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에서 중봉을 거쳐 대원사 쪽으로 하산하는 길에 대피소가 있습니다. ‘치밭목’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대피소지요. 예전에는 ‘치밭목 산장’이라 했는데,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생기면서 대피소로 이름을 바꿨지요. 그 산장은 지리산을 좋아하는 모든 산꾼들로부터 애착심을 자아내게 하는, 말하자면 지리산의 마스코트 같은 처소였습니다. 그 산장을 홀로 30년이 넘게 가꾸며 돌보아 온 산지기가 민병태라는 분입니다. 전기도 전화도 없던 30년 전 홀로 들어 와 무인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그곳을 키운 장본인인 셈이지요. 그래서 지리산 산꾼들 사이에는 ‘치밭목 산장’하면 민병태고, 민병태하면 ‘치밭목 산장’이라는 등식으로 서로들 통하고 있습니다.
민병태의 그 산장이 이제 곧 사라진다는 뉴스를 오늘 아침 접했습니다. 임대계약이 끝났다는 것과, 현재의 대피소가 너무 낡았기 때문에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새로 증축해 직접 관리하겠다는 것입니다. 민병태 그 분으로서는 하루 아침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잃게된 것입니다. 그 분은 물론이겠지만, 지리산 산꾼들로서도 허전하기 이를데 없는 소식입니다. 더구나 증축되는 대피소가 내년 3월 완공이라니까, 그 사이 6개월, 천왕봉-중봉-대원사 코스를 좋아하는 산꾼들에게는 안전사고도 그렇지만, 쉬어 갈 처소를 잃게 된 셈입니다. 행정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지만, 너무 현실을 도외시한 조치에 그저 아연해 할 뿐입니다. 뭔가 대책이 마련되어야할 것 같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민병태와 ‘치밭목 산장’을 다시 한번 떠 올립니다. 2000년 6월 취재차 산장에 들러 처음 만나 본 이래 몇 차례 지리산을 오르내리다 만난 적이 있습니다. 2000년에 썼던 그 글을 한번 올려 봅니다. 그 때 찍은 사진은 구해질 수가 없어 부득이 2010년의 사진을 함께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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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무엇 때문에 가느냐’하는 질문이 왜 우문으로 치부될까 하다가 매칭은 안 되지만 문득 포개져서 들어오는 생각. 그래, 맞다. 역시 쉬운산은 없다. 하물며 지리산인데. 이런 생각들로 지리산을 오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리산은 이제나 저제나 가는데도 그렇고 오르내리는데도 힘든 산이다. 서울서 반나절을 고속버스를 타고 와서, 또 진주서 차를 타고 들어 와 한참을 또 오르고.
치밭목산장으로 가는 지리산산길은 지리산을 아는 사람은 잘 안다. 그러나 지리산을 알더라도 모르는 사람은 또 너무 모른다. 진주 인근에 사는 사람이면 다들 잘 알고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애시당초 잘못된 것이었다. 진주에서 택시를 14년간 몰았다는 김봉조기사도 잘 몰랐다. 지리산하면 중산리지 무슨 치밭목산장이냐며 따진다.
지리산 통합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한 뒤에야 대충 어디서 어떻게 가야 오늘 저녁 중으로라도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대원사 계곡 입구까지 버스노선이 연결되고, 유평계곡을 거쳐 새재까지 자동차가 오르내리지만, 치밭목으로가는 길은 여전히 지리산의 오지처럼 한산하다.
(중봉 어딘가에서 바라다 본 지리산 운해)
대원사쪽으로 들어 와 덕산을 거쳐 유평리 새재 쪽에서 오르면 두어시간에 다다를 수 있다는 안내에 서둘러 그곳까지가 앞뒤 챙겨볼 새도 없이 그대로 올랐다. 그렇게 서둘러 오른 것이 산행을 더욱 힘들게 한다. 유월의 신록이라지만 장마비를 잔뜩 머금은 하늘과 안개 그리고 가끔씩 오는 가랑비 탓에 여름 푸른 지리산의 자태는 숨어버렸다. 그러나 전나무 굴참나무 서나무 삼나무 등의 굵은 등걸이 이룬 숲과 각종 야생화들에서 풍겨나오는 특유의 산냄새, 그리고 덩치 큰 바람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이름모를 각양각색의 새 지저귀는소리. 지리산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지리산이다. 왜 지리산인가하는 화두에 골똘해지면서 산행 길에 힘이 주어진다.
