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형(李祐炯)을어떻게불러야할까.
그를처음만나물어봤더니자기도잘모르겠다는대답이다.
주위에선그를‘고지도연구가’라고부른다.
그렇지만막상이우형자신은아니라고말한다.
그는지도제작이주업이다.그러나그의인생에있어고지도연구는큰축이다.
이런그를단순히지도제작자로호칭하기엔그가남긴,그리고남기고있는족적이너무크다.
그가지난90년고산자(古山子)김정호(金正浩)의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새생명을불어넣는대작업을완성했을때그를두고주변에선‘신산자(新山子)’라고불렀다.
김정호의뒤를이었다는의미로,김정호의호인고산자에운을맞춘표현이다.
그를만나얘기를나누면서이런생각이언뜻들었다.그의언변이양파껍질같다라는것.
말을처음에는잘하지않다가조금씩조금씩,그리고는천천히크게자기의소리을내는.
아무도알아주지않는일을혼자서외롭게,그리고묵묵히매달리고있는한‘구도자’의습벽에이런것도있구나하는생각이들었다.
이우형(66)의지난20여년간의인생은이나라땅의모습을종이에정확하게옮기기위한노력의기간이다.
이런점에서김정호와는땔래야땔수없는인연이다.그도김정호가친구같은느낌이든다고한다.
대동여지도완성과‘김정호복원’등그가온갖정성과노력을다해온일들이모두김정호와관련된것이니그럴수밖에없을것이다.
(생전의李우형선생)
(김정호와의인연–대동여지도를완성하기까지)
그와김정호와의인연은그가‘지도만들기’에나서면서부터다.
이우형의지도인생은그가걸출한산악인이었다는점과연관이있다.
그는대한산악연맹의서울시연맹구조대장을지낼정도로젊은시절을산에서보내다시피했다.
산을많이다니다보니자연지도를공부하게되고또많이구입하게되면서지도에익숙하게된것이다.
그러던중지난70년대중반신문사에잠시몸담았던경력과이런저런일로‘산수(山水)’라는등산잡지를발간하게된것이지도인생의한사단(事端)이된다.
잡지사가경영난으로6개월만에문을닫게됐는데일년치구독료를선불로받은것이문제가된것이다.
고민끝에이우형은평소산행경험으로쌓아둔자료를바탕으로4색컬러등산용지도를부록으로만들어마지막호잡지와함께독자들에게보낸다.
“못보내드리는잡지는이부록으로대신해달라”는사과문과함께.
그런데이지도가예상외의큰호응을얻었고이를계기로그는지도제작자의길에접어든것이다.
그무렵나온경주와제주도의문화재지도는,이를테면그의지도제작자로서의첫‘작품’들이다.
당시만든경주와제주도의문화재지도는그가처음으로‘현장주의지도’의기법을써만든것이다.
예컨대제주도성판악의경우현지에서쓰는말인‘성널오름’으로표기하는방법을썼다.
그러다가80년초에는‘광우당’이라는전문지도제작회사를직접운영하기도한다.
그러나채산성에관계없이제대로된지도를추구하는그의성격상얼마안있다문을닫는다.
당시그는초등학교와중학교의지도교과서인‘사회과부도’를제작할정도의전문인이됐다.
이무렵이우형은김정호를만난다.
국토를그리는지도는물론역사를아우르는지도를만들다보니피해갈수없는것이바로고산자와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였다는이우형의회고다.
이우형이대동여지도를처음대한것은70년대말.대동여지도를대하면서이우형은놀라고또놀란다.
김정호의‘지도관’이자신의것과맥이통한다는것을느낀다.
“목판본대동여지도를살펴보는사이이것이보통정성과뜻으로이뤄진것이아니라는생각이들더군요.나에게헬리콥터를한대주고해보라고해도10년세월은족히걸리겠다싶었어요.이와함께,도대체이사람은무엇때문에이처럼방대한작업에손을댓을까하고궁금하기짝이없었습니다.”
대동여지도를보면서이우형이공감한것은그대동여지도가갖는이른바산경수경(山經水經)의개념.
“지도는땅만을그려놓은것이아닙니다.그땅에사는사람들이그땅을보는심성이나타나있습니다.우리땅의환경은유일한것이고우리식표현이있었을것입니다.등고선식으로그린오늘날의서양식지도와는달리우리선조들은산경수경을지도에담았습니다.이는물줄기중심의산줄기개념입니다.지도는읽기에따라수없는정보를가지고있습니다.언어권식생문화기후농경권역은단순한등고선식지도로는알수없습니다.대동여지도는이모든것을담고있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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