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선우예권(28)이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막을 내린 제15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차이콥스키·쇼팽·퀸엘리자베스 콩쿠르와 더불어 세계적 권위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첫 한국인이다. 선우예권의 매니지먼트사인 목(MOC) 프로덕션의 이샘 대표가 생생한 현장 상황을 전해왔다. [편집자]
-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한국인 최초 우승 선우예권
- 포트워스의 늦은 점심 식사
그날 예권씨와 나는 포트워스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선댄스 광장에서 늦은 점심을 먹을 식당을 찾고 있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최종 결선 마지막 연주는 어젯밤으로 모두 끝났다. 아직 결과 발표는 나오지 않았다. 오늘 남은 세 명의 결선 진출자 연주까지 마치고 오후 7시가 되면, 우리는 이 긴 여정의 결과를 알게 될 것이다.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체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참으로 힘들고 안쓰러운 시간들이었다. 어쨌든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우리는 오랜만에 식사를 함께하며 그동안의 밀린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우리 여기에서 먹을까?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광장으로 향한 야외 테이블이 있는 식당을 가리켰다. 결과 발표 전의 불안과 긴장이 자주 우리를 사로잡았기에 햇살은 잠시 이를 잊기 좋은 구실이 되었다. 아직 6월이지만 텍사스의 햇볕은 대지에 작렬했다. 북적이는 식당 앞으로 난 선댄스 광장의 야외 대형 스크린에서는 공교롭게도 어제 선우예권의 결선 연주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실황이 녹화 상영되고 있었다. 과연 반 클라이번의 도시답다. 마치 4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도시 전체가 반 클라이번의 깃발들로 펄럭이는 곳.
자신의 연주를 보면서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조금 민망한지 예권씨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괜찮아, 설마 누가 우리를 알아보겠어? 당신만 참으면 돼.
나도 살짝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허기 때문에 먼저 테이블의 의자를 잡아당기며 앉았고, 예권씨도 나를 따라 광장으로 난 대형 스크린이 보이는 좌석에 앉았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식당 손님들 뿐 아니라 광장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함께 선우예권의 연주를 보고 있었다. 어젯밤 나는 공연장 객석에서 저 연주를 들으며 심장이 마비될 것 같은 순간을 가까스로 견뎌야 했는데, 저렇게 즐기며 볼 수 있는 이들의 여유가 부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간혹 스크린의 연주 영상을 바라보면서, 어제 연주 이야기를 했다. 야외 스피커는 음질도 좋은 편이어서 어제 연주의 미묘한 인토네이션까지 들렸다. 아, 저 부분. 저 부분이다! 어제 몇 악장의 어느 부분은 왜 평소와 조금 다른 식으로 연주한 것인지, 어느 부분에서 지휘자와의 호흡이 특히 좋았는지 우리는 이야기했다. 백 스테이지 스태프들과의 소소한 이야기를 하다가 어제 연주 때의 컨디션까지 다시 언급이 되었는데,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영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못내 편치 않았다. 괜히 이쪽에 앉자고 그랬나?
나는 식사가 나오자마자 먼저 반을 덜어 예권씨의 접시에 옮겨주고 씩씩하게 포크를 들긴 했는데, 생각 외로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 어느새 자신의 접시를 다 비운 예권씨에게 슬그머니 나머지도 넘겨본다. 원래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피아노 앞을 떠나지 못하는 연주자였는데, 근육이 힘을 쓸 수 없어서 연습도 못하고 그냥 잠을 자고 무대 위로 올라가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게 한다. 콩쿠르 참가는 내가 했는데 왜 누나가 못 먹어? 웃으며 예권씨가 말했기에 나도 시린 레몬에이드를 마시며 함께 웃었다. 그러게 말야.
영상 속에서 3악장의 마지막 코다가 끝났다. 뜨겁고도 강렬한 타건의 마무리. 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정과 진심으로 함께 한 아름다운 연주였기에 다시 봐도 코가 맵다. 나는 양손으로 손나발을 만들어 예권씨를 향해 입모양으로 브라보, 라고 벙긋거리려고 했었다. 이 자리에 바로 저 영상 속의 근사한 연주자가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저들이 알 리가 없으니까. 우리끼리의 눈짓으로 어제의 치열했던 연주를 그렇게 자축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손나발의 모양을 채 다 만들기도 전에 스크린 속의 마지막 음이 끝나자마자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테이블을 향해 기립을 하고 환호를 하고,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테이블에서 이번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자인 선우예권이 지금 식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도시에게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어떤 의미였는지 내가 또 한번 간과했다. 그들은 아직 결과 발표 전인데도 이미 자신들은 모두 우승자를 알고 있다는 듯, 긴 환호와 박수로 우리를 테이블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감격스러웠던 순위 발표 장면은 메디치TV의 질 좋은 영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따로 글로 옮기지는 않겠다. 많은 기사에서 알려진 대로 선우예권은 그날 밤 북미 최고의 피아노 콩쿠르인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우승자이자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우승자가 되었다. 이미 국내 최다 국제 콩쿠르 우승자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선우예권으로는 한 회를 보태 통산 그의 여덟 번째 국제 콩쿠르 우승이기도 했다.
세계 무대에서 동양인 클래식 연주자들에 대한 선입견은 아직도 음악적인 경직성에 관한 것이 많다. 손만 잘 돌아가는 불행한 연습벌레의 이미지랄까. 뮤직 비지니스 안에서도 소극적이고 수줍은 태도 탓에 간혹 동양인의 우승을 우려하는 이들이 내는 목소리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선우예권은 이 모든 것을 보기 좋게 날려줬다. 가공할만한 엄청난 테크닉은 물론이고 진실함으로 가슴 깊이 전달되는 아주 특별한 음악성. 거기에 세련된 무대 매너와 여유로운 태도, 유창한 영어 등 기존에 동양 연주자들에게 볼 수 없었던 ‘팔리는’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까지 모두 보여줬으니까.
우승 발표가 이뤄지고 그날 밤 헤어지는 순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예권씨의 향후 일정표였다. 분 단위 미팅과 미국 언론·스폰서들과의 만남, 연주일정이 빼곡히 적혀진 그 일정표. 이제 이전과는 다른 삶이 시작되었음을 그 한 장으로 설풋 넘겨볼 수 있었다.
이제 우리가 오늘처럼 햇살 좋은 야외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 여유는 앞으로는 거의 없게 될 것 같다. 그래도 저렇게 포트워스 시민들의 사랑을 받은 기억으로 텍사스에서 행복한 마지막 식사가 되었으니 정말 다행이다. 내가 목으로 넘긴 것은 시린 레몬에이드가 전부였을지라도. ●
– 글 이샘 목프로덕션 대표, 사진 김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