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엔 유난히 산벚나무와 쥐똥나무가 많다. 작은 흰꽃이 핀 쥐똥나무 곁엔 떨어진 버찌들로 길바닥이 온통 자주색이다. 외출했다 내 작은 방에 들어오면 상큼한 레몬향이 은은하게 나를 반긴다. 이런 재미로 쥐똥나무에 꽃이 피면 한 가지씩 꺾어 온다. 누가 유월의 향기를 물으면 은은한 레몬향이라 말하고싶다.
유월이 오면 꼭 생각나는 나태주 시인…그리고 또 한 분 더…
예전에 청담 ‘시인과의 만남’ 에 꼭 초대하고 싶었는데 결국 무산된 최승자 시인이다. 그 때 지방(울산?)에 계셨고 또 건강도 여의치 못해 ‘다음에 꼭!’ 했지만 모임 자체가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더 아쉽다.
우연히 월간 중앙 6월호을 보게된다. 청담 ‘시인과의 만남’에 초대된 시인들 소식 들으면 이유없이 그냥 반갑다. 6월도 벌써 중순으로 접어들고…
해마다 유월이면 당신 그늘 아래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내일 열겠다고, 내일 열릴 것이라고 하면서
닫고, 또 닫고 또 닫으면서 뒷걸음질치는
이 진행성 퇴화의 삶,
그 짬과 짬 사이에
해마다 유월에는 당신 그늘 아래
한번 푸근히 누웠다 가고 싶습니다.
언제나 리허설 없는 개막이었던
당신의 삶은 눈치챘었겠지요?
내 삶이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오만과 교만의 리허설뿐이라는 것을.
오늘도 극장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저 혼자 숨어서 하는 리허설뿐이로군요.
그래도 다시 한번 지켜봐주시겠어요?
(I go, I go, 나는 간다.
Ego, Ego, 나는 간다.)
- 최승자 – 해마다 유월이면
- 시집명 : 내 무덤 푸르고
올린 김에 류근 시인의 기사, 링크하면 깔끔하지만
팝업창들과 다른 기사들이 많아 복잡해서 드르륵 붙여둔다.
*
[혼돈의 시대, 시인에게 사랑을 묻다] 류근-상투적 언어로 상투성을 극복한 저력
“나는 세속과 통하는 통속의 시인”
남들이 보기 불편해하는 것을 굳이 쳐다보는 ‘삼류시인’…‘불멸의 욕망’으로 시를 쓰나 그것도 탐욕이란 것을 깨달아
류근은 2010년 등단한 지 18년 만에 <상처적 체질>이라는 시집을 갖고 독자 앞에 나타났다. 현대시의 난해함과는 거리가 먼 서정의 언어와 감성을 되살린 그의 시는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작사가인 그는 10년간 벤처사업으로 돈을 번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며, SNS로 독자와 소통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삼류 통속연애시인’이라 자처하는 그가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고 사람을 사랑해왔는지 들어본다.
시인 류근(柳根·50)에게 붙은 수식어와 소문은 꽤 많다. 그 스스로 칭한 ‘삼류통속연애시인’부터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또는 사업으로 몇 천억원대의 재산을 모은 자산가, 목이 길고 잘 울어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남자, 페이스북 같은 SNS를 적극 활용해 독자와 직접 소통하는 ‘직거래 시인’이라는 별칭에 최근에는 ‘여혐’이라는 딱지까지 붙었다. 늘 술과 연애에 취해 산다는 소문은 소문이 아니라 정설로 굳어진 듯 보인다.
하기야 그의 시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거나 눈이 떨어지고 노을이 흐르고 별이 뜬다. 그리고 어김없이 술을 마주한 화자와 그가 추억하는 연애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 술값은 고(故) 김광석이 불러 아직도 사랑받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가사 저작권료로 댄다는 이야기. 아, 또 하나 있다. 그는 3년 넘게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해 자신의 번듯한 얼굴을 전국에 알린 최초의 시인이라는 것.
