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같지만 아끼는 한 후배 때문이었다. 이태리어과를 입학했는데, 무슨 생각이었던지 불어과로 재입학을 한 것인데, 이유는 영화를 공부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만나면 영화 얘기를 했다. 그 영향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그 후배는 외아들에 비교적 가정이 유복했기에 나보다는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잘 생겼었다. 고교 때 펜싱을 한 탓에 몸 자세도 발랐다. 그러기에 그 후배는 연출보다는 배우로 나가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후배는 연출 쪽을 택했다.
나는 그 사이 영화를 슬그머니 비켜나고 있었다. 그 후배 영화하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영화는 무척 즐겼다. 후배는 프랑스로 유학을 한다. 결국 그 후배는 영화 쪽으로 길을 택한 것이다. 후에 후배는 잠시 한국에 들어와 정진우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하면서 1980년대 중반인가 텔레비전 영화 한 편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였다. 이런 저런 어려운 사정으로 후배는 영화를 접었다. 그리고 빠리로 되돌아갔다. 그러다 불귀의 객이 됐다.
100편 가운데 내가 본 영화는 단 두 편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리스트를 재차 훑어 봤지만 딱 두 편이었다. 2002년에 본 ‘피아니스트’와 2007년 작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 영화들이다. 나머지 98편의 영화는 몇 편을 제하고는 생면부지의 것들이다. 이러고도 내가 한 때 영화에 빠져산 적이 있다고 나불댈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물론 나로서도 할 말은 있다. BBC의 선정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게 각각의 관점에서 해석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의 개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높은 평점을 준 영화가 BBC 선정에 빠질 수 있고, 반대로 BBC 선정 영화가 나의 관점에서 결코 좋은 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보편적 개념으로 지수(index)화 하는 게 공신력있는 기관의 선정이기 때문에 BBC 선정을 결코 가볍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옛 영화들 중에서 지금도 가끔씩 틀어보는 영화가 여럿 있다. 내 기준의 ‘위대한 영화’인 셈이다. 그 중 하나는 1982년에 나온 메릴 스트리프 주연의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이다. 이 영화는 하도 많이 봐 몇몇 대사까지 외우고 있을 정도다. 이 영화에 매료돼 결국 원작 소설까지 주마간산격이지만 섭렵을 했다.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이 쓴 원작 소설은 엄청 두껍다. 1985년 그 무더웠던 여름을 그 책 한권과 뒹굴고 살았다.
‘파고(Fargo)’도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영화 중의 하나다. 살기가 팍팍하고 지겨워질 때 한번 씩 틀어보는 영화다. 헐리우드 제도권에서 이 영화 한편으로 명성을 높인 코엔 형제를 이 영화를 본 후 특히 좋아하고 있다. 이번 BBC 선정 영화에 코엔 형제의 영화가 한 편 있는데, 내가 본 두 편 중의 하나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an)’가 그것이다. 이 영화들과 함께 좋아하는 영화들로는 ‘미스틱 리버(Mystic River)’ ‘디 아더스(The Others)’ ‘클로우즈 인카운터’ ‘라이언 일병 구하기’ ‘좋은 친구들’ 뮤직 박스’ ‘쉰들러 리스트’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븐’ 등이다. 이 영화의 비디오 디스크는 최고의 것들로, 나의 컬렉션으로 보관하고 있다.
이번 BBC의 ‘위대한 영화 100선’을 계기로 영화에 관한 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나는 그리 내세울 수 없는 ‘시네마 올드(Cinema Old’가 됐다.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게 그렇듯이 이제 슬슬 세상의 모든 왕성한 기준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좋다. 오늘 밤에는 소주 한잔 먹으며 ‘파고(Fargo)’를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