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과 반야월의 충무로 ‘무정열차’
1980년대 초, 한참 충무로 골목을 쏘다닐 때다. 낮에 마신 설주의 여운이 이슥해지는 게 아쉬었을 것이다. 으스럼해지는 초저녁 무렵 한 주점에 들어섰다. 그 집은 엄밀히 말하면 주점이 아니라 식당이다. 꼬리곰탕으로 유명한 파주옥인데, 훤한 대낮부터 꼬리곰탕으로 안주 삼아 술 마시는 사람들도 많았다. 겉절이 김치가 특히 맛 있었다. 그 집은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친구와 둘이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뭔가 좀 소란스럽다. 주인 아주머니를 비롯해 몇 안 되는 손님들의 시선과 환호를 모으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마주앉아 약주를 마시고 있는 두 사람이다. 이 두 분이 목소리와 손 반주로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손벽을 치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기도 하고, 그 사이에 목소리로 흥을 돋구어 가면서 두 분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분들은 반야월 선생과 박시춘 선생이었다. 두 분은 술잔을 앞에 두고 그렇게 같이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친구사이인 두 분은 가끔 둘이서 술을 마시면 그렇게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가요계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이 두 원로가 충무로 한 조그만 주점에서 손 반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흔치않은 장면이었다. 상상해 보시라. 가요계의 대 원로 두 분이 주점에 앉아 목짓, 손짓, 어깨짓으로 마주 앉아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흘러간 여러 노래들이 나왔다. ‘애수의 소야곡’도 나오고 ‘울며헤진 부산항’도 나왔다. 두 노 예술가가 정겹게 부르는 노래는 듣은 사람들로 하여금 추억에 젖어들게 했다. 두 분은 약간 거나해진 상태의 표정이었지만, 박자라든가 음정 하나 틀리지 않고 노래를 썩 잘 불렀다. 한 곡 끝날 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부를만큼 불렀다고 느껴질 무렵이었다. 듣고있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선생님, 그거 와 안있습니꺼. 무정열차 한 곡 좀 안 되겠습니까.” 듣고있던 사람들의 면면이 그 때서야 눈에 들어왔다. 다들 충무로에서 영화와 가요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임권택 감독이 그들 중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임 감독은 그 당시 근처 목욕탕에서 자주 보곤했다. 언젠가 목욕탕에서 만난 임 감독에게 어릴 적에 본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화제로 한 참을 얘기한 적도 있었다.
그 날 술집에 앉아있던 그 사람들 중에는 남포동이 특히 기억난다. ‘무정열차’를 신청한 사람이 남포동이 아니었던가 싶다. 두 선생은 좌중을 한 바퀴 휘둘러보고는 서로 시선으로 뭔가를 주고 받았다. 이어서 나오는 목소리 반주. 그 노래에는 경부선 열차가 달린다. 전주에 열차 달리는 음율이 있다. 그 걸 목소리로 흉내내어 전주로 삼더니 이어서 노래가 나온다. “밤차는 가자고/소리소리  기적소리 우는데/옷소매 잡고서 그님은/ 몸부림을 치는구나/정두고 어이 가리/ 애처로운 이별길/낙동강 굽이굽이  물새만 운다/눈물어린 경부선.” 노래가 나오자 난리가 났다. 일어서 함께 따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춤 추는 사람도 있다. 두 분은 이 노래를 3절 끝까지 불렀다. 이 노래 글은 반야월 선생이 지었다. 곡은 박시춘 선생의 것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아니었다. 진주 출신의 이재호 선생이 만든 곡이었다.
두 선생의 노래가 끝나면서 파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로 술잔들이 오갔다. 술김이었을 것이다. 두 선생 앞으로 갔다 .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박시춘 선생에게 다가가 말했다. “마산에서 어릴 적에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그 때 남성동 우리 집으로 오신 기억이 납니다.” 박시춘 선생이 뜻밖이라는 표정이다. “어, 마산? 남성동 집이면 명주 집인데, 그라모 니가 우째 되노?” “예, 제가 큰 아들입니더.” 박시춘 선생은 어머니에게는 친정의 아저씨 뻘로 듣고 있었다. 그래서 1950년대 후반 마산에 공연을 오면 남성동 우리 집으로 들리시곤 했는데, 그 기억을 내가 끄집어낸 것이다.
그 술집을 나온 기억은 희미하다. 박시춘 선생은 소주 잔을 계속 내게 안기셨고 나는 그것을 주는대로 받아 마셨다. 물론 반야월 선생 것도 받아 마셨다. 반야월 선생 고향이 마산 아닌가.
세월이 흘렀다. 2009년인가, 재경향우회 행사를 준비하면서 반야월 선생을 여러 차례 만나 뵈었다. 사무실이 명보극장 뒤에 있었다. 선생 사무실에는 우리 전통가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렸다. 걔중에는 시인도 있었고 언론인 출신도 있었다. 국제신문에 있던 윤익삼 선배도 그곳에 있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선생이 일행을 근처 순대국밥집으로 이끌었다. 소주잔이 오갔다. 일행 중 시인이라는 분이 노래를 잘 한다고 했다. 그 사람들끼리는 서로 만나 술을 마실 때면 으레 흘러간 노래를 부르는모양이다. 몇몇이 노래를 불렀고, 반야월 선생은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선생이 그 시인더러 노래 한 곡을 청했다. ‘무정열차’를 불러보라는 것이다. 시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노래를 불렀다. 선생의 손이 움틀거리는듯 싶더니 술상을 치면서 반주를 했다. 옛날 그 모습이었다.
두 분 선생 모두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 저 세상에서도 둘이서 함께 손 반주를 맞춰가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밤차는 가자고/ 소리소리  기적소리 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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