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신발과 정크 아트

 

제인 퍼킨스 Jane Perkins
Vermeer 진주귀고리의 소녀

출처:Jane Perkins – Blue Bowerbird  <–

그녀의 사이트
들어가면 더 많은 작품들 볼 수 있다.
명작을 리메이크 한 작품들 재료가 버려지는
단추 등속, 폐품들로 만든 정크 아트다.

jane-perkins-and-anna-grayson-with-their-tributes-to-hokusai

 

‘서울로 7017’ 버려진 신발로 만든 슈즈 트리
보자마자 이 작가와 고흐의 신발이 먼저 떠올랐다.
궁핍하여 모델을 구할 수 없어
신발이나 자화상을 많이 그린 고흐.

며칠 후 조선일보에서 내 속에 들어왔던 것 처럼
속 시원한 글을 읽고 보관해둔 것
바쁜 척 하느라 임시글로 내두룩 있었다.

포스팅 하다 만 것들 많지만 대부분 나중에는
다 지워버리는데 오늘은 공개해본다.
정트 아트도 거론하였기…

서울시 정책,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나날이
심해지는 폐기물 때문에 지구는 몸살을 앓는데
환경오염되는 쓰레기들로만 예술작품 하는
정크아트 하는 분들,이번 기회를 계기로
그들의 메세지에 먼저 귀를 기울이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슈즈 트리 황지해 작가의  다른작품

 

새해 첫날 새벽, 엄마의 호들갑에 우리는 눈을 떴다. 신발 도둑이 들었단다. 우리 가족이 서울에 입성하여 첫해를 맞은 1972년. 세배를 가기 위해 닦아 대청마루 밑에 모셔뒀던 아버지의 구두와 엄마의 털부츠가 사라졌다. 두 분의 단벌 구두였다. 우야꼬! 정월 초하루에 신발을 도둑맞았으니 인자 마 1년 내내 재수 옴 붙었데이!

서너 달 지나 신발들을 찾았다. 똥 푸는 날, ‘푸세식’ 화장실의 똥통 안에서 인부가 발견했다. 세입자들이 둘러선 마당에 까발려진 똥 묻은 신발들을 보고 엄마는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뭔가 짚이는 듯 분기탱천했다. 내 이노무 예핀네! 그러나 신발 도둑은 멀리 떠난 후였다. 말이 주인집이지, 살림이 팍팍한 우리 집에는 세 가구가 세 들어 살았다. 엄마에게 알랑거리던 문간방 아줌마. 방세를 올리자 시치미 딱 떼고 주인집의 단벌 구두들을 똥통에 몰래 처넣고 이사 갔다.

서울역 고가공원 ‘서울로 7017’ 개장 기념 설치물인 ‘슈즈트리’앞. 잊었던 옛 기억이 불쑥 찾아왔다. 3만 켤레의 헌 구두 앞. 저게 예술이야? 쓰레기지. 지저분하고 냄새나.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에 뒤꼭지가 심심찮게 간지러웠다. 혹시 ‘정크아트’라고 아실랑가? 쓰레기도 예술이 될 수 있지. ‘쓰레기 같은’ 예술만 아니라면. 그럼 헌 신발을 설치했으니 예술이지. 새 신발을 아름답게 진열했다면 그것은 상품이게? 입이 간지러웠지만 참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아름답고 유혹적이다. 반면에 현대예술은 더 불편하고 추해도 메시지나 스토리를 던져준다.

왜 하필 신발인가? 그것도 버려진 헌 신발?

인간의 발을 구속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신발. 내게 신발은 늘 매력적인 문학적 ‘오브제’였다. ‘슈즈트리’의 작가 황지해도 “신발 하나하나는 그 사람의 인생을 함축하는 한 권의 책과 같다”고 했다. 신발을 보면 신발 주인의 인생이 보인다. 그가 한 짓도 대충 알 수 있다. 신발은 상상력의 보고다. 신발은 많은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고흐가 그린 일련의 신발 그림들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신발들이다.

