님은 뛰어난 요리솜씨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막시모 신학교 시절 요리사가 없는 주일에는 학생들을 위해 요리를 하셨는데, 요리 실력이 좋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글쎄요. 아직까지 아무도 제가 만든 음식을 먹고 죽거나 탈이 난 사람은 없네요.’라고 답변하셨지요. 사제독신제 폐지라는 매우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교황님은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열린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사제독신제 폐지가 현재의 사제 부족 문제를 완화시킬 수 있을 만큼 사제 희망자 수를 증가시켜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한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제독신제가 폐지될 경우 더 이상 혼자 있지 않아도 되고 부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경우 부인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보너스로 장모님도 얻게 되겠지요.’
제 경험에 유머는 자신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사랑을 최고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가장 극악한 죄는 증오라고 해야겠지만, 저는 증오보다 오만함을 가장 혐오합니다. 오만이란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만이 유머를 할 수 있지요. 교황님의 파격적인 행동은 교황의 권위를 스스로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은 권위를 다르게 이해하고 계십니다. 원래 ‘권위’(Autoridad)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장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억압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억압이라는 것은 권위의 변형된 형태일 뿐이며 만약 제대로 권위가 행사된다면 인간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권위를 가진 자란 바로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해내는 능력을 갖춘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권위, 특히 종교인과 정치인의 권위가 위장된 억압의 수단으로 전락한 오늘의 현실에서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교황님의 이번 방한이 아시아의 청년들과 상처받은 한국사회, 특별히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족에게 희망을 주시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주님의 가장 작은 종 채수일 올림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적인 행동 가운데 제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그가 교황이 된 후 로마 근교의 청소년 교도소를 방문하여, 한 무슬림 여성 수감자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교황은 2천년 가톨릭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 아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입니다. 여자의 발을, 그것도 무슬림 여성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오늘의 복음서 말씀도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은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마가와 마태는 유월절 직전,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예수님께서 계실 때, 일어난 사건으로 보도하면서 그 여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요한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삼 백 데나리온의 값에 해당하는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여인이 나사로와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임을 밝힙니다.
나병환자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부정을 탄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접촉을 꺼렸습니다. 나병환자는 멀리서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큰 소리로 외쳐 그들이 자신을 피해가도록 해야 했습니다. 나병환자와의 접촉 자체가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던 사회에서 예수께서 나병환자의 집에 들어간 것도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그 집에서 식사를 하신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던 대제사장들은 이 사건 후 예수님만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요한 12,10).
3.
그런데 마가와 마태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보도하고, 요한은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합니다. 머리에 향유를 바르는 행위는 왕과 제사장에게 허용된 전통임을 생각하면, 이 여인의 행위는 십자가 죽임을 당하실 예수님을 왕적 메시아로 승인하는 상징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은 무슨 상징행위일까요? 하인이나 종이 주인이나 손님의 신발 끈을 풀고 신발을 벗긴 후, 먼지 뭍은 발을 씻어주는 유대 사회의 풍습은 환대의 표시였습니다(창 18,4; 19,2; 24,32).
그리고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최대의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콘텍스트에서 보도하는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여인은 ‘죄인’인데, ‘예수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누가 7,36-50)고 합니다.
4.
