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바르드나제
BY koyang4283 ON 7. 14, 2014
예두아르트셰바르드나제(EduardShevardnadze).좀까다로운이름이다.그렇기에지금사람들에게는좀생소한느낌을주겠지만,1980년대말부터1990년대초까지세계의변화를주도했던舊소련의마지막외무장관이바로그다.러시아사람들의이름은표기도그렇지만발음하기도어렵다.셰바르드나제가처음세계외교무대에등장했을때발음이어려워혼란이많았다.보리스옐친도마찬가지였다.옐친이고르바초프에이어러시아대통령으로등극했을때우리언론들은그의이름을‘옐트신(Yeltsin)’으로표기했던게기억난다.
셰바르드나제전소련외무장관이우리의뇌리에남아있는것은,그가옛소련개혁.개방정책의설계사로동서냉전체제붕괴에주도적역할을했기때문이다.고르바초프소련공산당서기장의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은사실상1985년셰바르드나제가외무장관에발탁되면서시작됐다고보는게정설이다.그는고르바초프를등에업고아프가니스탄에서소련군대를철수하고,미국과역사적인전략핵무기감축협정을끌어냈다.동.서독통일을지지하면서베를린장벽붕괴에뒤이은1990년독일통일의막후협상을중재하기도했다.
이시기에‘시내트라독트린’이나온다.셰바르드나제의외교정책을상징하는말이다.그는“소련은소련의길을갈테니너희는너희의길을가라”며바르샤바조약기구국가들이견지했던기존의‘브레즈네프독트린’을버릴것을요구한다.그의이외교정책은프랭크시내트라의인기곡‘마이웨이’에서착안된것이란후문이다.그래서그의이외교정책이‘시내트라독트린’으로불린것이다.
지금생각해봐도아찔한것은동.서냉전의종식과정이다.세계의역사를바꾼이과정이얼마나아슬아슬하게진행됐다는것은삼척동자라도아는사실이다.까딱잘못하면세계전쟁이일어날수있는일촉즉발의위험한과정도있었다.냉전체제공산주의의강력한한축이었던소련의외무장관으로이과정을주도해나갔던인물이바로셰바르드나제인것이다.
셰바르드나제는한반도와도인연이깊다.1990년한국과소련과의수교의주역이기때문이다.당시그는북한과의관계악화를우려해양국간수교를반대했다.그러나그즈음평양을방문해金日成의억압적이며불통적인태도를보고입장을바꿨던것으로전해진다.그는대북포용정책을골자로하는DJ의‘햇볕정책’지지자이기도했다.또1983년소련의KAL기격추당시외무장관이기도했다.
그셰바르드나제가지난7일지병과노환으로세상을떴다.향년86세.그의타계소식을맞아전세계가애도를표했다.애도의표현속에는그가세계의냉전체제를끝내고새로운세계질서를만드는데중요한역할을했음이강조되고있다.
1985년에서1991년까지의격변기에서소련의외무장관으로세계의변화를주도한셰바르드나제지만,말년은그리순탄하지않았다.1991년고르바초프의사임과함께외무장관에서물러난그는소비에트연방에서독립한조국조지아로돌아간다.1992년군부의도움으로당시국가원수지위인국가평의회의장에올랐고,1995년11월대통령선거에서승리해조지아2대대통령으로취임한다.그러나만성적인경제난에다친인척의부정부패,권위적이고강압적인통치스타일이신생국조지아를가난과혼란에빠뜨렸다는비판속에대통령재직도중두번의암살위기를겪는다.결국2003년11월총선부정선거논란으로대규모반정부시위가일자야당과의협의끝에무력충돌없이하야를선언한후재야에묻혀지내다죽음을맞이한것이다.
그가은둔했던수도트빌리시의私邸는좀독특했다.집안에무덤이있었기때문이다.그보다먼저지난2004년세상을뜬아내나눌리여사의무덤이다.셰바르드나제는부인을끔찍이사랑했던것으로전해진다.그는매일아내를생각하며무덤에꽃을바쳤다고한다.엄혹한이해관계가상존하는국제외교무대를주름잡던그에게이런로맨티스트로서의면모가있었다니새삼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