민병태라는 사람을 생각해 본다. 그는 치밭목산장의 이른바 관리인이다. 치밭목산장이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유 인 탓에 부쳐진, 이를테면 ‘관급타이틀’이지만 그에게 그 건 어울리지 않는다. 관리인보다는 산장지기 산지기라는 말이 그 답다. 민병태는 아무도 돌보지않아 방치상태에 있던 치밭목산장을 15년째 홀로 지키고 가꾸며 돌보고 있다.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해서 우리가 민병태를 좀 다르게 봐야하는 것은 단지 지리산이 좋다라는 이유만으로 ‘혼자서’ 그 산장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전기도 없고 전화도 없고 하는 류의, 말하자면 거진 고립된 상황을 더 할때 그의 산지기로서의 사람됨은 더욱 부각된다.
그런 상황에서의 일상화 된 그의 고독과 생각은 오로지 치밭목 주변을 가꾸고 보존하면서 등산객들의 안전을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는 것으로 용해된다. 그가 있는 치밭목산장 덕분으로 종래 엄두를 내기가 쉽지않았던 치밭목-써레봉-중봉으로해서 천황봉으로 오르는 능선길 종주가 용이해졌다. 또 그가 치밭목산장을 지키고 있기에 이 산장은 지리산 8개 산장 가운데 가장 자연적이며 정적이고 산행객의 도덕이 그나마 유지되는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있다.
(민병태씨.예전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다)
민병태를 만나기위해 지리산을 오르면서 줄곧 맴도는 생각은 아무리 지리산이 좋다지만 왜 그는 세상사 갖은 공명심과 가족들을 뒤로 한채 이곳으로 들어왔을까라는 의문이다.그 리고 또 있다. 혼자 산장을 지키면서 길다면 긴 하루를무엇을 하며 지낼까하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들은 만일 나였을 경우와 대비해 보는 지극히 세속적인 것들이지만, 그에 대한 대답 속에서만이 이해(?)되지않는 그의 인간됨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민병태에 대한 얘기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어렵잖게 구한 자료들에서 대충은 알고있다. 지리산인근에서 태어났다는 것. 해서 지리산이 좋아 산에 들어왔다는것. 학교는 어디를 나오고 사회에서는 무슨 일들을 했다는것. 그리고 가족관계는 어떻고 저떻고하는것 운운.
같이 동행한 사진하시는 선배가 어느 야생화 앞에 멈춘다. 그 꽃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어댄다. 산은 어느 새 어두어져 가고있다. 얕은 가랑비가 눈앞에 부스댄다. 잠시 땀을 식히는 사이 멀리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같은 것이 들린다.산장이 가까워진 것일까. 해발 910m 삼거리 갈림길에서도 한참을 올라왔고 무재치기폭포가 산길 옆 200m라는 팻말도 지나쳤다. 치밭목에 그 유명한 ‘치순’이라는 진돗개가 민병태와 같이산다고 했는데,치 순이가 짖는소리인가.들은 얘기로는 치밭목산장에서 제일 먼저 산행객을 반기는 ‘사람아닌 사람’은 치순이라고 했는데.
(예전의 ’치순이’는 이제없다. 현재 치밭목산장을 지키는 이 개가 ’치순이’의 혈통인지는 모르겠다)
막바지 올림 길을 헉헉거리며 올라 와 걷기에 아주 불편한 나무계단을 지나 여기 쯤이라고 느꼈을때 “컹, 컹” 개 짓는소리가 들린다. 치밭목산장이다. 참 왜치밭목인가. 민병태 말로는 두 가지설이 있다. 주변에 참취 곰취 등 취나물 밭이군락을 이루고 있는 고개라고 해서 생겼다는 설과, 천황봉으로 가자면 비탈길로 치밭아 올라가는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 졌다는 설이있는데, 앞엣 것이유력하다는 것이 민병태의 말이다. ‘취나물 밭 고개’라는 말은 1백여 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쓰여지던 말이라는 것.
