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馬山 옛 과자 ‘진해콩’과 박영도 사장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하루 세끼도 먹기 힘든 상황에서 군것질이란, 호사라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끼니와 별 구별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간식 개념의 주전부리라 해봤자 과일이나 떡이 전부였던 시절에 달콤한 맛을 주는 과자는 웬만큼 살만한 집을 빼놓고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그 옛 시절을 마산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과일이나 떡 외에 그나마 간식의 주전부리로 생각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각자들 살았던 정도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정종(청주)주조장에서 술 만들고 나오는 ‘술찌깽이’(술찌꺼기), 고구마를 말린, 마산 말로 ‘빼때기’, 찐쌀, 칡, 설탕을 물에 넣어 달여 뽑아먹는 ‘오리때기’(요즘 말로 뽑기) 등이 있었다. 술찌깽이는 아침 일찍 청주공장 벽 한 켠 기다란 양철호롱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받아 끓여 먹었다. 칡과 오리때기는 그 당시 대개 국민학교 가는 길목에서들 팔았다. 그리고 간식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또 맛나게 먹었던 것으로 어머니가 반찬 만들려고 어렵게 사온 ‘가마보꼬’(어묵)도 생각난다.
과자도 물론 있기는 있었다. ‘비과’라는, 좀 조잡하고 가냘픈 형태의 캐러멜과 눈깔사탕이 있었는데, 그것 좀 마음껏 먹는 것도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이런 옛 시절을 살았던 마산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나고 추억에 젖게 하는 간식거리 과자가 있다. 바로 일제 강점기 일본 말로 ‘진까이  마메’로 부르던 ‘진해콩’이다. ‘진해땅콩’이라고도 불렀다. 이 과자는 어린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즐겨먹는, 1950, 60년대 당시 마산의 대표적인 간식용 과자였다.
콩가루와 메주콩가루를 섞어 반죽해 콩 모양으로 만든 뒤 직접 불에 구워내는 진해콩은 작고 동글동글한 게 동태 눈깔 같았다. 한 알갱이 씩 먹으면 감질 나는 크기라, 한웅 큼씩   입에 넣고 먹었다. 씹으면 달콤하고 땅콩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있어, 어린 아이는 아이대로 그 맛이 좋았고, 나이 드신 분들은 술안주로도 좋았다. 봉지에 담겨져 팔았는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던 기억이 새롭다.
이 진해콩을 만든 사람이 박영도(1912-1969) 사장이다. 가난한 집에서 편모슬하에 자란 박영도는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드는데, 그 과정에서 익힌 게 제과기술이다.  그 기술은 일본사람에게서 배웠지만, 영리했던 박영도는 그 기술을 바탕으로 싸고 영양가 있으면서 한국인 입맛에 맞는 과자를 만드는데, 그게 바로 진해콩이다. 마산토박이인 박영도가 남성동 113번지(현 대신증권 자리)에 독자적으로 ‘대한제과’라는 간판을 걸고 진해콩을 만들기 시작한 게 1930년, 그의 나이 18세 때다. 대한제과는 후에 ‘진해콩상회’로 이름을 바꿔 마산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진해콩을 계속 만들었다. 박영도가 진해콩 과자의 원산지로 남성동 그 자리에 터를 잡게 된 연유가 있다.
박영도는 어릴 적부터 효자로 남성동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가난한 집 형편 때문에 나이  들고 병든 편모를 매일 업고 다니면서 부양 할 만큼 어머님에 대한 보살핌이 극진했다. 이를 눈여겨 본 당시 마산의 부호 옥기환(초대 마산시장)이 자신의 소유지인 남성동 113번지 일대의 집과 땅을 어머니 부양하며 먹고 살라며 선뜻 내준 것이다. 박영도는 옥기환의 도움으로 가내수공업 형태의 과자공장과 가계를 열 수 있었던 것이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특유의 근면성과 아이디어로 독창적인 진해콩을 만든 것이다.
마산의 제과업계 1세대로 ‘상투과자’로 유명한 감영실을 비롯해 진갑수, 이병주, 김지수로 치는데, 물론 박영도도 이 그룹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는 진해콩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이 분들과는 좀 다른 독보적인 위상을 갖는다. 그는 당시 일본과자의 아류나 유사품이 판을 치던 시대에 유독 조선인의 입에 딱 맞으면서도 값이 싼 진해콩을 개발한 것이다. 제과기술은 일본인에게 배웠지만, 조선고유의 한과와 같이 우리 입맛에 맞는 우리 과자를 만들겠다는 정신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고들 회자된다.
그럼 왜 진해콩인가. 마산사람이 마산서 만든 과자라면 마산콩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박영도의 노련한 상술이 들어있다. 박람회라든가 전시회가 없던 당시, 전국적으로 소문난 구경꺼리로 마산 인근 진해의 ‘봄 벚꽃 놀이’가 있었다. 당시 진해 벚꽃 구경을 가려고 경남차부(현 경남은행 창동지점)와 ‘천신호 뱃머리(남성동 선착장)’에 많은 인파가 몰렸다.

