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건반 위의 음유시인 ‘머레이 페라이어’- 글:김주영

머레이 페라이어 피아노 리사이틀

– 글: 김주영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 이미지 1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의 끝없는 탐구

 피아니스트에게 연주할 레퍼토리를 선정하는 일은 가슴이 설렐 만큼 기대되는 순간이자 고통스런 과정이기도 하다. 연주자로서의 순수한 의욕과 자신의 능력, 청중의 호응도, 추구하려는 예술성의 방향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처럼 부푼 마음으로 악보를 구해놓고 연습을 하다가 ‘엎어진’ 경험은, 피아니스트라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는 일이다. 심사숙고한 프로그램 선정에 이은 두 번째 난관은 내게 가장 잘 맞는 작품의 에디션을 결정하는 일이다.

스승들과 선배들의 경험이나 악보 자체의 권위 등도 중요하지만, 보는 순간 내 눈에 쏙 들어오는 인연과도 같은 에디션이 존재한다는 개인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특히 낭만 이전, 즉 고전파와 바로크 레퍼토리에 있어서 연주자의 부족한 부분을 일깨워주고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줄 악보의 편집자를 만나는 일은 연주만큼이나 중대하다. 

매번 경이로운 연주자 머레이 페라이어

 그런 면에서 몇 년 전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머레이 페라이어 판’ 베토벤 소나타(헨레)는 내게 큰 관심거리였다. 뛰어난 연주력을 지닌 현역의 작업이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경이적인 운지법(손가락번호 사용)의 비밀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이유가 컸다.

몇 년 전 지면 인터뷰를 통해 특유의 매끄러운 손놀림과 연관된 운지법의 요령에 대해 물었으나, 그는 ‘특별한 것이 없다’며 자신의 방법을 공개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적어도 내게 그의 베토벤 에디션은 만점에 가깝다. 합리적이고 편리한 운지법은 물론이요, 일목요연한 악상 정리까지 페라이어의 깔끔한 연주를 연상시키는 악보들이다.

참으로 손이 많이 가고 신경 쓸 것이 많은 악보 편집, 연주와 연습으로 바쁜 와중에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머레이 페라이어는 정말 부지런한 음악가다. 창의력과 예술성의 성장과 별개로, 기능적 훈련만으로도 늘 고3학생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피아니스트의 운명이다.

물론 ‘성실성’ 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 연주자들의 또 다른 고민인데, 페라이어는 매번 이루어지는 내한 공연마다 경이적인 새로움으로 우리를 놀라게 해 준다는 면에서 존경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  [바흐 bach Suite No. 5 in G major BWV 816],
    페라이어는 최근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바흐 프랑스 모음곡’을 발매했다.
청중과의 원활한 호흡을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변신해야 하는 것이 무대 위 연주자들이지만, 페라이어의 경우는 그것을 ‘변신’, 혹은 ‘변화’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모자라며, 오히려 일종의 ‘궤도 수정’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런 경험과 연륜의 증가, 연주자의 기능적인 감가상각 등에서 나타나는 변모들과 별개로, 페라이어는 매번 새로운 경지를 찾아나서고 있다는 뜻이다. 몇 번에 걸친 손가락 부상,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겪을 수 밖에 없는 체력적인 부담 등을 안고 시도하는 환골탈태는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들을 흥분시킨다.

페라이어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언급하는 앨범이 1997년 발표된 헨델과 스카를라티의 작품집이다. 여기서 그는 이전까지의 피아니즘과 사뭇 다른 자세로 팬들을 놀라게 하는데, 수채화같은 톤과 촘촘하게 다져져 거친 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음의 겉 표면에 적당히 인간적인 ‘손때’가 느껴지는 연주를 선보였던 것이다.

마냥 예쁘고 새초롬하기만 했던 그의 스타일에 새로운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은 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됐던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1번과 ‘크라이슬레리아나’에서도 비슷했는데, 경쾌한 속주 사이에 드문드문 느껴지는 슈만의 단말마적 호흡과 그 고뇌는 ‘완벽’ 만을 추구하던 페라이어가 음악 전반을 바라보는 시각에 새로운 지평이 마련됐다는 확신을 가지게 해주었던 기억이다.