(한 겨울, 눈속의 치밭목산장)
치밭목산장은 굴참나무 숲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개골과 장당골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상에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두 골짜기로부터 안개가 넘나들고 있어 언뜻 보면 지리산의 고도같은 느낌을 준다. 자그마한 단층 슬라브 본체 앞 마당에는 인근의 참나무 원목과 철도침목 등으로 만든 탁자와 고사목이 몇개 심어져 있다.이같은 산장의 골격은 민병태가 지난 86년 9월 처음 들어 와 근 3개월간을 진주의 산악회(마차푸차레)후배들의 헌신적인 도움에다, 그가 직접 보수하고만들고하며 세운것들이다. 물론 그 후 국립공원공단 관리체제로 넘어가면서 일부 산장내부도 새로 바꿨고, 취사장 화장실도 마련했다. 민병태의 치밭목산장에 대한 애정과 관심때문인지 우리 주변에 일상화된 품팔이일꾼들의 날림공사를 치밭목산장에서는어느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치밭목산장은 그만큼 단단하고 야무지게 자리잡고 있었다.
산장 안은 껌껌하다. 지친 몸에 털썩 주저 앉으려는데, 반대편 출구를 뒤로 한채 어두운 모습으로 누군가 서 있다.“민선생님”했더니 그대로 가만 서 있다. 민병태는 자신을 부르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홀로 사는 산 생활에 익은 탓일 게다. 내부가 눈에 좀 익어지면서 큰 개 한 마리가 바닥에 웅크려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치순이다. 민병태를 보자 꼬리를 흔들면서 앞서려는데, 한 눈에 보아도 정상은 아닌 것같다. 치순이는 올해 사람나이로 18세다. 개 나이로는 노인이다. 활동력이 떨어지면서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신경통까지 겹쳤다는데, 보기에도 노색(?)이 완연하다. 잘 짓지도 않는다고 한다. 치순이와 함께 ‘바우’라는 암컷 진돗개가 있었는데, 작년에 13세로 죽었다고 한다.그 이후 진주 산후배가 다른 두 마리를 구해 줬는데, 아까 짓은 개는 그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했다. 치밭목의 명물 하나가 또 사라져가고 있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민병태(47)는 알려진대로 걸출한 산꾼이다. 그는 25년 전 시도 자체가 높이 평가되던 설악산 토왕성 빙폭하단을 등반하기도했고, 지난 97년에는 그가 속하고 있는 마차푸차레 산악회의 히말라야 케다르나스 원정대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다 그는 산청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지리산을 쏘다녔다. 학교도 지리산 인근인 거창에서 다녔다. 이런 점들은 그가 왜 치밭목에 들어왔는가에 대한 환경적인 단초는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납득하기가 쉽지않다. 여전히남는 의문 – 왜 홀로 들어와 15년씩이나 산장을 지키고있는가.
그는 덤덤한 표정이다. 그에 무슨 이유와 계기가 있겠는가 하는 반문을 던지는 표정이다. 계기는 물론 있었다. 치밭목산장은 71년 전국 주요 산에 산장이 한꺼번에 들어 설때 지어졌다. 그러나 그 후 무인산장으로 방치되다가 그관리권이 86년 국립공원협회 경남지부로 넘어가며 민병태에게 그 산장을 지키는 지기로서의 인연이 닿았다. 경남지부의 서정배지부장이 바로 민병태가 몸 담고있는 마차푸차레산악회 회장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계기가 있었다해도 혈기방장하고 나름대로 공명심도 가졌을만한 32세 한창의 나이에 무인상태로 방치된 지리산 오지자락의 산장을 맡는다는 것은 이해가 잘되지않는다. 하물며 당시그는 결혼을 앞두고있던 처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글은 써야 한다. 얘기를 끝내 마다하는 민병태를 계속 채근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그에게서 어렵게 나온 대답은 이렇다. 억지로 대자면 산 생활이 좋겠다는 것과 산장지기에 대한 호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산장을 지키면서 책이나 봐야지 하고 들어왔다고 했다. 그가 들어오면서 한참 신혼의 단꿈에 부풀어 있던 부인(정연숙)도 함께 들어왔다(정연숙은 그러나 91년 첫 애를 가진 후 출산을 위해 하산한 후 지금까지 진주에서 애들 – 10살 난 딸과 8살 된 아들 – 을 키우고 있다). 대답은 그 뿐이다. 무슨 나름대로 그럴듯한, 말하다면 글이 되는 계기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에 관해 알려져있는 얘기들에 대해서도 웃음만 짓는다. 동아대학교를 졸업했고, 진주에서 개인사업을했고, 형님회사에서 공장장도 했었다는, 입산 전 자신의 얘기에도 그는 그저 웃을 뿐 긍정도 부정도 않는다. 단하나, 덧붙이는 게 있다. 서정배 회장의 제의를 받고 일주일만에 주변을 정리해 폐허가 된 치밭목산장으로 올라왔다는 것. 그 때가 86년 9월. 산장지기로 첫번째 맞는 겨울은 추웠다. 한 겨울 최저기온이 영하25도까지 내려가고 평균 영하10-15도에 머무는 겨울산. 밤은 어찌도 그리 빨리 찾아오고, 눈은 또 얼마나 내리는가. 어떻게 견뎠는가고 물으니, 지난 일들은 잊어버리려 노력한다며 웃고만다.
