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을한바퀴돌았습니다.친구가간다기에,같이강남가는격으로아무런계획도없이간산청땅이었습니다.무위의sentimentaljourney라고나할까요.
산청땅은봄으로가득했습니다.지리산삐알의봄색은새삼맑고강렬하고,아름다웠습니다.봄을한껏머금은그땅의지기는더할수없이부드러웠습니다.
곡점과시천리이정표를보면서한밤중에도착한단성면의호젓한산골에위치한한암자.고등학교선배가이뤄놓은도량이었습니다.자신을사주(寺主)라고하더군요.칠흑같은한밤중이었지만,지리산의실루엣은외경심과그리움으로다가왔습니다.여늬사갓집같은곳의문을두들겨마련한동동주,그리고담가논더덕술로밤의지리산에몸과마음을온전히맡겼습니다.
두송(斗松).그암자앞에참잘나고웅장한소나무한그루가있었는데,아침안개속에드러내는그자태에숨이막힐지경이었습니다.아내를교통사고로여위었다는선배는,그소나무를아내돌보듯하더군요.얼마전점안한법당의불상도참여성스러웠습니다.
남명조식선생의유적을둘러봤습니다.가는길들은꽃길이었습니다.하얀벚꽃의터널이랄까요.마음이참평안했습니다.
그쪽인근에서자란내가참부끄러웠습니다.남명선생을그렇게모르고있었습니다.참순진해보이는여성해설자는자신의역할에남다른긍지를갖고있는듯했습니다.그래서좀오바하기도했습니다.‘남명죽이기’는지금도계속되고있다는대목을지적하는과정에서그랬습니다.
6백여년된매화나무가있는‘정당매’라는곳에서는남명의또다른면모를엿볼수있었습니다.자신보다훨씬아래인사명당유정에게매화꽃을연계해보낸싯귀는성리학의대가라는,어찌보면엄정함과도덕률로상징되는조선선비남명이라는선입견을잠시나마버리게하더군요.후학을사랑하고아끼는남명선생의따뜻한인간적인면모랄까요.
통일신라시대의석탑두기가나란히서있는,단속사지(斷俗寺址).참아름답고단아한탑이었습니다.경주의감은사지의그것과닮았다고생각하고있는데,예의그순진한여성해설사가그부분을지적하더군요.
그리고구형왕릉.단정할수가없고전해지는곳이라고해서傳구형왕릉이라고했습니다.묘한느낌을주는무덤이었습니다.형체를갖춘돌무더기인데,영혼이들락거리게하는‘감실’같은것이있고,제단과석물들이있는것을보면무덤인것만은확실해보였습니다.그무덤보다나를끄는것은그옆의‘호릉각’이라는옛집이었습니다.으스름한음지.그대청마루에한동안누워있었습니다.옛가야의체취가그리웠습니다.아무도살고있지않았습니다.그저그조선기와집이그이름만으로왕릉을지키고있었습니다.적막,그자체였습니다.비몽사몽이라고하는게맞을것같습니다.사랑채에서누군가걸어나왔습니다.같이무덤속으로가자고하면나는어찌할까요.후다닥일어났습니다.
산청에는역사유적지만있는게아닙디다.‘조각공원’이라는곳은산청이더이상과거의땅으로만머무르고있는것이아니라는점을강조합니다.세계유수의현대조각가들의작품이산등성이에가득했습니다.조성하는과정에서가야옛고분군이발굴돼,군데군데무덤이섞여있는묘한곳이었습니다.박찬각이라는,산청군생초면출신의세계적인조각가를기리기위해산청군에서많은돈을들여조성한곳인데,잘알려지지않아서인지그리많은사람들이찾는곳은아닌것같았습니다.
‘무위의센티멘털저니’라고생각했는데,가만생각해보니회상의나들이는아닌것같았습니다.서울로돌아오는길.다시취기가왔습니다.간밤에맛과향기에취해주는대로받아마신더덕술이산청땅을벗어나면서다시찾아오고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