(박영도 사장과 '진해콩' 상표)

(박영도 사장과 ‘진해콩’ 상표)

이를 본 박영도는 마케팅 전략을 그쪽에 맞춘다. 그러려면 땅콩 이름을 마산콩보다는 진해콩으로 하자. 그렇게 해서 진해콩으로 했고, 이게 주효해 진해로 가는 누구나 진해콩에 맛들이게 되면서 엄청나게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진해-마산을 왕래하는 천신호 배안이나 경남차부에서 오가는 버스 안에서 누구나 간식거리로 값싸고 맛있는 진해콩 한 두봉지 사들고 가는 것이 ‘공식’처럼 됐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진해콩은 이렇게 해서 마산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도 그 명성을 날린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멀리 만주에까지 팔려갔을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했다. 특히 각급 학교의 봄. 가을 소풍이나 운동회, 그리고 꽃구경 가는 봄 행락 철 때는 하루에 300여 상자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한 상자에 150봉지가 들었으니 엄청난 판매량이 아닐 수 없다.
박영도는 이렇게 해서 많은 돈을 번다. 당시 남성동 일대에 집만 해도 여러 채에 달했다고 한다. 박영도는 상술도 뛰어났지만 다재다능했고 특히 호방했다. 그래서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에게 무슨 스포츠가 있었겠는가. 우리 고유의 씨름만이 조선인들이 즐겨보고 하는 운동이었다. 박영도는 이 점에 착안해 특히 씨름을 눈 여겨 보고 씨름계에 뛰어든다.
그러나 씨름 선수로서가 아니다. 씨름을 좀 더 활성화시켜 더 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씨름경기를 보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대중스포츠로의 도약을 바란, 말하자면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프로모터의 역할을 한 것이다. 당연히 씨름을 통해 돈을 벌기위한 의도도 있을 것이다. 박영도는 누가 뭐라 해도 사업을 하는 장사꾼이었으니까. 박영도는 이와 관련해 마산씨름을 전국적으로 진흥시킨 인물로 전해진다.
그의 아들 식원에 따르면 박영도는 일제 강점기 ‘전조선 씨름대회’를 마산에 유치했다고 한다. 그의 유치로 마산에서 두 차례 열린 ‘전조선 씨름대회’를 통해서 송병규. 라윤출 등의 걸출한 씨름꾼들이 배출되는데, 1938년 대회 우승자인 라윤출(羅允出)은 후에 1946년 대구폭동의 주모자로 월북해 북한정권의 체육계에서 주요 요직을 맡았던 인물로, 한국 최초의 씨름 개설서인 ‘조선 씨름’을 북한에서 저술해 펴내기도 했다.

(1936년 마산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 결승서 맞붙은 나윤출과 송병규 장사)

(1936년 마산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 결승서 맞붙은 나윤출과 송병규 장사)

(나윤출 장사)

(나윤출 장사)

