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이우형의연구는많은난관에부닥친다.
이우형은80년대초서울인사동고서점에서우연히우리나라옛지리서인‘산경표(山經表)’를발견한다.
그는1769년전북순창출신인여암(旅菴)신경준(申景濬)이펴낸이책을
대동여지도와비교하며연구에들어가는데서로맞지가않는것이었다.
산경표상의것과대동여지도상의것이서로틀린것으로돼있는것이었다.왜그런가.
이우형은몇날밤을새운끝에중요한한가지사실을깨닫는다.
산을우리적인시각으로봐야한다는것이었다.
우리의산은영어에서말하는마운틴(mountain)이나일본의야마와는다른개념의것이라는것을안것이다.
말하자면우리는산을정상(peak)의개념으로만이해하고있지만
우리선조들은그렇지가않았다는것.
우리옛산의개념,즉산경원리에서이르는우리산의뜻은
그산자락앞의들까지를포용한하나의덩치(규모)였다는것과
그모두를두고어느곳이든지그산의이름으로불렀다는것이다.
이런개념으로대동여지도에대입을하니신통할정도로맞아떨어지더라는것이다.
이우형은이같은개념을근본이론으로족보형식으로지도화한산경표도제작해낸다.
또하나현대지형도에서도잘나타나지않은능선줄기가
대동여지도에는명확하고도큰선으로나타난지역이있다는점도이우형을날밤으로새게하는의문이었다.
한남정맥끝부분의김포평야일대가특히그랬다.
그밋밋한논바닥에무슨이렇게굵은산줄기가있단말인가.
이우형은답답증에자다말고일어나“어디,고산자당신의혼백이라도있으면나와보라”고외치기도했다.
그는직접답사에나섰다.김포평야에가서논의모양을세심히살펴보았다.얼핏보기에거의수평면인김포평야였지만,그평야를동서로나누는이른바유역능선이분명히드러나고있었다.이유역릉을확인한순간이전작업을통해가장감격적이었다고이우영은회고한다.
이러한숱한난관끝에이우형은90년에대동여지도를완성해낸다.
이우형은김정호가목각상의어려움때문에동여도상에는총19,000여개였던지명가운데
7,400여개를뺀,11,700여개만대동여지도에판각했는데,
이우형이이누락된지명을일일이확인해추가시킨대동여지도3분의2축소판을완성한것이다.
이와함게그는‘대동여지도의독도’라는책자도함께발행,대동여지도의가치를새롭게부각시킨다.
이우형에의해실로100여년만에김정호의완전한뜻이이뤄진것이다.
당시이우형의대동여지도는풀사이즈크기로국립박물관에전시된다.
그의이작업은김정호대동여지도의완성이라는것외에몇가지점에서중요한의미를갖는다.
각종국학관계의연구는물론앞으로절실히필요해질국지기상예보등에도좋은기초자료가되고있다는점에서다.
(각고의노력끝에완성한대동여지도앞에서선이우형선생)
(김정호복원에바친각고의15년,그리고백두대간을위하여)
대동여지도의완성작업을하면서그는줄곧김정호와함께있었다.
의문이나면혼자서묻기도하고짜증이나면대들기도했다.
이우형의대동여지도완성은전생에어떤관계였던간에
이우형과김정호의끈질긴인연이가져다준우연찮은‘사건’으로꼽힐만하다.
이우형의10여년간에걸친대동여지도완성작업은어떤의미에서
‘김정호제모습찾기’의한축일수도있을것이며,그로서는당연히해야할일이다.
훌륭한지도를만든자랑스런우리조상김정호.
그러나우리들대부분은그의일대기를잘못알고왔고,지금까지도잘못알고있는사람들이많다.
이우형이들려주는,우리가알고있었던김정호이야기는이러했다.
“시골농부의아들로태어나어려서부터지도그리기를좋아했고,
지도를구하러한양으로올라와대궐안규장각에서지도를얻어본결과
실제지형과지도가너무나차이나는것을확인했고,
이에정확한지도만들기를필생의사업으로정해평생동안백두산을여덟번올랐고…
예순이되던1861년대동여지도의판목을완성했으나
대원군이다른나라에국내사정을누설시키는것으로오해하는바람에
옥에갇혀숨을거두었고판목도압수당해폐기됐고…”
이우형은단언한다.
“김정호는전국을뺑뺑돌지도,백두산을여덟차례오르지도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지도는그렇게만들어지는것이아닙니다.