이 정도면 분명 화제의 인물인 것이 맞다. 그러나 그에게 입혀진 숱한 수식-그것이 사실이든 과장된 뜬소문이든-이 이렇게 무성하게 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등단하고 18년 동안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다 18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는 사실과, 시인들이 선망하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보란듯이 나온 그 첫 시집에 실린 시가 이제는 용도폐기된 줄 알았던 서정과 감성을 독자에게 되살려줬다는 엄연한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무협지 식으로 말하자면 일찍이 비범한 재능을 보인 젊은 무사가 강호에 반짝 등장했다 홀연히 사라지고, 다만 그의 아름다운 검법만 전설로 떠돌다 18년이 흐른 어느날 불현듯 나타났는데 이 무사가 구사하는 검법이 당대의 것과는 아주 다른, 그러나 맥이 끊어진 줄 알았던 옛 검법을 새로이 되살린 것으로, 무사는 그 검법으로 강호 무림을 종횡무진 휘달리더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확실히 그의 긴 침묵과 극적 등장에는 매혹과 통쾌함이 있다.
“본래 이류는 없다, 아류(亞流)만 있을 뿐”
그는 ‘삼류 통속’ 또는 ‘삼류 트로트 시인’이라 자처한다. 혹자조나 농담인가? 사실 그는 좀 독특한 어법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인지, 진지하게 답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하는 묘한 ‘기술’을 구사한다. 아마 같은 질문에 매번 다른 대답을 내놓기도 할 것이다. 그것도 때로 아주 상반된 답을. 그 자신도 “왜 사람들은 내가 농담을 하면 진담으로 받고, 진담을 하면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거지?”라고 하소연했다.
아무튼 그는 삼류라는 것이, 통속 트로트라는 것이 절대 “쪽팔리지 않다”고 말한다.
“일류는 타고나는 겁니다. 그런 애들은 심지어 공부까지 잘해요. 이류? 본래 이류는 없습니다. 아류(亞流)만 있을 뿐이죠. 일류를 흉내 내고 일류에게 섞여 일류인 척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지요.”
그렇다면 삼류는? “남들이 보기 불편해하는 것을 굳이 쳐다보고, 남들이 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굳이 해보는 것이 삼류”라는 근사한 대답이 돌아온다. 이쯤 되면 그 삼류 트로트 시가 어떤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내가 사는 별에는 이제/ 비가 내리지 않는다/ …(중략)…/ 해 질 무렵 잔등 위에 올라앉아/ 어느 먼 비 내리는 별에게 편지를 쓴다/ 그 별에는 이제 어떤 그리움이 남았느냐고./ …(중략)…/ 비가 내리는 별이여/ 우주의 어느 기슭을 떠돌더라도/ 부디 내가 사는 별의 사소한 그리움 한 방울에/ 답신해다오 …(하략)…”(‘편지를 쓴다’의 일부)
평범한가? 유치한가? 감상적인가? 의심스러워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으리라. 다른 시인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별이니 비·편지·그리움이니 하는 ‘오글거리는’ 단어가 마구 쏟아지니. 그러면 다시 읽어보자.
“내가 사는 별에는 이제/ 비가 내리지 않는다/ 우주의 어느 캄캄한 사막을/ 건너가고 있는 거다/ 나는 때로 모가지가 길어진 미루나무/ 해 질 무렵 잔등에 올라앉아/ 어느 먼 비 내리는 별에게 편지를 쓴다/ 그 별에는 이제 어떤 그리움이 남았느냐고./ 우산을 쓰고 가는 소년의 옷자락에/ 어떤 빛깔의 꽃물이 배어 있느냐고. / 우편배달부는 날마다 내가 사는 별/ 끝에서 끝으로 지나가지만/ 나는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나는 늘 이 별의 한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날마다 우주의 사막을 가로질러가는 시간의 빛살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거다/ 그래도 나는 다시 편지를 쓴다/ 비가 내리는 별이여/ 우주의 어느 기슭을 떠돌더라도/ 부디 내가 사는 별의 사소한 그리움 한 방울에/ 답신해다오 / 나는 저녁놀 비낀 미루나무 위에서/ 못난 까마귀처럼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운다”( ‘편지를 쓴다’ 전문)
캄캄한 사막에서 비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해거름에 비 내리는 저 별에 편지를 쓰고 답신을 기다리는 이야기에 독자는 오래전 가슴속에 묻어놓았던 무언가를 꺼내보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진짜 못난 까마귀처럼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눈물지을지도. 류근의 시가 상처와 절망을, 그것도 이렇듯 달콤하고 감상적인 어조로 그리지만, 그것이 아주 아픈 곳을 건드려 독자는 움찔 놀라게 된다. 상처와 절망, 추억, 그리움이 상투적이든 감상적이든 그 상처와 절망은 절대 가짜나 거짓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컴컴한 사막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견디는 사람이고, 절망을 깊이 하고 상처도 심하게 앓는 사람이라고. 요컨대 상처, 절망, 그리움…. 이런 ‘상투적’ 단어가 그 상투성을 벗고 진짜 상처와 절망, 그리움으로 살아나는 희한한 경험을 맛보게 된다.
