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非世說) 대통령의’ 初心’
대통령제하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견지해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정신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로 시작되는 우리 헌법 제 1조에 담긴 뜻도 그 정신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새삼 주권재민의 정신과 헌법 제 1조를 운위하는 것은 그 만의 ‘정의’를 앞세우면서 헌법 제 1조를 읊조린 유승민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임기 1년 여를 남긴 상태에서 안팍으로 어려움에 처한 박근혜 대통령의 현 시점을 주권재민의 측면에서 한번 따져보고자 함이다.
총선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다. 공식 언론매체는 그래도 젊잖은 편이다. 그와 별도로 SNS 상에서는 차마 듣기에도 역한 벼라별 욕설이 난무한다. 탄핵까지 들고 나오기도 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 있다. 경제실정은 단골메뉴다. 거기에다 북한핵문제 등을 둘러 싼 안보무능까지 겹쳐진다. 그밖에도 세월호, 위안부 대일협상, 교과서국정화, 테러방지법 등 몇몇 현안이 모두 박 대통령과 현 정부의 잘못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에 더해 4.13 총선과정에서 청와대와 집권당이 보인 지저분한 행태는 정권기반을 휘청거리게 하면서 그나마 견고한 지지층이었던 보수세력의 차디찬 외면까지 자초하고 있는 상태다. 이 모든 것이 정권의 정점에 있는 박 대통령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물론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경제실정과 관련해 박 대통령은 어느 자리에서인가 글로벌 차원에서는 그래도 ‘선방’이라고도 했다.
얼마 전 있은 언론사 간부들과의 오찬 간담회는 근자의 시국과 관련해 박 대통령의 시각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어정쩡했다. 뭔가 어떤 결단을 기대했던 여론은 실망 수준이었다. 박 대통령은 민심의 주요 잣대인 총선 결과와 관련해서도 남 말 하듯 한 발을 빼는 언설의 일단을 드러냈다.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고, 그래서 3당체제를 만들어 준 것”이라는 말로 이번 선거결과를 규정지었다. 패배를 자초한 볼썽사나운 계파분열의 핵심인 ‘친박(親朴)’ 논란에 대해서도, 자신이 그런 계파를 만든 적도, 관여한 적도 없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이 말 속에는 자신과 청와대는 이번 총선의 공천에 개입한 적이 없다는 것을 에둘러 강조하려는 흐름이 읽혀진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이런 말은 설득력이 없다.
국민들은 잘 안다. 경제와 안보문제, 그리고 총선을 포함한 현 시국 모든 난맥상의 중심에 박 대통령이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대통령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박 대통령이 이를 모른다면 큰 문제다. 시국을 보는 타당한 인식이 아니다. 만일 인식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총선 하나만 놓고보자. 선거 전 대통령 주변에서 대통령에 대한 경고가 대통령의 주변에서 많이 나왔다. 대통령이 포용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 그리고 여권 내부의 이전투구식의 골육상쟁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런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시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결국 국민은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오만과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에 대해 참담한 심판을 내렸다. 이것이 이번 총선에 나타난 민의(民意)다. 박 대통령이 선거 후 “민의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는데, 그 민의 또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큰 오산이다.
역대 대통령의 경우를 놓고보면 집권 후반기 거의 대부분 어려움이 온다. 이 때 반드시 거론되어지는 말이 있다. 바로 ‘초심(初心)’이란 말이고, “초심으로 돌아가라”고들 권유한다.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일을 시작할 때의 결의와 각오로 한번 쯤 되돌아보라는 뜻이다.
이 초심을 놓고 극단적인 영욕을 오간 대통령은 지난 해 별세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취임하자마자 단행한 그의 개혁정책은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나회’ 해체를 통한 군 개혁, 공직자재산등록, 금융실명제, 두 전직 대통령 사법처리 등의 개혁으로 그의 지지율은 90%를 웃돌았다. 그 당시 김 대통령은 국민의 눈높이에서 헌법 제 1조를 받들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개혁대통령의 모습이었다. 그는 먹는 것 하나에도 국민의 입장에 섰다.
이런 일화가 있다. 당시 청와대 단골 메뉴였던 칼국수를 출입기자들과 함께 한 오찬자리에서다. 한 숫갈을 뜨던 김 대통령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다. “어, 우째 내 꺼는 좀 다르네.” 대통령 옆에 앉았던 한 기자가 무슨 말인가 싶어 살펴봤더니 김 대통령이 칼국수 국물을 뒤적이더니 그 기자의 칼국수와 자신의 칼국수를 비교하면서 그 속에 든 멸치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자신의 칼국수에 든 멸치가 기자들의 그것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우스개성의 이 발언 속에 당시 김 대통령이 통치자로서 국민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읽혀지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그런 김 대통령의 대통령으로서의 최후는 비극적인 것이었다. 집권후반기에 터진 권력비리성의 한보사태를 필두로 연이어 드러난 측근들의 비리와 특정지역 편중인사, 그리고 국정농단과 부정부패가 핵심인 아들 김현철을 둘러싼 ‘김현철 게이트’ 등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으로 낙인되면서 식물정권으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 방만하고 무능한 경제정책으로 인해 1997년말 국가부도 위기가 오면서 IMF 구제금융사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임은 결국 김 대통령에게 귀결돼 ‘최악의 정부’라는 역사적 오명으로 그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초심의 중요성이 있다. 어느 광고문구 처럼 ‘처음처럼’의 ‘초심을 유지했다면 그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심의 결과로 잠간 반짝해진 것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오만과 독선적 통치행태가 결국은 정권의 발목을 잡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도 당연히 초심은 있다. 그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언급된 여러 말들이 있다. ‘꿈’ ‘행복’ ‘창조경제’ 경제민주화’ 안전한 사회’ 등등. 하지만 이런 말들은 집권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레토릭들로서 공허하게만 들릴 뿐이다. 이런 말 말고 박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 언급한 말이 생각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국민의 상식이라는 입장에서 쇄신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던 대목인데, 2012년 그의 한나라당 비대위위원장 시절의 말이다. 이 말 속에서 언급한 ‘국민의 상식이라는 입장’이 유난히 귀에 들려온다. 그 게 박 대통령의 초심이고 주권재민의 헌법 제 1장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수사성의 말은 그만 하고 그 말의 정신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그 게 박 대통령의 초심이다.
“영광의 시간은 짦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을 길었다.”
김 영삼 전 대통령의 퇴임사 한 대목이다. 여러 말이 많았지만 핵심은 이 말에 다 스며있다. 박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이 퇴임사를 반면교사로 되새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