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사티- 짐노페디 1번. 오보에 : 알브레히트 마이어
‘백남준은 사기꾼인가 ‘
2017. 1월호 서울 아트가이드, 연재칼럼 <스페셜>
미술평론가 및 인문학자 박용숙님 칼럼에서
제목은 임의로 정했습니다. 출처: 달진 닷컴
(103)백남준은 사기꾼인가 – 박용숙
어느 날 텔레비전을 켰다가 백남준에 관한 퀴즈 문제를 푸는 장면을 보고 채널을 고정시켰다. KBS의 오래된 인기 프로그램 <골든벨>이다.
Q. 국립현대미술관 현관에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미술작품이 설치되어있다. 그 작품의 명칭은 무엇인가?
A. <다다익선(多多益善)>.
몇 학생만이 다음과 같이 답을 썼다. 환성이 터지고 진행자가 이어서 그 제명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한 학생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입니다.’
다시 요란한 박수와 환성이 터진 후 퀴즈는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우리가 세계적인 미술가라고 찬송해 마지않는 백남준의 작품세계가 간단하게 정의되어버리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퀴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백남준은 꼼짝없이 TV 모니터를 수집하여 괴이한 볼거리를 만드는 재주꾼으로 인식되는 순간이다. ‘다다익선’이라는 사자성어도 백남준이 제시한 메시지이므로 더욱 그렇다. 실제로 백남준은 폐품이 된 TV 모니터를 의도적으로 쌓아서 하나의 거대한 탑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둘러친 모니터 스크린에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스냅씬이 동영상 뮤직비디오(MTV)처럼 반복된다. 무엇인가를 커뮤니케이션을 할 것처럼 유혹하지만 실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빈 브라운관도 있다. 관객은 왜 백남준이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지를 의심하지 않으므로 그 시도는 완전히 마술사의 사기행각이 된다.
백남준, 다다익선 ⓒ국립현대미술관
잘 알려져 있듯이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은 1984년에 처음 귀국했다. 88올림픽과 연계되는 귀빈처럼 나타났으므로 그의 출현은 화려한 뉴스가 되었다. 백남준은 KBS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그는 우리에게 처음으로 얼굴을 보였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예술은 사기다’라고 선언했다. 폭탄선언이다. ‘예술이 사기’라니 예술을 아름다움으로 알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메시지다. 따라서 ‘다다익선’이라는 명제도 사기행위가 분명하며 이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백남준이 우리에게서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광적으로 지지하는 그의 ‘예술사기론’의 정체를 깊이 묻지 않는다. 그로부터 ‘묻지마 비평’, ‘묻지마 텍스트’가 득세한다. 나는 최근 어느 미술전문지에 쓰인 백남준에 관한 논평 글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 논평은 다음과 같다.
“레이저디스크와 멀티미디어 설치 이런 작품을 통해 백남준은 인류의 번영과 화합, 평화와 공존뿐 아니라 한민족의 번영에 대한 염원을 아름답고 현란한 빛과 조명으로…”
백남준이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사기라고 했는데도 이 글에서는 그를 가리켜 인류의 번영, 화합, 평화공존을 위한다는 등 화려한 언어의 세례를 퍼붓는다. 묻지마 텍스트다. 백남준이 살아서 이 글을 본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그뿐인가. 아직도 모든 미술저널은 백남준을 가리켜 비디오아티스트라고 말한다. 아티스트는 ‘-장이[匠]’의 뜻이다. 그렇게 부르면 그 호칭은 백남준을 비디오장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갓을 잘 만들면 갓장이, 옹기를 잘 구우면 옹기장이, 노리개를 잘 만들면 목각장이라고 한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티스트이면 영락없이 비디오마술장이가 된다. 과연 백남준은 장이인가.
백남준의 텍스트에 주목하라
백남준은 비디오장이가 아니다. 비디오아티스트라고 부르면 그를 모독하는 일이다. 그는 오늘의 전파미디어 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상가로 스스로 독특한 텍스트를 지닌 예술가이다. 따라서 백남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가 지닌 텍스트(Text)를 깊이 논의하고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어쩐 영문인지 백남준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가진 텍스트가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아무도 텍스트를 모른다. 이는 내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죽했으면 견디다 못한 불청객이 태평양 바다 건너 미국에서 경고장을 날렸을까. 그 사람이 홍가이(洪可異, 1948- )다.