“흠흠, 제가 세속과 통하는 통속(通俗)시인 아니겠습니까!”
상처와 절망의 시인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땐 이상하게 우스워 폭소를 터뜨리게 된다. 그에게는 심각한 이야기를 코미디로 바꾸고, 코미디를 심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의 시를 읽고 나면 괜스레 심각하고 난해하고 지적인 시가 더 상투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야반도주로 가족이 갈라지다
문경새재 길의 호젓한 풍광. 시인은 경북 문경에서 여섯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시인의 유년 시절, 부친은 횡령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야반도주했다.
“선산도 팔아넘기고 부자였던 처가도 망하게 하면서까지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신 거지요. 그래도 안 되니 야반도주.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습니까? 나 같으면 몸으로 때우고 말지.”
그의 아버지는 사촌들이 문방구 사업을 크게 하는 서울로, 어머니는 예전에 친정에서 거두어주었던 먼 친척을 찾아 문경 이우리재를 넘어 충북 중원군 엄정면으로 갔다. 낯선 그곳 어느 집 문간방에서 그의 삶은 시작됐다.
“진기네 집 문간방! 크크, 아직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네?” 작은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여섯 형제, 거기다 혼자된 이모의 큰아들까지 거두어 여덟 명이 ‘단무지’처럼 포개어 자던 그 시절에 각인된 ‘진기네 집’을 기억하는 자신에게 놀란 듯 그는 웃었다. 지나가듯 짧고 약한 웃음이었지만 듣는 사람을 아프게 찌르는 웃음이다. 혹시 그는 슬플 때 미소를 짓는 그런 유형인가?
사모님으로 살던 어머니가 비누를 떼다 강원도까지 걸어가 행상해 보리나 좁쌀을 팔아와 연명하던 가족은 ‘갈 데 없이’ 가난했고, ‘오갈 데 없이’ 가난했고, ‘너무너무’ 가난했다고 한다. 형들은 늘 나이보다 1년씩 학년이 늦어졌다.
“가난했지만 형들이 공부를 잘해 그 동네에서는 대접을 좀 받는 편이었지요. 나중에 어머니는 충주에서 제과점·다방·양품점 등을 했지만 금방 망하곤 했어요.”
사람들에게 잘 퍼주고 잘 베풀던 어머니는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듯싶다. 서울로 이사와 오산고등학교(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그 유명한 오산고보가 서울로 옮겨 왔다)에 다니던 시절, 어머니는 도시락 위에 담배 여덟 개비를 랩으로 싸주며 “학교에서는 이것만 피우고 오라”고 했던 넉넉한 엄마이기도 했다.
“나중에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그러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담배를 피웠을 놈이라고 하시더군요.”
“고3이면 담배 피울 나이도 됐지”
류근 시인은 중학교 때 국어 선생으로부터 “문재가 있으니 시인이 돼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소년의 가슴에 새겨진 시인의 자리는 아직도 그에게는 신성하다.
