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山, 그리고 安 允奉 선생

무슨책을꺼내보려는데,

뭔가책갈피속에서후루룩떨어진다.

이게뭔가.

편지들이다.30년전편지들이다.

까마득하게잊고지낸편지들이다.

딴에는잘보관하려고책속페이지에끼워놓았던것같다.

안윤봉씨라고,

마산서견습기자생활할적에알고지내던분이다.

그분으로부터온편지들이다.

신문사기획실장으로계셔서모두들안실장으로불렀다.

1980년대중반경돌아가셨다.

1978년종로가회동하숙하던때,

79년부천원미동주공아파트자취하던때,

그리고80년도곡동영동아파트신혼등의시절에보내주신편지들이다.

1977년’부여잡는손들’을뿌리치고상경할적에

제일섭섭해하셨던분이안실장님이다.

견습기자5-6개월간아버지,아니면큰형님처럼보살펴주신분이다.

남성동,오동동,진동등의술맛좋은집엔무조건나를데리고다니셨다.

그리고서울에서누구라도내려오면나를인사시켰다.

소설가이병주선생,소프라노이규도씨내외등이기억난다.

천석꾼의집에서태어나일본유학까지하신분인데,

말년에는무척가난하게지내셨다.

자산동자그만자택에는거의2만권에육박하는장서와헤아릴수없는음악레코드판들로

발디딜틈도없었다.장서들중에기억나는책이있다.김기림의’詩論’이었다.

가회동하숙시절인1978년초에보내온안선생의편지에이런구절이있다.

"…저는당일밤’음악의집’에서많이기다렸지요…"

아마도안선생과약속을한모양인데,내가바람을놓았단말인가.

그럴턱이없다.매일술에절어계시는안선생이뭔가착각을한모양이다.

마산창동,삐걱거리는나무계단으로올라서는2층에있던’음악의집’이다.

베토벤의’하일리겐슈타트의편지’를묘사한걸개그림이걸려있던,

뿌연한담배연기속의그집이새삼그립다.

조남윤형이하던그집은우리들이다들서울로올라오면서사라져버렸다.

1978년초까지도있었으니아마도70년대말까지는있었을것이다.

남윤이형은’음악의집’옛터에서얼마멀지않은골목길에형수랑’만초옥’이란식당을하고계신다.

신혼시절의도곡동으로보내온편지는’보고싶은영철씨’로시작되고있다.

"지금마산은가뭄이계속되어이마에구슬땀이쉴새없이흐릅니다.

그러나소주와보신탕,친구들과정다운음악,문학,미술이야기를나누며는

더위도사라지고있습니다.꼭이번여름휴가엔마산에서만나아구찜과소주를

나누면서옛이야기를가집시다."

끝없는술얘기다.선생의술은마산에서소문이날정도였다.

좀행세께나하는젊잖은분들은아예선생을기피하기까지할정도였다.

문학,음악,정치에대한해박한지식은술이한잔거나해지면끝간데를모르고펼쳐지곤했다.

대학졸업논문을북한언론에관해서썼었다.북한언론에서소련의언론을언급하지않을수없다.

레닌이만든공산당기관지’이스크라’가어떻고저떻고하는데,선생의눈빛이예사롭지않다.

아,그불꽃,불꽃,불꽃말이지.

선생은좌익활동의경력이있다.이게평생의족쇄가됐다.

서울의유수한언론사에있다가마산의신문사로끌려내려온배경에도그게작용했던것으로알고있다.

해서당시마산지역의중앙정보부분실이나반공연맹지부사람들에게선생은’밥’이었다.

그사람들은어떤자리에서든안선생을하대했다.

풋나기기자인내가어느술자리에선가그사람들과대판싸움을벌인것도그때문이다.

1979년12월8일자의편지에는"…세상이많이변화되어어리둥절합니다"라고쓰고있다.

10.26사태를언급한것이다.나흘후12.12사태가올줄은꿈에도몰랐을것이다.

그무렵선생을서울에서한번뵌적이있다.

국토통일원(지금의통일부)과연구과제계약차상경했을때다.

서울역부근어디선술집에서함께통음했다.선생은많이쇠약해져있었다.

통일원과계약한발표주제논문은남북한통일정책에관한것이었다.

별로내키지않았을것이다.

그래도먹고사려면해야하는게아니냐며씁쓸히술잔을기울이던모습이떠오른다.

선생의편지는1981년의것을마지막으로끊겨버린다.

연락도두절되다시피했다.나의불찰이물론컸다.마산갈때마다찾아봐야했는데,그걸게을리한것이다.

선생이돌아가셨다는소식은1984년경에들었다.돌아가신지한참지난후였다.

가슴을치며후회해본들무슨소용이있겠는가.

한잔술이라도올리려고묘소를찾고있는데그걸아는사람이없다.

애써연락이닿은이종사촌이라는분도안선생의묘소가어디있는지모른다고했다.

가족들도다들뿔뿔이헤어져행방불명이라는얘기도들었다.

지난해늦가을마산에서안선생과친하게지내시던90고령의한분을뵙게됐다.

안선생의유택을물었다.

모른다.나도모른다.모른다를연발하는데표정이별로안좋다.

안선생의궁핍한말년,그리고죽음으로이어지는과정이아무래도뭔가이상쩍다.

도대체아는사람이없으니말이다.설혹알고있는사람이라도썩내키지않은표정들이니말이다.

한가닥희망은있다.

지난해마산의어느신문사에서선생의지역사회문화활동에관한심포지움이있었다는소식을들었기때문이다.

선생의옛마산집의전화번호가생각난다.2국에0602다.이번호는거꾸로해도2국에0602다.

30여년이흘렀어도선생의옛전화번호가또렷이생각킨다는건,

선생이나에게보내는손짓일수도있다.

조만간쓴소주나한잔부어올릴수있을것같다.

사사로이보낸편지,그것도지금은이세상의사람이아닌망인의편지를

이렇게공개해도되느냐는지적이있을것이다.

지적과비판을해달라.그것들로선생에대한나의소홀했던마음을채찍질하고싶다.

선생에대한추모의염을그렇게해서라도잊지않고지켜갈수있다면

그어떤비난도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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