민병태는 잘 웃었다. 처음 대하면 냉소같기도 하지만, 얘기를 나누다보면 그게 자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속내의 표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 생활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치순이하고라면 모를까, 하루종일 말 한마디 없이 산속에서 산만 보면 사는 그의 일상에서 그가 짓는 웃음은 웃음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산에 대해 물었다. 우문인지 안다. 또 그저 웃는다. 그러면서 그냥 좋다고만 한다. 한 마디 더 붙인다. 산은 가만 있는것 같지만 그 자체가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 보는 마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해 다가오는 산이라는 얘기다. 그리고는 또 그냥 산이 좋다고만 했다. 산과 얘기를 나누는 경지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민병태의 웃음속에 커다란 지리산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산악회 후배가 마침 산장에 들렀다. 비로소 그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사람이 좀 활달해지는 것 같다. 여러가지 많은 주문을 한다. 오늘 손님이 왔으니 밥을 잘지으라는 것에서부터, 부엌방을 치우라는 것등에 이르기까지. 통영산다는 그 후배(강균석.31)를 아끼고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산꾼들의 질서와 우애가 남 다르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둘간의 사이가 너무 좋아 보인다. 가끔 한번씩 진주 등에 사는 후배들이 들린다고 한다. 그 후배 말로는 여러 후배들이한번씩 들리는 것은 그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민병태를 진주에 있는 집으로 어쩌다 한번씩이라도 내려가게 하기위해서라는것. 그러나 자주 내려가게하기는어렵다고했다.
말이 나온 김에 민병태에게 가정에 관해 물었다. 산이 좋아 산에 들어박힌 남편에 대한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이 어떨까하는 조바심을 깔았다. 아내가 애비노릇을 하고있지만 애들은 그래도 아버지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 아내는? 아내와도 사이가 좋다고했다. 그럴 수 있을까라는 나의 표정에, 이미 세뇌가 됐기 때문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진주에 가서 확인해보겠다면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무슨 희한한 짓거리냐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언듯 심각한 표정을 드러낸다. 살살 다그쳤다. 아내가 고민이 좀 있다는 것이다. 벌어 놓은 돈도 없고 재산도 없으니 애들 교육문제가 걱정거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원래 고민체질이 아니라서 크게 고민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분수에 맞춰 살아가면 무슨 문제가 있겠냐고 했다. 그러나 역시 편치않은 표정이다.
(유평계곡에서 치밭목산장가는 산길의 이정표)
민병태의 하루 일상은 어떨까. 그는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없이 지내고 있다고 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나가고 싶으면나가고라는 식으로 아주 편안한 것처럼 얘기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얘기 스타일이그렇다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그렇지만은 아닐 것이라고 물었다. 그제서야 입을 연다. 긴장상태로 지내는 시간도 많다고 했다. 수시로 들이닥치는 등산객들을 대하는 것도 그렇지만, 각종 안전이나 조난사고에 대비해항상 출동할 수 있는 상태로 있어야한다는 것. 내친 김일까. 본심의 말을 이어간다.
심심해 할 여가도 없는, 이를테면 초긴장 상태로 지나는 때가 많다고 했다. 우스개 말로 똥쌀 시간조차 없을 때도 있다라는 말도 한다. 산 능선만 바라봐도 바빠진다고 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능선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사고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생겨나기 때문이라는것. 그래서 깊은 잠도 못 이루고해서 스트레스가 많다고 비로소 털어 놓는다.
