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한창다닐적에학고재골목안에‘시인과화가’라는주점이있었다.조그만술집이었는데,좀독특했다.사방과천정이수묵의낙서로뒤덥히고,낡은손풍금이한귀퉁이에놓여있는빈티지풍의주점이었다.
이주점의주인은변씨성을가진나이지긋한여자였는데,우리들은그여주인을’변여사’라고불렀다.물론그후에이름을알기는알았지만,’변여사’라는호칭속에는뭔가범접하기쉽지않은자존같은게묻어있었다.나중에알고보니시도쓰고수필도쓰는문학가였고,그래서일것이다.그고상함과묵직함때문에우리들의술맛을더욱좋게했는지도.
이술집에는나이지긋한술꾼들만들어올수있었다.최소한50세이상이돼야만,어느정도행세할수있었다.1990년대초반부터드나들기시작한나는나이를좀속였다.한창다니던마흔네살때,쉰살이라고둘러댔다.지금은고인이되신심상곤선배도문인이셨기때문에그집을줄창찾았고,나는그꽁무니에붙어다녔다.그렇게해서나는변여사와잘지내며그집의단골로행세할수있었다.
그무렵어느날인가,변여사가나에게부탁을했다.‘시인과화가’의간판을좀써달라는것이다.거칠고묵직한나무에옥호를쓴간판이나의손에의해만들어졌고,그간판은그후좀더전문가가만든것이나오기전까지그집대문옆에걸려있었다.
‘시인과화가’의분위기는참좋았다.장관을지냈던이모씨는당시마라톤광이었는데,술만마시면폐활량늘인다고손나팔로익살스런연주를하기도했고,지금은고인이되신원로가수인반야월선생의손바닥반주가곁들여진흘러간옛노래가흘러나오기도했다.흘러간영화스타인이민씨도연로한나이에가끔씩들리기도했다.
단골들끼리모이면주모가치는손풍금에맞춰모두들같이노래를부르기도했다.언젠가는장면박사의조카가예쁜미국부인을데려다놓고술에취해세레나데를부르기도했다.
1998년신문사를나와한창그집의단골로행세하고있을때,변여사가나를보고속된말로꼬드겼다.술집을해보라는것이다.
할일을찾고있던나는아무리생각해봐도잘하는일은술마시는것밖에없다는생각에그럴작정으로움직였다.그러나생각대로되지않았다.나름대로‘시인과화가’를어떻게꾸미고어떻게운영할것인가에대한계획도구체적으로세웠으나중도에그만뒀다.말못할사정이생긴것이다.당시아침방송스타였던이모와정모씨가근처에큰집을사주점을연탓도있다.마음을접고다시’술꾼’으로부지런히다녔다.
인사동골목의퇴락과함께변여사도가게를옮겼고,우리들도세월의시세에따라잘들리지도못했다.언젠가인사동을나가보니그집은‘귀천’이라는찻집으로바뀌어져있었다.故천상병시인의부인인목순옥여사가새롭게차린찻집이었다.목여사도몇년전별세해천시인을따라갔다.
어느해인가,청진동유정낙지집에서변여사를만났다.옷차림이기이했다.승복이었다.머리는깎지않았기에웬일인가고물었더니세상을떠돌기에편한복장이라는간단한말만되돌아왔다.그후학고재골목끄트머리에서새로가게를한다는말을들었고,그집을몇차례간기억은있다.그게벌써6,7년전이다.
그렇게세월이흐르면서‘시인과화가’와변여사에대한기억도추억으로떠올려지고있었는데,얼마전참안타까운소식을전해들었다.인사동시절,알고지내던이상교시인이전한부음이었는데,그게변여사의것이었다.몇년전병환으로타계했다는것이다.잠시멍해졌다.몇번을확인하고,그래도못믿겨져네이버검색을했더니사실이었다.
허망스러웠다.그래도어디선가에서풍금과글을벗삼아세상을노래하고있을줄알았는데그사이병을얻어많이앓다가돌아가셨다는것이다.어딘가에서잘지내고계실줄로만알았던나의이둔감함과무심함에스스로혀를찬다.
변여사는풍금앞에앉으면항상동요로노래를시작했다.퐁당퐁당돌을던져라.제목은모르겠지만이동요를유달리잘불렀던것으로기억한다.그동심으로좋은세상에가계실줄로안다.늦게나마명복을빈다.
사진들은1998년니콘F로찍었다.플래시를안쓰고찍은사진이라좀거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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