또김정호는대동여지도때문에옥에갇히지도않았고판목이폐기되지도않았습니다.
적어도그런기록은우리역사어디에도없습니다.”
그런데우리들은대부분왜그렇게알고있었을까.
이우영은초등학교시절교과서에서그렇게배웠기때문이라고말한다.
적어도1990년도판전초등학교교과서에는이렇게기술돼있었다.
그당시까지‘조선인들은그렇게우매한위정자와뒤떨어진과학기술을갖고있었기때문에
우리의지배를받는게당연하다‘는일제의식민사관교육의잔재가
김정호의인생을그렇게만들어놓고있었다는얘기다.
이우형은이를바로잡기위해혼신의노력을다한다.
그노력중의하나가바로목판발견이다.
김정호의대동여지도목판은1931년까지도존재하는것으로,
당시조선총독부에서도알고있었던사실이다.
이것이1934년판조선어독본에서불타없어졌다는식으로기술된배경에는
바로일제의식민통치를위한‘의도된왜곡’이있었던것이다.
30년대까지는분명히남아있던목판들이어디갔을까.
이곳저곳의지인들에게협조를부탁해놓은이우영에게희소식을전한사람은
서지학자이종학(李鍾學)(전독도박물관장)이었다.
해방당시일제로부터우리측으로문화재가인수.인계되는과정에서작성된것으로보이는
대동여지도목판본인계서를제공해온것이다.
이를토대로이우영은또다시숱한탐문과조사를통해
마침내95년12월그렇게도찾던대동여지도목판11장을찾아낸다.
없어졌을것이라는통설속에서모습을감추고있던목판들이
이우영의집념어린노력끝에그모습을드러낸것이다.
물증을확보해낸이우영은그러나마음이차지않았다.
“내자신이고산자에대한새로운사실을발견해나가는과정중에서도
잠깐만다른생각을하다보면‘김정호는그래도전국을답사했을거야’
‘옥에갇혀숨진게맞을거야’‘목판은불탔을거야’하는기존의선입견이문득문득떠오르더군요.
초등학교때받은교육이얼마나머리속깊이각인되는지에대해정말깜짝놀랐습니다.
김정호에대한왜곡된기술을하고있는교과서가있는한
김정호의모습은계속일그러져있을수밖에없을것이라는생각이들었습니다.”
이우영은교과서의김정호편개정을위해본격적으로팔을걷어붙인다.
함께뜻을같이한국사편찬위의이상태(李相泰)박사,성신여대지리학과의양보경(楊普景)교수등의
도움을받아당시초등학교국어교과서를담당하고있던한국교육개발원이인제(李寅濟)박사등
교과서관련인사들에게자신이수집한자료와교과서를바꿔야할근거등이적힌서류들을보내기도했고,
이들을직접만나설득하기도여러번.
한때는논란의소지가많다는이유로김정호부분이아예교과서에서삭제될위기에까지처하기도했다.
이우영으로서는정말어이가없었다.
“김정호의인생이1934년조선총독부의조선어독본제작이후60년이상
일본의식민사관에이용된것도억울한데,
이분야한국사에둘도없는그의인생과업적을없는것으로하자니기가막힌일이었지요.”
(古山子김정호선생영정)
그러나이우영은이에주저앉지않고교육계등을대상으로집요한설득작업을계속한다.
중학교와지리등다른과목교과서필자에게까지로비를벌일만큼열심이었던
그의김정호에대한집념은끝내97학년도5학년1학기교과서에
김정호의개정된진짜이야기를실리게하는결실을거둔다.
이우영은그해11월초김정호를기리는차례모임을주관한다.
그는술을올리면서이렇게고했다.
“선생님,후손으로서해드려야할최소한예의를50년만에야차렸습니다.
이제선생님의어린후손들은재대로된선생님모습을배우게될것입니다.
너무늦어죄송합니다.마음편히쉬십시오.”
이우영은그러나아직도김정호에대한평가는완전히이뤄지지않고있다고말한다.
학계는그런대로되고있지만,아직도김정호에관해모르는부분들이너무많다는점을지적한다.
이우영은김정호가60나이에겨우겨우나무를구해가며혼자힘으로
높이가6m60cm나되고목판개수는1백20여개나되는거대한지도목판을판것은’
그의나라와땅과백성들에대한사랑의표현이라고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