‘전조선 씨름대회’는 1927년 제 1회 대회가 열려 6회까지 진행되다 중단된 후 1936년 다시 부활된 대회로서 1938년 대회라면 3회가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마산에서 개최된 이 대회와 관련한 공식적인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대회 결승에서 맞붙은 나윤출과 송병규의 경기장면을 찍은 박영도의 사진 한 장이 전할 뿐이다. 당시 이 대회가 열린 곳은 서성동 옛 주차장 자리였다고 한다. ‘전조선 씨름대회’도 1941년 제 6회까지 열려오다 중단되고 해방 후 다시 부활해 오늘날 ‘전국씨름선수권대회’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박영도는 이와 함께 마산의 이름난 씨름꾼들을 모아 전국각지는 물론 만주로까지 가서 시합을 벌이고 마산씨름을 알리는 ‘마산씨름 프로모션’을 만들어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 마산의 유명한 씨름꾼으로는 박승구, 신재환으로 꼽혀지고 있었는데, 박영도는 이 둘을 중심으로 한 씨름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경기에 나선다. 순회경기는 서울은 물론이고 평양, 신의주, 그리고 멀리는 만주에까지 가서 벌여 마산씨름을 알린다. 박영도는 씨름과 함께 전국적으로 당시 유명했던 ‘청도 소싸움 대회’도 마산에 유치해 우리 고유의 소싸움을 알리기도 했다는 게 그의 아들 식원의 전언이다.
진해콩 하나로 박영도는 마산의 초창기 제과업계에 큰 이름을 남긴 장본인이다. 하지만 박영도는 제과업과 관련해 마산에만 국한된 인물이 아니다. 박영도는 오리온제과(동양제과)의 오늘이 있게 한 밑거름이기도 하다. 진해콩의 인기가 한창 절정인 무렵 6.25전쟁이 발발한다. 피란민들이 대거 마산에 몰려왔을 때 오리온제과 창업주인 이양구(1916-1989)가 당시 추산동에 있던 박영도의 집에 묵게 된다.
이양구는 한 달가량 박영도의 집에 유숙하면서 진해콩은 물론 박영도가 개발한 또 다른 과자로 캐러멜의 일종인 ‘또뽑기’ 등의 제조과정을 배우게 되는데, 이게 나중에 ‘오리온캐러멜’을 만드는데 기술의 기초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무렵, 또 하나의 마산의 전통 먹 거리 기술이 전수돼 나중에 전국적인 기업으로 부상하는 바탕이 되는 일이 전해진다. 마산명산 몽고간장의 창업주 김홍구는 박영도와 절친한 사이였다. 마산 피란시절, 박영도는 이북에서 온 한 피란민을 김홍구에게 소개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김홍구로부터 장유기술을 우여곡절 끝에 어느 정도 익힌다. 이를 바탕으로 마산 반월동에서 시작해 나중에 간장을 만들어 성공한 기업이 바로 ‘샘표간장’이다.
박영도는 호방하면서도 인정도 많고 의협심도 많았던 것 같다. 6.25전쟁 후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단행된 거제포로수용소 석방사건에도 관여한다. 어떤 경로나 과정이었던 것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박영도는 당시 석방돼 피신한 30여명의 포로를 마산에서 떠맡는다. 그는 미군 검속을 피해 포로들을 자신의 진해콩 공장 옥탑 방에 숨기고 보살핀다. 이들을 장기간 머물게 한 후 미군 검속이 좀 느슨해지면서 이들 포로들을 선창가 등에 취업시켜 이들의 생계까지도 보장했다는 훈훈한 일화가 전한다.
박영도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정치에 뛰어든 게 그 단초다. 진해콩으로 번 돈을 결국 정치판에 나서면서 탕진하게 된 것이다. 그는 2대 국회의원 선거 및 마산시장 선거를 비롯해 여러 차례 선거판에 뛰어들었지만 낙선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재산을 잃는다. 그러다 1960년 당시 김종신 시장 하의 민선 동회장 선거에서 추산동회장(추산동장)에 당선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5.16으로 6개월 만에 의회가 해산되면서 직을 잃고 만다.

(1969년 6월 박영도 상여행렬. 박승구. 신재환 등 마산 씨름꾼들이 뒤를 따랐다 한다)

(1969년 6월 박영도 상여행렬. 박승구. 신재환 등 마산 씨름꾼들이 뒤를 따랐다 한다)

진해콩은 1960년대까지도 잘 팔렸다. 그러나 박영도가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각종 과자 등 간식거리들이 새로 많이 만들어져 나오면서 서서히 그 명성을 잃어간다. 1969년 58세의 나이로 박영도가 별세하면서 진해콩은 큰 아들인 식원(현 대한노인회 서울강남구지회장)에게 승계된다. 당시 서울서 학교에 다니던 식원은 휴학계를 내고 마산에 내려와 아버지 사업을 이어 받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에 재 진입했을 무렵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동생에게 물려줬는데, 1970년대까지 진해콩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진해콩은 사라져 마산 진해콩은 그 명맥이 끊긴 상태다. 진해에서 진해콩을 만드는 곳이 있다. 그나마 거기서 나오는 진해콩에서 옛 마산 진해콩의 맛과 흔적이 좀 남아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마산의 옛 명물이었던 마산 진해콩을 진해 진해콩에서 나마 찾아보며 아직도 그 맛을 그리워하는 마산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10월 4일 at 1:41 오전

    진해콩, 제게는 아픈 추억이 있는 과자에요.
    50 년대 중반쯤일거에요.
    우리 형부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가짜 진해콩을 만들어 팔다가 폭삭 망했거든요.
    덕분에 고등학교 다닐때 집이 어려워져서
    고생 좀 했지요. ㅎㅎ

    그때 우리 형부는 부산에 살았는데 부산사람들
    에게도 진해콩이 인기가 있었거든요.

    • koyang4283

      2016년 10월 4일 at 7:44 오전

      아, 진해콩을 아신다니 반갑습니다. 진해콩은 마산의 명물이었지요. 이 과자를 만들어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린 박영도 사장이 제 친구의 아버지입니다. 또 이 진해콩 공장이 처음 들어선 곳이 그 후 우리 집에 이사해 들어간 남성동 113번지 이구요. 이래저래 저와는 인연이 많은 진해콩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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