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티지 포인트(Vantage Point).’ 여러 뜻이 있는데, 대충 집약해보면 ‘좋은 위치’라는 의미다. 이 말을 검색해 보았더니 2008년에 개봉된 헐리웃 스릴러 영화인 ‘밴티지 포인트’가 도배를 하고 있다. 딱 한 건 기사를 빼놓고는 전부 이 영화에 관한 것이다.
얼마 전 옛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한 자리에서 좀 습쓸한 얘기를 들었다. 옛 회사에서 한 때 담당해서 만들었던 영문 저널이 지난 해 폐간됐다는 것. 그 영문 저널의 이름이 ‘밴티지 포인트(Vantage Point)’다. 그 회사가 1998년 김대중 정권에 의해 국영통신격인 연합통신에 합병되면서 그 통신사에서 계속 발간돼 왔는데, 거기서 그만 그 수명을 다한 것이다.
그 얘기를 전해준 선배가 밴티지 포인트를 만든 장본인이다. 1978년 박정희와 김일성의 남북관계가 대결국면으로 치닫던 시기에 대외 심리전 차원에서 박정희 정권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구상돼 나온 게 밴티지 포인트다. Vantage Point의 사전적 의미가 ‘좋은 위치’인 만큼 저널의 타이틀을 밴티지 포인트로 한 것은 말하자면 우위의 입장에서 북한을 본다는 취지로 채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코리아헤럴드 기자 출신인 그 선배에 따르면 밴티지 포인트는 그 무렵 홍콩에서 발간되던 ‘커른트 이슈(Current Issue)’를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커른트 이슈는 대만 정부가 역시 대결관계에 있던 중국(당시에는 중공이라고 불렀다)의 동향을 알리기 위해 발간하던 영문 잡지다. 홍콩에서 그 잡지를 만들어 배포한 것은 대외적으로 그 것이 중국에서 만드는 것으로 인식되게 하기위한 것이다. 그런 만큼 잡지의 내용은 언듯 보아 상당히 중립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은근히 중국을 비난하면서 대만의 우월성을 내용 속에 스며들게 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저널인데, 밴티지 포인트도 그런 점을 차용한 것이다.
밴티지 포인트는 1978년 창간된다. 내가 그 회사에 입사한 게 1977년이니 그 이듬해 나온 잡지다. 내가 그 잡지 팀에 합류한 것은 1982년이다. 국문 보도파트에 있다가 그리로 옮긴 것이다. 영자신문 출신으로 당시 차장으로 있던 분이 신문사로 다시 가는 바람에 내가 차출된 것인데, 그 때 부서장이 앞에서 언급한 그 선배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아 그 선배마저 영자신문으로 다시 갔다. 졸지에 혼자 남게 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선배는 이미 영자신문으로 갈 마음으로 나를 지목해 데려갔던 것이다. 그 선배는 그 ‘죄’로 그 후 술을 여러 차례 샀고 지금도 간혹 만나 술을 마시면 항상 술값을 낸다.
밴티지 포인트를 발간하던 부서는 국제부(나중에 국제국으로 개편)로, 회사 건물의 맨 꼭대기 층에 있었다. 나는 졸지에 혼자 남게 되었는데, 참 어려운 상황이었다. 북한문제를 보는 시각은 어느 정도 이력이 있었지만 우선 영어가 문제 아닌가. 해독은 그렇다치더라도 쓰기, 그러니까 라이팅(writing)이 필수적인데 그 게 초보단계였으니 나도 난감했고 회사도 난감한 문제였다.
특출한 방안이 없었다. 영어만 잘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회사측에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꾸려 나가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은 잡지를 만드는 것이다. 당시 국제부에서는 월간으로 밴티지 포인트를, 그리고 뉴스레터 형식의 주간으로 ‘노스 코리아 뉴스(North Korea News)’를 만들고 있었다. 이 영문 저널들은 당시 전 세계 130여객국과 국내의 외국대사관과 학교. 연구단체에 배포되고 있었는데, 그 호응도가 좋았다.