그런데 몇몇 사람들 혹은 제자들이 이 모습을 보고 화를 내며 분개했다고 합니다. 다만 요한복음은 이스카리옷 유다가 화를 내거나 분개하지 않고 매우 ‘쿨’하게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요한 12,5). 삼 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일 년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니 큰 돈 인 것이 분명합니다. 유다의 반응이 아주 ‘쿨’한 것은 ‘그가 도둑이어서 돈 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요한 12,6)고 요한은 부연설명 하지만, 사실 제자들의 이런 계산은 이성적이고, 제자들의 분개는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과연 제자들이 분개한 것은 마리아가 즉흥적으로 큰돈을 낭비를 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분개하게 한 것은, 마리아가, 한 죄인 여자가,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악령과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고침을 받은 한 추한 여자가(누가 8,2) 남자 선생인 예수님의 발을 씻고 향유를 바르고 자기 머리털로 닦는 행위였습니다. 선생님의 발을 씻는 행위는 오직 남자 수제자가 할 수 있는 일인데, 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그것도 머리를 풀고 예수님의 발을 닦는 것이 그들을 크게 당황스럽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와 이슬람 전통에서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는 것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래 여성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머리를 푸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더군다나 그 푼 머리로 남자 선생님의 발을 닦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마리아는 이 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한 마르다가 손님 접대 준비에 분주한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마르다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손님 접대에 바쁜 언니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예수님에게 찾아가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누가 10,40)라고 항의합니다. 마르다가 정말 동생이 자기를 도아주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동생 마리아는 일곱 악령에 사로잡혀 시달렸던 병약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여동생이 음식 장만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예수님에게 불평할 언니가 아닙니다. 정말 그랬다면 마르다는 예수님이 아니고 마리아 자신에게 불평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마르다를 놀라게 한 것은 동생 마리아가 남자 수석 제자가 앉을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선생의 발 곁에서부터 남자 제자들이 순위에 따라 앉는 것이 유대 전통이고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그런 전통과 관습을 깬 것이지요.
5.
그렇다면 마리아는 왜 전통과 관습의 장벽을 부수고, 남자 제자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행동을 했을까요?
누가복음서는 그 녀가 ‘많은 죄를 용서받았으며,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고 전합니다(누가 7,47). 그렇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견고한 장벽 같은 유대사회의 율법과 관습을 파기하는 행위, 그것이 자칫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사람은 ‘지나 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 일을 생각하지 말라’(이사야 43,18)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새 일을 시작하려고 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갑니다’(빌 3,13-14).
그런데 예수님은 당황하면서 분개한 제자들에게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요 12,8)고 말씀하십니다. 평생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아온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자선을 폄하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오직 타자를 위해 살아오신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자기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예를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오직 마리아만이 예견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 번이나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희망으로 자리다툼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하여 자신을 낭비해야 한다는 것, 곧 십자가의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 마리아는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이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가 14,9; 마태 26,13)는 복을 받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아마 이 여인이 받은 복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사랑으로 크게 낭비했기 때문입니다.
나치의 박해를 받아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저서가 불태워지는 수모를 당해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신학자 파울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이 이야기의 주제를 ‘거룩한 낭비’(Holy Waste)라고 했습니다.
‘소비는 미덕이다’고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소비를 권장하는 국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낭비는 미덕이 아닙니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에게 낭비는 죄악입니다. 부지런함과 절제를 미덕이자 신앙인의 생활 태도로 이해하는 그리스도교에게 낭비는 거룩한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파울 틸리히는 ‘거룩한 낭비’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합리성의 한계 안에 갇힌 종교는 온전하지 못한 종교이며, 타산적인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고 하면서, ‘개신교는 성인들과 신비주의자들의 낭비적 자기포기를 상실함으로써, 아주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낭비처럼 보이는 행동의 한 가운데서 나타날지도 모를 창조적 순간을 향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열어놓으라고’ 권면합니다.
6.
그렇다면 무엇이, 어떤 행동이 ‘거룩한 낭비’일까요?
시간은 돈이라는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 안되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거룩한 낭비는 행동의 결과에 대한 기대나 효과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동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행동입니다. 합리적으로 계산된 행동, 결과와 성과에 대한 동기와 기대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합리성과 제도의 한계를 넘어선 계산되지 않은 자기희생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일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거룩한 낭비는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일’(마태 26,10; 마가 14,6)이라고 한 행동입니다. 마리아처럼 사랑에 미치지 않고는 미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낭비입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하며, 봉헌하고, 상처받고 고통 받는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며,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주차를 돕고, 노약자와 장애우들이 장애받지 않고 예배당에 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선한 이웃 클리닉에서 외국인 환우들을 치유하는 일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장학금을 출연하여 어려운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녀 손자들과 함께 앉아 옛 날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이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 아니 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렇게 두려움 없이 자신을 거룩하게 낭비한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 왔습니다. 우리 경동교회가 거룩한 낭비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