담배를 피우는 것에서나 사업을 하는 데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18년 동안 차곡차곡 시를 써온 데서도 알 수 있듯 과연 그는 끈질기고 집요한 데가 있다. 그가 눈을 반짝이며 들려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어난 일이다. 한번은 친구가 담배를 피우다 걸려 써낸 서른 명의 이름 가운데 그도 끼어 있어 학생부로 불려가게 됐는데, 담배를 피우는 친구 스무 명을 써내라는 체육교사의 말에 그는 애초에 걸린 친구 이름만 달랑 써냈다. 그 옆에 있던 친구 다섯도 그를 따라 다른 이름은 지우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그는 체육 교사에게 엄청 맞았다.
“그날 집에 와 이제 학교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세요. 제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할 때만 해도 예사롭게 듣던 어머니가 담임에게 전화를 거시더니 ‘우리 아는 내일부터 학교에 안 보낼랍니더’ 하시는 거예요. 그 학교가 민족학교라면서 친구를 고자질하지 않는다고 아이를 묵사발을 내니 일본놈만도 못하다고 아주 정식으로 항의하셨죠. 그리고 덧붙이기를 ‘고3이면 담배 피울 나이도 됐지. 가 아버지는 그 나이에 첩이 두 명이었어요!’ 그래요. 그날 담임이 집에 찾아와 잘못된 처사였다고 어머니께 사죄했죠.”
그가 사업을 하며 돈을 벌게 되면서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릴 수 있었으니 어머니의 노후는 다사로웠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업가가 그렇듯 그도 서른다섯 살에 이미 기사까지 두었는데, 출근하기 전 일부러 어머니를 리무진에 태워 동네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곤 했다.
“제가 모시고 살았는데, 손주들 봐주시면서 행복하게 사시다 가셨죠. 과부 이모들과 아는 아줌마들까지 어머니를 찾아와 늘 집안이 북적댔고요. 언제나 베푸는 분이니 제가 돈이 많이 들었지만요.”
막내지만 맏아들 노릇을 한 그 때문에 그의 아내도 맏며느리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언제나 며느리 편을 드는 현명한 어머니 덕분에 고부(姑婦)는 친 모녀보다 사이가 좋았다. 그의 아내는 시어머니가 먹던 숟가락으로 밥을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같은 여성으로서 전우애랄까, 아무튼 두 사람 사이에는 뭔가 통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는 진짜로 부러운 듯 감탄하듯 말했다.
“내가 버린 한 여자// 가진 게 사전 한 권밖에 없고/ 그 안에 내 이름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만으론 세상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조차 없었던,// 말도 아니고 몸도 아니고 한 눈빛으로만/ 저물도록 버려/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 어머니”(‘낱말 하나 사전’)
이렇게 어머니의 사전에 그는 유일한 ‘낱말’이었고, 아마 그의 사전에도 어머니는 크고 진하게 박힌 단어였을 텐데, 아버지라는 말은 그의 사전 어디쯤에 나올까?
“어머니는 아버지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죠. 외할아버지가 화병으로 돌아가시기도 했고. 아버지는 어쩌다 명절 때나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었어요. 낙타표 문화연필, 피노키오 크레용을 선물로 가지고 오셨죠.”
벤처 사업으로 큰돈을 벌다
평북 정주 오산고보 출신 시인 김소월(왼쪽)과 백석. 류 시인은 오산고보가 낳은 3대 시인으로 소월, 백석과 함께 자신을 꼽았던 시절이 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에게 준 것은 위로휴가 열흘뿐이라고 그는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의 시집을 읽어보면 아버지의 흔적이 담긴 시편이 의외로 가장 아련하고 아프다. 첫 시집 <상처적 체질>에 나오는 ‘내 이름의 꽃말’에는 기억과 언어가 연결고리처럼 이어지며 어린 시절의 자화상이 어렴풋이 드러나는데,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다만 육성회비 누런 봉투에/ 몇 달째 도장이 찍히지 않는다 선생님은 왜/ 갑자기 흰곰팡이 핀 장아찌처럼 시들어진 어머니가/ 보고 싶어지신 것일까 나는 언제나 일등만 하는데도/ 모르는 게 이렇게도 많을까 도대체 몇 밤을 더 자고 나야/ 아버지 오는 길 볼 수 있을까/ …(중략)…/ 꽃 꺾어 만들어준 누렁이 무덤 위에 누우면/ 반짝이는 가방을 들고 마을로 찾아드는/ 다 저문 사내 하나 네 이름이 뭐지?/ 뭐지? 내 헛간 같은 기억의 사진첩 안에 처음 꽂히는/오, 최초의 아버지…”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년은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아버지를 내동댕이친 적도 있고, 두 번째 시집 <어떻게든 이별>에 나오는 ‘휴가병’에서는 군인이 되어 아버지의 부음을 듣는다.
