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비, 잘 내린다. 이렇게 장마비가 내리면 으레 떠올려지는 게 손창섭 선생의 ‘비오는 날’이다. 그 소설 속의 비는 나를 안과 밖의 경계를 짓게 한다. 그리고는 옛날 어둔 저녁의 미아리 텍사스촌 어느 허름한 집, 비 떨어지는 처마 밑을 서성거리게 한다. 단지 비가 왔기 때문에 종로서 막걸리를 마시다 어떤 기억 속으로 나를 내 몰았다. 내 곁에 누가 있었다. 김각 선생. 서로를 확인한 둘은 이윽고 그해 무슨 문학상 수상작인 “어둔 기억 속의…”을 얘기하고 있었다. 비오는 날, 언제까지 이런 기억에 머물런지 모르겠다.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 남매의 음산한 생활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에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이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이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접어 있는 인생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