참 난감했지만, 나는 용케도 버텨 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임기응변이었다.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그런 임기응변이 잘 온다. 젊었을 적 그랬다는 얘기다. 기 발행된 잡지들의 기사 아이템을 카테고리별로 분류해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예컨대 제일 많이 나오는 김일성 동향을 현지지도나 연설 등으로 나눠 관련기사를 함께 모아 놓는 방식이다. 그 작업을 사흘밤을 꼬박 새워가며 했다. 스크랩북이 한 캐비닛 가득했다. 그리고는 바로 업무에 들어갔다. 매일 나오는 북한뉴스를 분류된 항목별 기사들 중 제일 좋은 문장으로 대치해 써 가는 것이다. 문제는 기사문이었지 내용은 아니었다. 북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떠듬떠듬 타이프라이팅해서 주간도 만들고 월간 밴티지 포인트도 만들었다. 회사에서 좀 놀랐을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해서 밴티지 포인트를 만들어 나갔다.
그 무렵 기자 한 명을 채용했다, 영어가 좋았다. 그러나 그 친구도 얼마 안가 국내 일간지로 옮겼다. 일도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장래를 생각하기엔 첫출발의 구직자에겐 적절치 않은 자리였던가 보다. 그 친구는 후에정치부 기자로 명성을 날린 후 뉴질랜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목회 일을 한다고 듣고 있다. 그 후에 여기자가 들어왔는데, 역시 결혼을 한다면서 얼마 안 있다 나갔다. 그 여기자는 몇년 후 모 방송의 아나운서가 돼 있었는데 그 무렵 한번 만났다.
국제부에는 밴티지 포인트 창간이래 줄곧 여기자가 근무했다. 아버지가 원로 군 장군이었던 이 아무개, 유명 문학가를 아버지로 둔 김 아무개, 퇴계로 유명 병원장의 딸이었던 윤 아무개. 모두들 지금은 뭘 하는지 모르겠다. 외대 영어과를 나왔던 김 아무개는 모 대학의 영문학과 교수로 있다는 것을 최근 그녀의 부군이 한국 시인협회장으로 선임됐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알았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다. 밴티지 포인트와 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고, 그 일을 1990년 6월 퇴사할 때까지 8년 가량 했다. 밴티지 포인트는 4×6배판으로 페이지는 항상 32 페이지였다. 메인 스토리는 유명학자들의 논문이나 기고문을 번역해 실었다. 글이나 필자의 선정이 꽤 엄격했다. 남북관계에서 중립가치적인 성향의 글을 많이 선정했는데, 그런 만큼 편향적인 학자나 언론인은 우선 제외됐다. 번역은 외부 인사에게 맡겼다. 번역을 제일 많이 한 분은 계광길 선생이다.
코리아헤럴드 주필 시절부터 해서 연합통신 편집상무 때까지 했다. 그 덕에 그 분 과천 댁에도 많이 들렸다. 관악산 등산에 홀로 나섰다가 심장병으로 별세했는데, 아마도 통신사에서 전격 해임 당한 충격이 컸던 것 같다. 계 선생 후임이 코리아타임스 논설위원을 역임한 한기형 선생이다. 수유리에 댁이 있었는데, 이 분도 슬픈 죽음을 맞았다.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지방을 다녀오다 충돌사고로 내외가 함께 간 것이다. 아침에 원고 픽업을 하러 수유리 집에 들리면 항상 원탁 테이블에 앉아 파라다이스 한 잔을 내게 안기던 분이다.
코리아헤럴드 김각 논설위원이 그 다음으로 맡아 했다. 회사가 가까워 원고 픽업하기가 쉬었지만, 갈 때마다 술이었다. 참 많이 마셨다. 어떨 때 가면 좋은 술집에 관한 신문기사를 찢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때면 회사 차를 타고 마시러 갔다. 김각 선생도 몇년 전 별세했다.