“…북으로 행군 중일 때 갑자기 휴가증이 나와서/ 어리둥절 시외버스를 타고 애인 만나러/ 신림시장 순댓집에 가서 앉았다/ 겨울이었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중략)…/ 여관에 가서 또 술을 마셨고 나는 천천히 취했다/ 내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애인과의 섹스에 좀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애인은/ 그새 많은 것에 깊어진 사람처럼 나를 대했다/ 그새 더 많은 것에 가벼워져 있는 나를 배에 태우고/ 울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먼 바다를 불러줬다/ …(중략)…/ 장례식은 끝났고, 나는, 그때 행군 중이었다”
이제 아버지가 된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상처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고독했을까, 함께 살지도 못하고…. 새끼들 보면 눈물겹지 않아요? 가만히 있어도 눈물겨운데, 우리 아버지는 오죽 했겠어요? 저는 아버지와 평생 백 마디도 못해봤어요.”
류근이 처음 시인이 되려고 마음먹은 때는 중학교 2학년, 사춘기 소년을 설레게 한 서울에서 내려온 국어선생님이 그가 쓴 글을 칭찬하며 “너는 문재(文才)가 있으니 시인이 돼라”고 한 말씀 때문이다. 오산고보가 낳은 3대 시인은 소월·백석·류근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그는 학창시절부터 백일장 같은 데 나가면 차선이나 차하는 한 번도 한 적 없고 장원 아니면 ‘나가리’였다고 한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고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그 경력을 이력 삼아 취업한다. ㈜진로의 홍보실이었다. 숨막히는 직장생활을 그린 그의 시가 생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곧 부도날 걸 알면서도 기업이 잘나간다고 선전하려니 거짓말하는 것 같아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시인이 거짓말하면 되겠나 싶어 낮술 먹고 들어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말만 써놓고 나왔지요.”
“다시는 돈 버는 일 하지 않겠다”
인도 갠지스 강의 순례자들. 시인은 IMF 직전 백수 시절 인도로 훌쩍 떠나 느리게 걷는 법을 배웠다.
다시 취직할 자신이 있어 한두 달 편히 쉬었는데, 마침 IMF 전으로 경기가 나빠질 때라 취직이 잘 안되었다. 그러자 불행해지기 시작했고, 시인 유시화와 소설가 임헌갑이 찬양해마지 않는 인도로 훌쩍 떠났다.
“인도 도착하고, 진짜, 유시화와 임헌갑을 ‘허벌나게’ 욕했습니다. 고생을 엄청 했어요. 그러다 보름쯤 지나니 한국사람을 알아보겠더라고요. 언제나 어디론가 급히 가는 사람은 한국사람이에요. 무슨 바보짓인가 싶었지요. 그러면서 제 걸음이 느려지고 진짜 여행이 시작됐죠.”
다섯 달 하고도 20일 동안 거지꼴로 인도를 돌아다니다 온 그는 좀 느긋해졌는지 강원도 횡성에 들어가 고추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MI F로 실직한 옛 직장 동료와 함께 휴대전화 벨 소리를 다운로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성공이었다. 최단기로 코스닥에 상장됐고, 현금 보유액이 국내 2위였을 만큼 성공한 벤처기업 1.5세대였다.
“행복했느냐고요? 유리구두 신고 뛰는 신데렐라 같은 기분이랄까요? 박근혜가 자기한텐 퇴근이 없다고 했는데, 진짜 퇴근이 없었어요. 늘 노심초사, 결국 공황장애가 왔고요. 사실 알고 보니 폐쇄공포증이었지만.”