그는 당시 MIT 교수로, 작심하고 텍스트를 논의하지 않는 한국 비평계와 미술언론에 혹독한 비평을 퍼부었다. 이미 지나간 80년대의 일이지만 우리는 모두 부끄러워 할 말을 잃었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오늘의 상황도 그때나 저때나 마찬가지다. 슬픈 일은 아예 텍스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아직도 비디오장이로 예술이라는 이름의 사기꾼으로 통해도 수수방관이다. 백남준이 처음 나타났을 때 그는 철학자 도올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진술한 바 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 홈 컴퓨터(Personal Computer)다. 99단만 알면 살 수 있는 대중들이 컴퓨터라는 것이 생기면서 이를 오락으로 삼으면서 시간낭비만 하니 어찌 이를 유용한 기계라고 하겠는가.”
비디오 문화의 찬양이 아니라 텔레비전 문명에 신랄한 비판이다. 그는 오늘의 TV문화가 역기능의 도구라고 단언한다. 백남준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분명하지만 컴퓨터문화가 증대되면 될수록 인간은 할 일을 잃게 될 것이며 컴퓨터 생산이 증대되고 소비는 한정될 것이다. 인류는 언제나 생산의 잉여를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처리했는데 그렇다고 이 골치 아픈 컴퓨터를 처치하기 위해 전쟁을 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는가.”
백남준, 달에 사는 토끼
비디오를 예술의 수단으로 삼은 이유이다. 우리가 실감하고 있듯이 TV는 자본주의 문명의 하수인이다.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와 자본창출의 수단으로 전락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품 <다다익선>은 그 지론의 역설이다. 이런 정황을 무시하고 추종자들은 그냥 그의 비디오작품을 하늘에서 떨어진 신기한 선물 보따리쯤으로 생각하면서 그를 천재라느니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라고 입술이 닳도록 법석을 떤다. 다시 백남준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의 임무는 불필요한 소비를 재활용(創案)하느냐에 있다. 이것이 앞으로 예술가의 최대의 사회적 기능이 될 것이다. 예술가들은 지금까지 자본주의적 가치에 저항하는 입장에서 자기들의 이상주의를 추구해 왔다… 어쨌든 나는 모니터 수상기를 하나 샀는데 이참에 아-트나 해보자 하고 비디오 작품을 하게 되었지만 … – 백남준과 김용옥의 대담. 김용옥의 『석도화론』 중에서
대담의 말에서 우리는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고 선언한 그 텍스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다다익선>은 물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든 비디오작품이 단순한 마술 놀이가 아니라 현대의 상업주의 문화에 대한 역설적인 비판적인 메시지임을 알게 된다.
에릭 사티-짐노페디 3번. 기타 : 존 윌리엄스
세상의 경계를 흐리는 백남준
백남준의 이름을 아는 거의 모든 대중들은 백남준을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로 안다. 전문미술 매체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디오를 조작하는 세계적인 기술자이거나 마술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Art)’이라는 말이 일차적으로 기술과 마술의 개념이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도 큰 잘못이라고는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백남준의 작업을 그렇게 풀이하면 그는 영락없이 현대의 소문난 마술사, 요술사가 된다. 만일 백남준이 캔버스에다 그림을 그렸다면 그의 비디오 작업은 메시지의 전략적인 전달을 위한 매체가 되지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소통의 혼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꼼짝없이 그는 장이다.
