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그렇지는 아니겠지만, 그나마 굼뜨게 움쩍거리는 나의 조그만 시공간이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탓에 블랙아웃이 된 느낌이다. 그런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데도 그렇게 된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그러니까 말하자면 박근혜라는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망가질 수 있는가. 나만의 결론은 있다. 무속으로 엮어진 주술에 놀아난 것이라는 것. 그 외 어떤 다른 추론이 없다고 확신한다. 자기 팔자겠지만 가엾은 존재다. 가당찮은 비호처럼 들리겠지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 진심이다.
시작이 길어졌다. 하고싶은 얘기는 블랙홀 같은 그 추잡스런 사건으로 주변의 일어나는 다른 일들에 한 동안 무감각해져 있었다는 것인데, 오늘 어떤 사람의 부음을 문득 접하고 그런 와중에도 사람은 때가 되면 죽어 없어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느끼면서 비로소 일상의 감각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고, 대통령이 될 사람은 누가 뭐라든 대통령이 되기도 하는…
부음 기사에 그의 나이가 나와있다. 82세.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나이다. 한 동안 잊고 살았던 그를 떠올린 것은 밥 딜런(Bob Dylan)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할 때다. 아, 코헨도 노벨문학상을 탈 날이 머지 않았구나. 그 때 든 생각이다. 나이 생각이 들긴 들었다. 75세인 밥 딜런보다 연장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 확인해보니 7살 위다. 코헨의 노래를 처음 들은 게 1974년이니 오래 전이다. 파주에서 군 생활 할 때다. 글이 좋았다. 시인의 글이었다. ‘수잔(Suzane)’에서 예수를 뱃사람으로 부르는(Jesus was a sailor…)것에 격하게 공감했다. 코헨을 알게 된 동기가 있다.
한 나이먹은 전입병이 왔다. 실명을 얘기해도 되겠다. 오래 전부터 찾고있는데도 도시 종적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봉준. 경희대 음대를 나왔는데,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다. 전입 첫 날 신고식이 있었다. 노래 일발 장전. 내무반에 기타가 있었다. 성큼성큼 가더니 기타를 집는다. 그리고는 자기 더블백을 뒤지더니 뭔가를 꺼낸다. 반주로 기타를 치면서 함께 부는 탭 하모니카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르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처음 듣는 영어 노래다. 그 때문에 좀 소란이 있었다. 점호가 끝나고 사무실로 몰래 불렀다.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가. 레너드 코헨의 노래입니다. 그 때 코헨의 노래를 처음 알았다. 그는 많이 알고 있었다. 나와 친해졌다. 그는 사단장 테니스 코트 관리 일을 했는데, 점호 끝나고 어두컴컴한 코트로 불러내 막사에서 배갈을 나누어 마시기도 했다.
그는 기혼자였다. 어느 날인가, 집 사람이 면회를 왔다면서 같이 나가자고 했다. 파주 광탄의 으슥한 중국집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부인과 인사를 나눴다. 양공주예요. 양공주라니요? 아, 제 이름이 양공주이지요. 용주골과 잘 어울리는 이름 아니예요. 부인은 김씨 성이었다. 파주 광탄 용주골이라서 양공주로 인사를 한 것이다. 우리들은 잘 어울렸다. 부인이 면회오는 날이면 같이들 만났다. 서울 살림집이 창신동에 있었는데, 휴가나 출장 나오면 창신동에서 같이들 마시기도 했다.
레너드 코헨은 그 사람, 이 봉준을 통해서 많이 알았다. 그 때 그 사람은 코헨의 오리지널 송 북(Song Book)을 갖고 있었다. 노래도 잘 했다. 그 때 그로부터 코헨 노래를 많이 익혔다. 그 사람은 코헨 뿐 아니라 밥 딜런이나 크리스 크리스토프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공통적인 것은 이들이 모두 음유적인 글로 노래하는싱어 송 라이터라는 점이다.