민병태는 지금껏 매년 한 30명쯤의 조난이나 안전사고를 당한 등산객을 구한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이에대해 대피소지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사항이라고 겸손해 한다. 그리고 일일이 세어 보지도 않았고 특히 지나간 사고에 관해서는 기억하기 싫다면서 구체적인 언급은 피한다. 민병태는 지난 97년 7월 지리산일대에 내린 집중호우 때 많은 인명을구했다. 몇 날을 밤을 새워 구조작업에 뛰어들었다가 자신도 실종에 처하는 사고도 겪었다. 그는 그때의 공로로 경상남도가 선정한 ‘자랑스런 시민상’을 받았다. 그러나 민병태는 그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당연히할 일이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냐는 것이다.
소주 한 잔을 곁들인 저녁상에서야 민병태의 말문은 차츰 열려가고 있었다. 산장지기로서 느낀 환경보호와 산행도덕 문제 등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이 달변으로 이어진다. 그는 자연사랑은 곧 자기 자신에대한 사랑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인간이 생태계의 최고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생태계 파괴를 주도하고 있는 인간이 곧그것에 대한 최대의 피해자가될 것이라는 경고도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도 자연의 한 톱니바퀴라는 마음가짐으로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대해야한다고 했다. 그는 한 예로 치밭목에 군락을 이뤘던 취나물을 든다.
지천이었던 취나물 등 각종 산나물들이 사람들의 무분별한 채취로 크게 줄어들면서 야생조수들도 사라지고 있다는것. 산돼지 등 야생동물들의 먹이가 되는 각종 산나물의 새순이 돋아나는 시기와 사람들의 채취시기가 맞물리면서 결국 이들 야생조수들이 굶주리게되면서 사라지고있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먹이를 찾는 야생동물들이 산아래 과수원이나 밭작물을 해치면서 많은 피해를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고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면서 봄날이면 떼를 지어나서는 산나물 채취관광단을 지적한다. 이들이 한번 지나가면 그근처 나물밭은 말그대로 쑥대밭이 된다는 것이다. 치밭목의 그 유명했던 참취가 그래서 지금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산행객들이 산에서 고함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했다. 산에 사는 식물과동물의 생장에 아주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의 자연환경과 국립공원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치않는다. 너무 형식적이고 관료적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한 폐해와 뒤치닥거리는 말단 직원이 뒤집어 쓴다고 했다. 그 역시 말단 직원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없다고 했다. 굳이 세울 필요도 없다면서 자기 좋아하는대로 그냥 살아가면 된다고 했다. 반문을 한다.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 되는가. 산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문자답인 셈이다. 산장을 계속 지키겠냐 물었다. 여건이 안 되면 내려갈 것이고, 여건이 되면 안 내려갈 것이라는 모호한 대답이 나온다. 그의 이 반문과 모호한 말속에서 그나마 그의 현실감각이 그나마 묻어나온다.
사실 민병태는 어렵다. 한 해에 가족들을 볼 수 있는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정도다. 게다가 손익분기점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산장수입은 경제면에서 가장의 자리를 위협하는 큰 요소다. 아무리 오지산장의 지기라지만,그도 물론 당초 가족들과 밥은 먹고 살아야지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해서 대피소서 물건도 팔기도 했지만, 그의 표현대로 ‘몇년 해 보니 헛방’이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남 보다는 못 해도 그럭저럭 밥은 먹고 산다고 했다.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다음 날 아침부터 장마비가 내렸다. 민병태는 이른 아침에 어디서 표고버섯을 따왔다. 그것을 후배가 소금으로 간을 해 찌개로 아침상에 내 놓는다. 그 맛은 말로 형용키 어렵다. 평생 잊지 못할 맛이다. 빗속의 지리산을 내려오면서 민병태라는 사람을 정리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감이 오질 않고 잡히지도 않는다. 뭔가를 잡아내야 이 글을 마칠 수가 있을텐데. 그런데 그가 잘 쓰는 말대로 희한하다. 서울로 올라와 다시 번잡한 도심의 일상으로 돌아와서야 그의 참 모습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글로 표현해 낼 재간이 없다. 단지 치밭목산장 안에 걸려있던 제석봉 상고대 사진에 쓰여진 글귀만 생각난다.
“산은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산은 기다리지도 가지도않는다”
(2000년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