그런 백남준이 무당 옷을 입고 굿판에 나타났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매스컴의 세례를 받으며 그는 또 한 번 마술사가 되기 위해 굿판에 섰다. 1990년 여름, 장소는 갤러리현대 뒷마당. 굿판은 유명한 무당 김금화의 ‘진혼굿’으로 전개됐다. 백남준에게는 단순한 굿판이 아니라 세계적인 작가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는 퍼포먼스’였다. 보이스는 백남준의 뉴욕시대의 절친한 친구였다. 흥미로운 것은 백남준이 이 굿에다 <늑대걸음으로>라고 명제를 붙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한국을 떠날 참이었다. 우리에게 마지막 주는 사기예술의 선물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예술은 사기’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 마지막 메시지가 무엇인지 필자는 매우 궁금했다.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는 진혼굿 퍼포먼스
<늑대걸음으로>를 행하는 중인 백남준 ⓒ갤러리현대
굿판에는 검은 피아노 한 대가 뒤로 넘어져 있고 그 위에는 불청객인 케이크가 놓여있다. 제상의 의미이다. 무당으로 변장한 백남준은 혼맞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제상으로 변조된 피아노 앞에서 굿을 한다. 우리는 물론 그의 굿판에 왜 피아노가 뒤로 넘어져 있는지를 안다. 유명한 존 케이지의 피아노 해프닝의 인용이다. 실험미술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름 바꿔치기’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마르셀 뒤샹은 ‘변기’를 화랑에 옮겨 <샘>으로 이름을 변조했다. 멋진 사기극이다. 하지만 백남준이 보여준 이름 바꿔치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에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요셉 보이스가 있다. 그가 이 굿을 <늑대걸음으로>라고 붙인 이유이다. 살아있는 자가 있는 곳은 이승이고 죽은 자가 있는 곳은 저승이다. 백남준은 진혼굿을 통해 저승에 있는 요셉 보이스의 혼을 이승으로 불러내려 한다. 굿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마술, 이것이 현대예술이 시도하는 ‘이름 바꿔치기’ 이벤트이다. 백남준은 샤먼의 진혼굿에 이런 이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그는 몽골의 샤머니즘에 정통하다.
그의 <늑대걸음으로>는 이승과 저승을 왕래하는 이름 바꿔치기의 이벤트이다. 몽고의 샤먼은 늑대를 저승사자로 생각한다. 늑대는 빛과 그림자의 그 중간점에 이승과 저승을 왕래한다. 조형언어로 말하면 이승은 만질 수 있는 것이고 저승은 만질 수 없는 세계이다. 늑대는 이 모순의 세계를 오고 간다. 늑대의 춤은 두 모순의 세계를 오가는 몸짓이다. 그러니까 샤먼의 춤은 마술이다. 백남준의 춤은 무당춤이 무색할 만큼 멋지다. 특별히 이벤트를 위해 교습을 한 일도 없을 터인데도 말이다.
무당의 춤사위에서 발놀림은 굿의 신비감을 표현한다. 굿의 발놀림은 앞으로 나갔다가 뒤로 물러나고 물러났는가 하면 다시 앞으로 나간다. 나가는 것과 물러나는 것을 애매하게 만든다고 할까. 시작과 끝의 얼버무림이라고 할까. 발놀림은 이것과 저것이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는 어떤 이미지를 연출한다. 샤먼은 이승과 저승이 둘이 아니고 하나도 아니라고 믿는다. 이것과 저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우리들의 현실언어가 아닌 것이다. 백남준이 보여주려는 메시지는 이승과 저승이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이 묘한 세계를 왕래한다는 뜻이다 그가 자신의 이 이벤트에 <늑대걸음으로>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이다. 이승과 저승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늑대의 의미가 현대미술의 텍스트임을 그는 암시한다.
백남준의 이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86)가 뉴욕 데이트화랑에서 행한 이벤트 강연(1968)을 돌아보면 백남준이 왜 이 굿을 <늑대걸음으로>라고 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보이스는 이 강연이벤트에서 아인슈타인의 E=mc²의 원리를 칠판에 쓰고 그 원리를 이벤트화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인슈타인의 E=mc²은 ‘에너지가 곧 질량이다’로 만질 수 있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말한다. 이것이 이승과 저승의 이야기이고 아인슈타인의 E=mc²이다. 백남준이 사기꾼이면 아인슈타인도 사기꾼이 된다.
– 박용숙(1935- ) 동덕여대 예술학부교수(1979-2004) 역임. 제4회 미술인의 날 대한민국 미술인상 부문별 본상 수상(2010). 『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1992, 일지사),『한국현대미술사이야기』(2003, 예경),『샤먼문명』(2015, 소동) 외 다수 저술.
홍도토리
04/01/2017 at 11:28
어렵습니다.
사기= 현대 라는 이름이 붙은 예술의 저의
라 해도 될런지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하는데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주관자에 따라 천차만별이니
무어라 이르겠습니까…
참나무.
04/01/2017 at 13:19
그 사기는 (史記)라는 일설도 있더라구요.
한 번 새겨 읽고싶어 보관했답니다.
미술이 아름다은 작품만 아니란 건 오래되었지만
여하튼지간에 현대미술은 넘 어려워요
*
현지니가 요즘 종이접기에 관심이 많아
접는 법 찾아보려 컴 열었어요
예전에 하던 거 다 잊어버리고
도판으로 보니 왜이리 더 어려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