그는 왜 그리 노심초사했을까? 돈 때문에 가정이 깨지고 어머니가 고생하는 걸 지켜본 그로서는 어머니와 처자식까지 있는데 ‘잘못 되면, 다시 가난해지면 큰일 난다’는 불안을 떨쳐낼 수 없었던가 보다. 불안이 많은 사람은 지나치게 치열하게 사는 경향이 있다. 그가 비 내리는 별을 그리워하는 시를 쓰는 것도 가난과 돈·가정·사업·출세와 명성 같은 세상의 소용돌이를 너무나 잘 알고, 호되게 앓았기 때문은 아닐까?
“대부분의 파도는/ 육지에 닿기 전에 몸을 잃는다/ 살아서 오는 파도보다/ 푸른 해변에 제 흔적을 놓쳐버린 채/ 죽어버리는 파도가 더 많다/ …(중략)…/ 몸을 잃고 돌아서면서 파도는 내게/ 삼진아웃 당하고 돌아서는 타자처럼/ 말했다// 나는 여기에 멈추기 위해/ 달의 힘까지 빌려 몸을 일으켰으나/ 육지에 몸을 더럽히지 않은 것으로/ 나의 길을 잘 마쳤다!’(‘최선을 다한다는 것’)
사업을 시작한 지 만 8년 만에 그는 사업을 접었다.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다시는 돈 버는 일 하지 않겠다”며 읽고 싶은 책 읽고 쓰고 싶은 글만 쓸 요량으로 그만두었다.
“예술도 그렇지만 사업도 더 키워나갈 아이디어와 동력이 다했을 때 손을 떼는 것이죠. 제가 좀 집요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예술가라면 사업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흔한 살에 돈 걱정에서 해방되고(소문처럼 4000억원대의 재산도 200억원대의 빌딩도 없다고 한다), 죽은 김광석이 때마다 그에게 백만 단위의 저작권료를 보내오고(소문과 달리 술값으로는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놓았다), 첫 시집과 산문집은 꾸준히 아주 잘 팔리며 ‘우수문학도서’로도 선정되었고, 두 번째 시집 역시 나오자마자 주문이 폭주했다. SNS 팔로워 수는 2만이 넘는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의 맛깔난 SNS 글이 인기를 끌자, 먼저 ‘가난을 코스프레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2011년 가을 연희문화창작촌에 들어갈 때 후배가 페이스북을 열어줬어요. 그곳에선 밥을 직접 해결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취생 느낌이 살아나는 거예요. 예전에 밥하고 연탄불 갈던 이야기, 집이 물에 잠긴 이야기, 절에서 보낸 이야기, 요즘 학교 강의 이야기 등 자유롭게 섞어 썼지요. 처음에 저는 아는 사람끼리만 보는 줄 알았지요. 보는 사람도 제가 쓴 지독한 배고픔이나 추위 이야기는 다 옛날 이야기인 줄 알고 읽고 댓글도 ‘위문 가줄까?’ 같은 놀림이었죠. 재밌더라고요. 그런데 스무날 지나니 팬덤이 생기더군요.”
유독 먹는 이야기, 그중에서도 시래기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이를 본 어느 여자는 시래기를 그에게 보내주었다가 나중에 그가 부자인 걸 알고 그를 욕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건, 그는 열두 끼째 올라온 시래기 반찬에 물린 이야기를 썼는데, 그 여자는 어찌 그에게 시래기를 선물로 보냈을까?
