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공채. 두채(두수) 형제

오늘 한 부음을 접했다. 정 두수라는 분. 추억 속에 살아있는 대중 음악가다. 정 두수하면 아직도 가슴을 뛰게하는 노래가 있다. 이 미자가 부른 ‘흑산도 아가씨’다. 정 두수 작사, 박 춘석 작곡이다. 이 노래가 나온 게 1965년인가였을 것이다. ‘울어라 열풍아’를 부른 이 미자의 인기가 한창 치솟고 있을 무렵이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다. 양판 한 장을 사오라는 것이다. 양판이란 sp 레코드 판을 말한다. 이 미자의 무슨 노래가 나왔는데, “남 몰래 서러운…”으로 시작되는 노래라는 것이다. 그걸 빨리 가서 사오라고 했다. 늦게가면 다 팔릴 수 있으니 빨리 가라고 재촉을 했다. 어머니는 90을 앞둔 이즈음에도 가끔 흥얼거리지만, 그 때 이미자 노래를 되게 좋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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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가게는 집에서 좀 멀었다. 심드렁한 마음에 어머니 재촉과는 반대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주인에게 어머니가 한 말을 그대로 하면서 그 양판을 달라고 했다. 늙수레한 주인은 무슨 말인 줄 잘 못 알아 듣는 듯 했다. 다시 한번 해 봐라. 우째 시작한다고? 나는 또 다시 말했다. “그 ‘남몰래 서러운’으로 시작하는 이미자 노래라 쿠던데요.” 주인 아저씨는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까까머리 중학생이 그 양판을 사러온 게 좀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두 번 그 노래 가사를 시켰던 것이다.

이 미자의 ‘흑산도 아가씨’는 이미 뜨고있던 중이라, 아예 가계 입구에 광고판까지 붙어 있었다. 주인 아저씨가 그 양판을 꺼내 턴테이블에 걸었다. 전주가 흘렀다. 감미롭기 그지 없다. “남 몰래 서러운/세월은 가고/물결은 천번 만번/밀려 오는데…” 구성진 이 미자의 노래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참 구슬프기도 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였다. 어머니는 그 양판을 집 전축에 걸었다. 아버지 퇴근하시기 전에 한 번이라도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흑산도 아가씨’를 또 한 몇번 들었다.

1965년 '흑산도 아가씨' 녹음 당시의 모습. 오른 쪽이 정 두수 선생, 왼쪽이 박 춘석 선생.

(1965년 ‘흑산도 아가씨’ 녹음 당시의 모습. 오른 쪽이 정 두수 선생, 왼쪽이 박 춘석 선생)

그 때 이런 얘기를 들었다. 이 미자는 그 무렵 밤낮으로 공연을 한 탓에 목이 피로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흑산도 아가씨’ 녹음을 그 상태로 해 어느 부분에 쉰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마지막 소절의 “흑-산도 아-가씨”의 흑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그렇다는 것인데, 들어보니 과연 그랬다. 그런데 그 게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래서 ‘흑산도 아가씨’는 어머니도 그렇지만 내가 이 미자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그 ‘흑산도 아가씨’의 노랫말을 지은 정 두수 선생이 오늘 별세한 것이다. 정 두수 선생은 이 노래 외에도 남 진의 ‘가슴아프게’와 진 송남의 ‘덕수궁 돌담길,’ 나 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등 많은 히트곡의 가사를 지으신 분이다. 오늘 별세했다는 소식에 모처럼 정 두수 선생의 이 노래들을 다시 한번 찾아다 들었다. 그러던 중에 선생과 어떤 인연이 느껴지는 사실을 하나 알게됐다. 정 두수 선생의 형이 바로 고 정공채 시인이라는 것이다.

정 두수 선생의 본명이 정 두채라는 것도 그래서 알았다. 정 공채 시인은 나와 개인적으로 약간의 인연이 있는 분이다. 그렇다면 정 두수 선생도 미약하나마 나와 인연이 닿고 있었던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연세대 정외과를 나오신 정 시인의 대학동기 친구 중에 김 각이라는 언론계 선배가 계셨는데, 좀 알고 지내던 분이었다. 그 선배를 통해 정 시인을 몇번 만난 적이 있다. 만나 뵌 자리라야 술자리 밖에 더 있겠는가. 그 때는 정 시인의 동생이 정 두수 선생이라는 걸 당연히 몰랐다.

정 공채 시인(1934-2008)

정 공채 시인(1934-2008)

몇 번 뵈면서 정 시인과는 이런 일이 있었다. 아주 재미있는 책을 하나 구해 읽고 있었다. 이집트 세티 파라오의 영혼으로 세상을 살다 간 도로시 이디(Dorothy Eady)의 자전적 다규멘터리인 ‘The Search for Ohm Seti’라는 책인데, 그 책을 선배, 정 시인과 술을 마시다 잃어 버렸다. 찾으려고 무진 노력을 했으나 찾아지지 않았다.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그 책의 뒷 표지 안에 적혀있던 정 시인 사무실의 전화번호였다. 그 때문에 정 시인에게 몇 차례 전화를 드렸다. 혹여 그 책과 관련해 전화 온 적이 없냐고.

정 시인과 김각 선배도 이 세상에 없다. 2008년과 2012년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돌아가셨다. 오늘 정 두수 선생의 부음을 접하니 옛 추억과 함께 새삼 그 두 어른이 생각난다. 세 분의 명복을 빌어본다.

 

 

3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8월 14일 at 7:39 오전

    정공채시인은 저도 좀 아는 분입니다.
    그분이 연대 다니실 때 부산에서 대학생이었던
    우리랑도 좀 어울려서 문학을 논하기도 했었지요.
    시가 힘차고 좋았는데 일찍 타계하셔서 마음
    아파요.

    정두수씨가 동생이셨군요.
    멍복을 빕니다.

    • koyang4283

      2016년 8월 14일 at 5:50 오후

      선이 굵은 시인이셨지요. 생김새도 우람해 하동 사람 아니랄까봐 영판 지리산을 닮았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저랑은 그것으로 인연이 끝났습니다. 돌아가신 줄도 한참 뒤에나 알았습니다. 정 시인과의 인연이 된 그 책은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1-2년 후 아마존에서 구했었지요.

  2. Kill

    2016년 8월 17일 at 7: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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