논문 다음이 분석기사(Analysis)로, 한 건의 주요 북한 이슈를 해설하고 분석하는 기사다. 이와 함께 주요 북한 동향에 관한 기사를 몇 건 리포트 형식으로 게재하는 ‘Major Developments’ 섹션이고, 끝에 부록 형식으로 일지(Chronology)가 붙는다.
매월 밴티지 포인트가 발간돼 배포되고 나면 해외에서 적잖은 질문이 온다. 그에 대해 답장해주는 일도 국제부 하는 일의 부분이다. 주로 당시 비동맹권에 속했던 친북 성향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질문이나 격려의 서신들이 많이 왔는데, 어떨 때는 밴티지 포인트가 평양에서 발간되는 줄 알고, 서두에 ‘친애하는 김일성 수령(Dear Leader Kim Il-sung) 만세!’라는 구호를 쓴 편지도 더러 있었다.
국내에서도 외국대사관이나 해외언론의 서울지사에서 문의가 많았다. 기억나는 사람으로는 당시 통일교가 운영하던 미국 워싱턴 타임즈의 마이클 브린(Michle Breen) 특파원인데, 이 양반은 주요 북한 이슈가 있을 때면 항상 회사로 왔었다. 나중에 이 사람은 미 국무성의 한반도관련 부서의 주요 직책으로 발탁된 것으로 안다.
밴티지 포인트를 처음 만들면서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때 나이가 30대 초였으니 웬만한 어려움은 감당할만한 의지와 투지로 벼티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기도 하면서 어이없는 순간도 있었다. 회사는 1982년 말 나에게 차장 진급을 약속했다. 1983년 1월 1일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사건이 터진다. ‘로동신문’을 대량 분실한 것이다.
그 때 김일성이 중공을 방문했다. 당연히 톱 기사였다. 로동신문은 그 때까지 흑백면으로 발간됐다. 김일성의 그 때 중공 방문을 계기로 사상 처음 로동신문은 컬러면을 발간한다. 그리고 평상시 2면으로 발간하던 것을 특집으로 4면으로 발행한 것도 그 때다. 그 신문 일주일치를 몽땅 분실한 것이다. 그 사유를 일일이 생각해 쓸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큰 사고였다. 전두환 정권 주요 보안사고의 하나로 여겨져 안기부 수사를 받았다. 회사엔 당연히 사의를 표했다.
당시 사장이 이욱근이라는 분이었는데, 사건 자체를 몹씨 안타깝게 여겼던 것 같다. 안기부 수사주체가 수사국 수사로 된 것은 온전히 그 분 덕이라고 지금도 믿고있다. 수사국 수사가 아니었더라면 나의 처지는 아주 곤혹스러울 수가 있었다. 안기부 수사관은 나에게 유리한 것은 진술서에 다 쓰라고 했다. 보태고 뺄 것이 있었을까. 보탤 것은 있었다.
분실한 그 날 신문을 들고 모 중국관계 연구소를 찾아간 것을 적었다. 늦은 밤 피곤한 몸으로 퇴근하다 택시에 두고 내린 것으로 진술했는데, 그 핵심은 ‘피곤함’이었다. 혼자서 감당하기엔 업무가 너무 복잡하고 많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 때 그 연구소에 간 것은 김일성의 중공방문과 관련해 보도되는 중국정부 인사들의 성명에 관한 것이다. 로동신문은 한글로 그 이름을 표기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영문으로 표기해야 했기에 그 많은 중국 사람들의 성명을, 그 연구소 의 공자라는 이름을 가진 박사라는 분을 통해 일일이 물어보고 알아낸 일인데, 그것을 진술서에 구체적으로 적었다. 수사관은 당연히 그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진술서 말미에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택시를 타고가다 그만 신문을 놓고 내렸다고 썼다.