“쉬운 시는 가슴 아픈 내가 쓰면 된다”
진지하면서도 근엄하지 않은 류근의 시는 그의 표정과 닮았다. 열병과 숙취와 우울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아무튼 인기 덕에 출판 제의가 쇄도했고,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라는 제목의 산문집으로 나와서도 인기는 여전하다.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조낸’과 ‘시바’가 감탄사처럼 따라붙는 이 글은 기발하고 우스꽝스러워 웃음이 나오지만 가볍지 않고, 진지하면서도 근엄하지 않고, 묵직한 뭉클함도 주고, 때로 정신도 번쩍 나게 한다. 물론 그의 열병과 숙취와 우울까지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당신 시는 좀 쉽잖아요’라고 어제 누군가 말했다. 나 또한 깊이깊이 기쁘게 수긍하여 주었다. 대개, 머리로 해석하는 세상은 좀 어렵다. 그러나 가슴으로 느끼는 세상은 좀 쉽다. 어려운 시는 머리 아픈 당신들이 쓰고, 쉬운 시는 가슴 아픈 내가 쓰면 된다.”
그의 쉬운 시는 사실 찬찬히 읽어보면 꼭 쉬운 것만은 아니다. 쉬운 시조차 그 쉬움을 얻기 위해 그가 생각하고 고민했던, 깊이 다치며 토해냈던 시간이나 고통을 생각하면 사실 그는 징그러울 정도로 집요한 게 맞다 싶다. 그런 집요함이 있었으니 사업 하던 시절에도, 아니 중학교 2학년 이후 단 한순간도 시인이기를 포기한 적이 없었겠지.
“이동통신사, 단말기 제조사를 외판원처럼 드나들며 엘리트 직원을 만나 ‘비즈니스’를 할 때도 저는 꿀리는 법이 없었어요. ‘나, 시인이거든’ 이런 게 있었어요.”
중학생 소년의 가슴에 새겨진 시인의 자리는 아직도 그에게는 신성하다. 그래서 장식품처럼 시인이라는 이름을 쉽게 다는 요즘의 행태도 마땅찮고, 시나 시인 그 어떤 것도 훼손당하는 것을 못 견뎌 한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을 내게 된 것은, 이윤학 시인이 집에 왔다 서재에 놓인 시를 보고 ‘문학과지성사’에 갖다 준 것이 계기가 되었죠. 그것도 처음에는 퇴짜를 맞았고 두 번째 통과되었지만요.”
이런 우연도 있었겠지만 고등학교 때 고 김현 선생의 평론에 반해 시집은 꼭 문학과지성사에서 내겠다는 목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오랫동안 차곡차곡 밟아 올라가는 사람.
지난해 가을 두 번째 시집이 나온 직후 주문이 폭주하고 인터뷰가 쇄도하던 어느 날 그는 <한국일보> 앞을 지나다 아는 기자 A씨가 생각나 전화했다.
“출산한 A씨가 다시 출근한 안부를 묻고 제 시집 나온 이야기도 하는 중에 제가 <조선일보>도 인터뷰했는데 ‘정론지인 <한국일보>’는 왜 안 해주느냐고 했어요. A씨는 문화부 기자도 아니었고, 대화 중에 흘러나온 말이었죠. 그게 기사 청탁인가요?”
그런데 A씨가 문화 담당기자 B씨에게 기사 이야기를 했던가 보다. B씨가 쓴 기사는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라는 제목으로(부제는 ‘한국 문단과 여혐’) “‘낭만적인 나’의 서사 밑엔 늘 여자가 방석처럼 깔려 있다.”고 했다. 비록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가 통(通)했던 속(俗)의 야만성’ 등의 말에서 문학에 관심 있는 이는 다 류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제목도 기가 차지만 더 화가 나는 것은, 어느 작품이 그러한지 작품 인용도 없이, 근거도 대지 않고 이런 기사를 썼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제 시를 읽어보고 쓴 것인지도 의심스럽더군요.”
그는 단박에 SNS에 반박 내용을 올렸고, 이를 본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류근 시인의 시들을 면밀히 다시 읽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이라는 단서 아래 그 기사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설가 이외수가 “평론가는 전봇대만 보면 다리를 들고 오줌 누고 싶어 하는 개와 흡사하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하며 “류근이라는 이름의 전봇대에 아무리 오줌을 누어도 정전되지는 않는다”고 예술가 편에 섰다.
류근이 시를 쓰는 이유
문학과지성사를 상징했던 평론가 고 김현의 1980년대 중반 모습. 김현의 문학정신을 흠모했던 류 시인은 자신의 시집도 <문지>에서 나오길 희망했다.