 크고 위대한 베토벤의 세계로
 
머레이 페라이어 이미지 2 

그 후 그가 천착하기 시작했던 일련의 바흐 음악들은 관조적인 성격이 지배적이었다. 손 부상에서 본격적인 회복을 알림과 동시에 슬럼프를 극복하고자 자신을 단련했던 바흐의 레퍼토리들에서 느껴지는 달관은 커다란 고비를 겪고 돌아온 인간이 신에게 보내는 감사함 그 자체였다.

세기가 바뀌며 발표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기분좋은 기름기가 전면을 유려하게 감싸며 연출된 마스터피스였고, 의외의 비르투오시티가 전면에 부각된 건반악기 협주곡집은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더 필즈(ASMF)를 순발력있게 이끄는 솜씨마저 돋보였다.

그 후 발표된 파르티타 여섯 곡의 연주도 잊을 수 없는데, 유창한 흐름 속에 나타나는 뚜렷한 음영의 표현은 페라이어가 바흐의 텍스트에 얼마나 긴 시간을 집착에 가깝도록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2002년 녹음의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집이 피아니스트가 상상할 수 있는 환상성의 폭을 실험하는 무대였다면 비슷한 시기 발표된 쇼팽의 에튀드는 그 영감을 실현할 수 있는 기능적 가능성을 슬쩍 엿보는 시도였다고도 보여진다. 아마도 페라이어가 긴 호흡으로 목표 삼고 있을 베토벤에 대한 탐구는 앞서 언급한 악보의 분석과 함께 60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2008년 베토벤의 초기와 중기 소나타 네 곡의 우아한 연주는 그의 탐험이 또 다른 길을 찾았다는 신호탄이었다. 브람스의 ‘헨델 변주곡’ 등 대곡으로 본격적인 워밍업을 마친 그의 방향은 베토벤의 크고 위대한 세계로 향했다.

머레이 페라이어 이미지 3 
10년을 준비한 프로그램 베토벤 ‘함머클라비어’
 

이번 공연에도 포함된 베토벤의 공룡같은 작품 ‘함머클라비어’ 소나타가 이번 시즌 페라이어의 프로그램 중 주된 화제가 되는 듯하다. “지금까지 단정하게 단추를 채우고 연주하던 페라이어가 이번에는 그것을 풀어헤쳤다”,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현란하다”는 세간의 평들은, 사실 충분히 예견된 것이며 이 곡을 10년 동안 준비해 왔다는 연주자의 말처럼 오랜 기간 쌓아 온 음악적 과제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된다.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익숙치 않지만, 그는 15년이 넘는 기간동안 ASMF의 상임객원지휘자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지휘자이다. 서두르지 않는 행보이지만 점차 오케스트라 레퍼토리의 무게를 더해가고 있는 그가 ‘지휘자의 음향’을 베토벤 연주에 적용시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치밀한 연구와 체계적인 분석, 여기에 관현악적 상상력이 더해진 페라이어의 ‘함머클라비어’는 모든 이들의 기대가 모이는 곡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함께 연주되는 하이든, 모차르트와 브람스의 명곡들은 20대부터 걸어 온 페라이어의 다채로운 피아니즘을 한 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 소개 

고집 세고 타협을 모르던 베토벤은 의외로 음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얼리 어답터’의 성향도 지니고 있었다. 1818년 여름 런던의 피아노 제작자인 브로드우드의 새로운 악기가 베토벤에게 전달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거대한 고전파 최후의 걸작이 남을 수 있었을지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혹자는 네 악장 중 1, 2악장의 구상이 브로드우드 피아노 이전에 완성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악기를 만난 대가의 의욕과 즐거움이 작품 전체에 녹아 흐르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당시 베토벤은 조카의 양육권 분쟁 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였으나, ‘함머클라비어’(당시로서는 신생악기라 할 수 있는 현대 개념의 피아노)를 위해 만들어진 이 거대한 소나타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숱한 피아니스트들의 에베레스트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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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참나무.

    25/10/2016 at 00:27

    위블 메니져님께:
    요즘 스팸 걸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포스팅 저는 아무짓도 안했는데
    왜 올리지도 않은 사진이 뜰까요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
    궁금하여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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