왕자의 손에 들린 한 짝의 잃어버린 유리구두는 신데렐라의 정체성이다. 안데르센의 잔혹 동화 ‘빨간 구두’는 허영심 많은 여주인공 카렌의 욕망을 부추겨 춤을 멈출 수 없게 한다. 결국 욕망을 멈추기 위해 빨간 구두 신은 발목을 잘라내어야 한다. 신발은 체온과 체취, 영혼이 깃든 영험한 물건이다. 신발을 곧잘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이유다. 똥 묻은 구두를 찾았을 때 엄마의 참담한 얼굴을 잊을 수 없다.

1970년대, 보통 사람들에게 한 켤레의 구두는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무려 열 켤레의 반짝이는 구두를 소유한 밑바닥 인생이 있었다. 1977년에 발표된 윤흥길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주인공 권씨. 대학 나온 선량한 소시민이었던 그는 70년대 산업화의 쓰나미 속에서 불합리한 도시 개발로 집도 잃고 전과자가 된다. 아내의 해산(解産) 병원비 마련을 위해 집주인 오 선생의 집에 어설픈 강도짓을 하다 여의치 않자 집을 박차고 나가 행방불명이 된다. 애지중지하던 반짝이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상징된, 훼손되지 않은 그의 자존심만 남긴 채.

주인의 죽음으로 버려진 신발은 오히려 강렬하게 주인의 존재감을 불러일으킨다. 김숨의 ‘L의 운동화’는 어떤가. 30년 전 6월 9일, 6·10 민주항쟁을 앞두고 최루탄에 쓰러지며 벗겨진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 한 짝을 복원하는 과정을 그렸다. 27㎝ ‘타이거’ 운동화는 개인을 넘어 역사를 대변하는 물건이 되었다. 어떤 신발의 생은 인생보다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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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소설 속 복원가의 말에 깊이 동의한다.

 

권지예 소설가

[인문의 향연] 신발은 당신이 한 짓을 알고 있다

  • 글: 권지예 소설가 (사진)
  • 2017. 6. 12. 조선일보
  • 이미지: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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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van Gogh's Pair of Shoes, A Painting

Vincent van Gogh's Pair of Shoes, A Painting

Vincent van Gogh's Pair of Shoes, A Painting

Vincent van Gogh's Three Pairs of Shoes Painting

Vincent van Gogh's Pair of Shoes, A Painting

 

  • 베니스에서의 죽음 앤딩, (5:19)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이 장면만 보면 KBS ‘음악의 향기’
故 김범수 진행자가 생각난다.

4 Comments

  1. 데레사

    16/06/2017 at 12:47

    아직은 덥고 사람도 많아서 천천히 가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집에서 한번 가는 버스가 있거든요.

    세월이 흐르면 차차 그늘도 생기고 좋아지겠지요.
    헌 신발들 모으느라 나름 애 썼을것 같아요.

    • 참나무.

      18/06/2017 at 10:40

      답글 늦어 죄송해요
      이제 본격적인 여름 날씨
      건강 조심하셔요~~

  2. cecilia

    18/06/2017 at 16:47

    안녕하세요! 참나무님, 윤흥길씨의 소설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창비에 발표된 소설을 읽었던 기억은 있는데 내용을 잊어버렸었어요. 다시 기억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 숫자로 불려지는 사람이 되는 걸 한탄하는 작가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제는 그런 작가도 보기 힘든 시대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어떤 때는 정말 인간에게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 참나무.

      18/06/2017 at 17:19

      항상 문학과 예술에 관심많은 세실리아님 반가워요
      저도 윤흥길 ‘아홉켤레…’ 예전에 읽었고요
      신발과 함께 떠올린 권지예의 생각에 공감되어 남겼지요

      청바지 차림의 바이올리니스트,영화이야기
      각종 문학행사에 참여하신 이야기등
      잘 읽고있으면서됴 답글 못남겨 죄송해요
      답글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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