사표는 반려됐다. 이와 함께 징계도 나왔다. 감봉 3개월에 진급연기 1년. 사장실로 내려가 다시 한번 사의를 표했으나, 이욱근 사장은 한사코 말렸다. 회사로서도 그럴 만했을 것이다. 내가 그만 두면 밴티지 포인트는 누가 만들 것인가. 이욱근 사장은 나를 조용히 불렀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몇 가지를 약속했다. 그 약속은 물론 그 후 모두 지켜졌다. 나는 1983년 4월 1일부로 차장에 진급했다. 예정됐던 것보다 4개월 늦은 것이지만, 징계 내용보다는 훨씬 빠른 진급이었다. 이욱근 사장을 1990년대 말 종로 피맛골 주점에서 한번 뵌 적이 있다. 혼자 막걸리를 시켜놓고 앉았길래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더니 알아보질 못하는 것이었다. 눈에는 눈곱이 끼여 있었고, 입술에는 백태 같은 게 끼여 있었다. 그 얼마 후 그 분의 부고를 접했다.
지금 모든 일을 놓고 놀고있는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밴티지 포인트 만들 때가 즐겁고 행복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남들이 잘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랬고, 또 영어를 가까이하면서 어렵지만 하나 하나 알고 깨우쳐 나가는 재미가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도 좋았다. 앞서 언급한 그런 어르신들도 물론 포함된다.
1990년 6월 그 회사를 나오면서 밴티지 포인트와의 인연을 끝 맺었다. 그 회사를 그만 둔 것에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글과는 무관하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대개 그런 이면에는 사람과의 관계가 개입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사람과 잘 지내고 있기에 그 걸 다시 들춰 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1990년 6월로 밴티지 포인트와의 인연은 끝났다고 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그 후로 내가 만들지 않았는다는 뜻이지 밴티지 포인트를 잊고 살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그 회사를 나오면서 내 후임으로 주간 조사부에 있던 이범재라는 후배를 추천했다가 그가 고사하는 바람에 곽승지 후배를 다시 추천해 받아들여 졌다. 밴티지 포인트는 그 후 그 후배가 맡아하다 연합통신까지 가서도 그 일을 계속했고 어쩌다 한번씩 그 후배를 만나 밴티지 포인트에 관해 얘기들을 나누곤 했다.
곽승지가 연합뉴스를 그만 뒀다는 얘기를 들은 게 작년 쯤이다. 지금은 중국의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퍼뜩 생각난 것은 밴티지 포인트였다. 그 일을 그러면 누가 맡아하고 있을 것인가. 그러다 그날 점심자리에서 밴티지 포인트가 작년에 폐간됐다는 소식을 선배로부터 들은 것이다. 긴말은 하지 않았는데, 뭔가 좀 갑갑하고 답답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깊이 관여했고 나의 손때가 묻은 산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왜 38년의 역사를 지닌 밴티지 포인트를 단 칼에 무 자르듯 없애 버렸는가 하는 점에서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막대한 해외 발송비 등으로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은 가끔씩 들었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힌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수준의 가치중립적이면서 역사성을 지닌 관련 매체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생뚱맞은 얘기지만 어쩌다 가끔 밴티지 포인트를 좀 더 길고 좀 더 글로벌한 관점에서 한번 다시 잘 만들어 나갔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제는 그 생각을 다시 해 볼 필요조차 없게 생겼다. 하나 까 먹었다. 밴티지 포인트 소식을 전해 준 선배는 폐간 전까지 밴티지 포인트의 논문 번역 일을 해 왔는데, 이제 그 일도 없어져 버렸다. 생계거리는 아니지만 선배로서도 그것은 답답한 일이었을 것이다.
밴티지 포인트는 이제 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앞에서 얘기했듯 이 글을 쓰느라 인터넷 검색을 해 봤더니 딱 한 꼭지의 기사만 나온다. 모든 검색 결과가 2008년에 나온 헐리웃 영화 ‘밴티지 포인트’에 관한 것이다. 한 꼭지 의 기사는 2008년 언젠가 연합뉴스 기자가 쓴 기사다. 밴티지 포인트가 창간 30주년을 맞았다는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