류근은 속이 답답했겠지만 SNS 상에서 더 이상 반박하거나 반응하지는 않았다. 이 기사를 보고 그에게 확인 전화도 하지 않은 채 재빨리 포스팅한 괘씸한 후배와 ‘여혐 관련 기사에 오른 시인’의 책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해줘서는 안 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린 또 다른 후배 시인에게 더 상처받은 듯하다. 그에 비하면 지난 추석 며칠 뜨거웠다 거품 꺼지듯 사라진 ‘메갈’의 공격이나 SNS 상의 논쟁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누군가 나를 ‘여혐’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내가 진짜 ‘여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혐이라고 판단할 때는 왜 그러한지 면밀한 검토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적·물리적으로 일어나는 문단 내 성폭력과 문학작품 내용을 여혐으로 판단하는 것은 다르다. 아, 그런데 문학은 여혐(여자를 대상화한 것을 모두 여혐이라고 하면)으로 이루어진 세계 아닌가? 그리고 누가 문학작품을 판단하고 단죄할 자(尺)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SNS로 그토록 곤혹을 치렀는데도 그는 SNS를 계속한다. “심심하니까” 한단다.
그는 시를 왜 쓰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안 죽고 싶어서 아닐까요? 새끼를 낳는 것도, 돈을 벌고 저축하는 것도 결국 안 죽고 싶어 하는 욕망, 전문용어로 ‘불멸의 의지’, 그런데 이건 탐욕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운 거예요. 자기현시욕도 부족해 안 죽고 싶어 하는 거, 나는 죽어도 이것은 남겠지, 이런 게 탐욕 아닐까요?”
그는 또 스스로 의심하고 자신을 들볶기 시작했다.
한경심 –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기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문화와 관련한 글을 썼다. 저서로 전통공예 장인들을 소개한 <우리는 어떻게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가>, 한식의 철학을 담은 <우리는 왜 쌈 싸먹고 비벼먹고 말아 먹는가>등이 있고 번역서로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 김병연의 한시를 소개한 (공역)이 있다.
데레사
14/06/2017 at 08:57
오늘은 류근 시인에 대하여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나도 이분 한번 뵈었죠. 청담에서.
직접 사인해 준 상처적 체질도 갖고 있어요.
요즘 다니시기에 많이 덥죠?
나는 벌써부터 갇혀 버렸습니다. 집에.
참나무.
14/06/2017 at 08:51
맞아요 여러 번 오셨지요
청담도 조블도 겨울비도 자주 생각나는 요즈음입니다
나갈일이 자꾸 생겨 싸돌아다녀 좋은 구경도 많이했는데
현재스코어 발등이 부어 지금 병원가려는 중입니다
내일 1박2일도 예약해뒀는데…
좀 걱정이 되지말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천하태평입니다 제가 또…^^
수선호이
14/06/2017 at 19:55
참나무.님 덕분에 최승자 시인님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 분의 근황이 자주 궁금하고 생각나더랍니다..
요즘은 병원에 계신지..자택에 계신지..그러면서요^^..
저는 류근 시인님의 시보다 음성이 더 좋더라고요 ㅋ
..정성스런 기사[글]잘 읽었습니다
윤달이 있어서 그런지 6월인데 선선한 바람이 붑니다
건강 조심하시고요..오며가며 안부 드려봅니다
늘 감사합니다^^_
참나무.
15/06/2017 at 19:28
최승자 시인을 많이 좋아해서인지
포스팅도 여러 번 했네요 제가…
.
류근시인 서정시를 좋아해요
단어 선택도 잘 하잖아요
이류-아류
세속-통속…등등
간혹 오해 받는 단어도 감탄사 정도로 넘기면되는데
이번 기사 잘 쓴 것같아 올렸어요
늘 따뜻한 안부 고마워요
내일 1박 2일 때문에 좀 바빴네요
집안 정리, 블로그 미뤘던 포스팅 정리하느라
석달 열흘 여행하는사람처럼…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