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香과 추억, 마산 龍馬山

용마산(龍馬山)은마산에있는산입니다.

오래된동네들인오동동,산호동의구마산지역에있는산으로,

높이는얼마안되는뒷동산같은곳이지요.

그래서일까,이즈음은용마산이라고부르지않는모양입니다.

이번에내려가보니언제부터인가용마산대신’산호공원’으로바뀌어있었습니다.

그러나어찌됐든우리들어릴적에는그이름도우람한’용마산’이었습니다.

산이름에용과말이들어갔으니어린마음에도그렇게느껴졌었겠지만,

기실마음한구석에는크고높은산이미지보다는

뒷동산정도의기억으로자리잡고있는곳입니다.

세월이많이흘렀습니다.어떤게용마산의실체일까요.

용마산에대한첫기억은국민학교입학을전후한것으로,

떠올리기에그리좋고아름다운것은아닙니다.

그산에서있은해괴망칙한사건때문지요.

그게유언비어인지는알수없지만,하여튼해괴망칙한사건이일어났습니다.

남자와여자가동네사람신고로그산숲속에서발견됐는데,

두사람이달라붙어있는상태였다고합니다.

남자가여자몸위에서죽었다나뭐라나.

하여튼그소문이당시마산에쫙퍼졌습니다.

나중에좀커서우리들끼리킥킥대면서좀유식한말로

그사건을떠올리면서하던말,그게바로’복상사’였던것이었습니다.

그사건때문에학교와부모님들로부터엄명이떨어졌습니다.

해지고는올라가지말라는것.

그리고봐도못본체하라는것.

그짓을하다놀라면그렇게될수도있으니,

봐도그냥못본체지나치라는것이었습니다.

(용마산’詩의거리’에조성된시비들)

용마산은잘가꾸어져있었습니다.

각종비석들이많은게인상적이었습니다.

비석들중에서도시비(詩碑)가단연많았습니다.

노산이은상을비롯해화인김수돈선생,권환선생,천상병선생,

정진업,박재호선생등주옥같은글로

마산과마산사람의심성을달래고어루만져주었던선배들이비석으로남아있었습니다.

이들선생의시비들은한곳에함께모여조성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이름을붙였습디다.’詩의거리’라고.

정진업선생과박재호선생이기억납니다.

1980년대초,막걸리집에서몇번뵌적이있었지요.

두선생들중한분은당시혼사를앞둔저의결혼식주례를자청하기도했었지요.

그러나그게이뤄지지는않았습니다.왜그랬는지도모르겠구요.

정진업선생은용마산’詩의거리’에서’갈대’를노래하고있습니다.

박재호선생은’간이역’으로그자리를지키고있습니다.

(花人김수돈선생의대표시’우수의황제’가새겨진시비)

(권환선생의대표시’고향’이새겨져있는시비)

용마산의시비가운데빼놓을수없는게있습니다.

이원수선생이고향마산을노래한시로,

대한민국사람이면모르는사람이없는’고향의봄’시비입니다.

1968년가을무렵이었습니다.

용마산에이원수선생의’고향의봄’시비(詩碑)가세위진다는것이었습니다.

그것을’취재’하러갔던기억이있습니다.

이원수선생을그때처음뵈었습니다.

가녀린몸매에검은뿔테안경을썼던모습.

엷은가을볕,그리고소슬바람에팔랑이던억세풀사이에

드문드문서서함께부르던’고향의봄’이생각납니다.

그때찍었던사진들이몇장있습니다.코니카사진기로찍었던흑백사진들이지요.

1977년봄무렵이었을것입니다.

그곳신문사에견습으로들어간지몇날안되었을때였었지요.

그때무슨마음으로용마산을올랐는지모르겠습니다.

나무에기대서서호수같은바다를바라보고있었습니다.

어떤소년이내앞에서나랑같은모습으로있는줄몰랐습니다.

안면이좀있었습니다.

그소년은신문사윤전부사환을하던고학생이었습니다.

이름이나와같았습니다.무슨영철…

왜산에올라와여기에있느냐.

그냥요.

두눈에궁기가느껴졌습니다.

배고프제?

공자가운데토막같은소리를늘어놓았습니다.

희망을잃지말아라.

고난끝에낙이온다.

열심히공부해라.

가끔톨스토이,푸쉬킨등의말도섞었을것입니다.

누런궁기에근심가득한얼굴의그소년은지금쯤어디에서무엇을하고있을까요.

(이원수선생의’고향의봄’시비)

다른한분의비석은좀특이한것입니다.

‘불망비(不忘碑)’이지요.

고인의생전업적과정신을잊지말고계승하자는뜻에서세우는것인가봅니다.

그불망비는김형윤선생을위한것입니다.

김형윤선생은그분생전에뵌적은없습니다만,

그분의행적과사상등은익히잘알고있습니다.

마산이낳은훌륭한언론인이지요.

그분을빼고마산언론사를운위하기는어려울정도로그분이남긴족적은큽니다.

그분의호가뭔지아시는지요.

‘목발’입니다.한문으로’目拔’,즉눈을뺀다라는뜻이지요.

왜’목발’인가.

일제강점당시,왜놈순사의눈을두손가락으로뺐다고해서붙여진이름입니다.

선생은언론인이자강점된식민지조국의아픔을누구보다가슴아파한애국지사였던것입니다.

(김형윤선생’불망비’)

‘김형윤불망비’를지나충혼탑쪽으로올라가니눈에익은비석이하나나옵니다.

‘대마산항도제선언문碑’가그것입니다.

1966년이었지요.문학과예술의도시,

마산의전통을이어서발전시켜나가자는취지로마련된게’마산항도제’입니다.

그축제의정신을되새겨후세마산사람들에게남기기위해세운게이비석입니다.

그때중학교3학년이었는데,제1회항도제전야제때밤세워마산거리를배회했던기억이납니다.

(‘대마산항도제선언문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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