내가 먼저 제대를 하면서 둘 간에 약조를 했다. 같이 노래를 하자는 것. 그 무렵 그 부인이 이화여대 앞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 가게를 개조해 노래도 부르고 먹고 살 일도 해결하자. 대강 그렇게 서로들 마음을 맞췄다.
그가 제대를 할 무렵 나는 회사를 나가고 있었다. 만났더니 둘 간의 그 약속을 꺼낸다. 노래를 하자는 것이다. 먹고사느라 마음도 변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음악이나 노래를 잘 할 자신도 없고.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에 관계가 좀 소원해졌다. 그 후에도 만났지만, 그는 취직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인의 가게를 개조하지도 않았다.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한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일년 후 만났더니 종로에서 레코드 가게를 동업으로 한다고 했다. 동업하는 분이 박 인희였다. ‘모닥불’를 부른 그 박 인희다. 박 인희와 같이 노래를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음악적으로도 서로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자기의 음악성에 대한 고집스런 면이 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히피적 소양이랄까. 코헨이나 크리스토프슨의 글과 노래가 그래서 그 사람에게 맞았을 것이다. 그런 류의 노래가 우리나라에 통했을 리가 없었을 때다. 내가 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그 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80년대 초다. 샐러리맨으로서의 나의 궁박한 처지를 바라보던 그의 지긋한 눈길이 생각난다. 그 때 그는 독일 사람과 함께 혜화동 천주교 수도원 인근에서 성당의 장식용 유리인 스테인드 글래스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고 있는가를 물었을 것이다. 그의 대답이 기억에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지긋이 웃음만 지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는 여태까지 소식이 없다. 그리운 사람이기에 찾아도 보았지만 종무 소식이다. 아마도 우리나라를 떳을 것이라는 추측은 해 본다.
오늘 접한 레너드 코헨의 부음을 그 사람도 접했을 것이다. 코헨의 죽음이 그 사람과 나를 다시금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그 사람이 파주 광탄 1사단 통신대로 신병 전입을 한 날 내무반에서 신고삼아 부른 노래는 레너드 코헨의 ‘낸시(Nancy)’였을 것으로 기억한다. 늙고 병든 값싼 창녀에 관한 노래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를 떠 올린다. 그의 부인 ‘양공주’ 여사도 생각난다. 그는 이 노래 가사 중 이 대목을 좋아했다. “Looking at the late late show, through a semi-precious stone…” 그 사람은 값싼 모조 보석 반지(semi-precious stone) 하나로 깊은 밤 홀로 남은 낸시라고 풀이했다. 나는 아직도 그 뜻을 잘 모른다.
코헨은 그 사람과의 인연을 맺게해 준 고리다. 그러기에 코헨의 명복을 그 사람과 함께 빌어본다.
바위
2016년 11월 13일 at 9:30 오후
레너드 코헨의 노래는 제 정서에 맞지 않지만,
선생이 쓰신 글은 참 맛깔스럽습니다.
사실은 저도 과거 이런 류의 노래를 좋아했지만 이젠 그렇습니다. ㅎㅎ
‘아디오스 아미고’ 같은 노래 좋아했었지요.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합니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koyang4283
2016년 11월 14일 at 4:56 오후
감사합니다
manager
2016년 11월 15일 at 3:58 오후
koyang4283님 안녕하세요.
편지 쓰기 좋은 계절을 맞이하여 시작된 포토엽서 이벤트가 13회차를 맞이하였습니다.
바위님의 추천으로 koyang4283님께서 13차로 선정되셔서 포토엽서를 보내드리고자 하오니 주소와 연락처, 성함 및 다음 추천자와 추천 사유를 다음 주소에 비밀 댓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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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하지만 지인분들과 소식 나누시는데 사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 다음 추천자는 다음의 리스트를 참조하셔서 기존에 선정되지 않으신 분들 중에서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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