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즐겨 마시지만, 위스키 등 양주는 내 특성상 그리 가까이하여 마시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어찌어찌하여 마실 기회가 있으면 굳이 피하지는 않는다. 위스키는 군대 시절, 파주 미군부대 주변에 근무했던 관계로 값싼 것들, 이를테면 진 빔이나 잭 다니엘을 접해볼 기회가 많았다. 좀 더 나가 흔한 조니워커 정도는 좀 마셨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군 GI들과 팔씨름 등 힘겨루기를 해 그들로부터 얻어마실 기회가 좀 있었다. 내가 힘이 셌다는 건 아니고 그 때 문서취급소에 있던, 천 씨 성의 한 후배가 힘이 좋아 그 친구로 하여금 시합을 붙였는데 이기는 횟수가 많았다.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회로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술에 청탁이 있을 수 없이 마실 때라 위스키 등 양주를 좀 마셨지만, 그렇다고 즐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위스키의 맛은 알고 있었다. 바로 조니 워커 블루다. 이 술은 1990년대 초 출입처의 어떤 선배 한 분이 두 병인가를 갖고 와 효자동 어느 주점에서 함께 마신 적이 있는데, 그 때 그 맛에 반했다. 술이 뭐랄까, 청량감이 확 느껴지면서도 삼킬 때 부드러운 그 맛이 좋았다. 그 후로 그 술을 좀 밝히긴 했어도 좀체로 마시지 못했다. 값도 비싸고, 또 그럴만한 처지도 아니고해서다.
구랍 31일, 이촌동에서 선. 후배와 송년모임을 가졌다. 정오에 만났으니까 오찬을 하기로 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아닌가. 만나자마자 오찬은 저 멀리 건너갔다. 술을 마시자. 무슨 술을 마실까로 이야기가 모아지고 있는데, 자리를 배설한, 이촌동 사는 후배가 쇼핑 백 하나를 테이블에 올린다. 그 게 위스키일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백에서 꺼내든 것은 모양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후배가 말했다. 형, 조니워커 블루 좋아한다 했지요. 그겁니더. 차마 좋다는 내색은 하지 못하고 그저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대했다. 후배가 그러면서 꺼내든 그 술을 내게 안긴다.
무겁고, 어째 케이스가 지금껏 대해 온 조니워커와 다르다. 한꺼풀 포장을 벗기고서야 그게 뭔지 알았다. 조니워커 블루 라벨 ‘킹 조지 5세’라는 것이다. 술병도 기존의 길쭉한 조니워커 병과는 달랐다. 크리스털의 장방형 벙이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술이라, 좀 휘둥그래했더니 후배가 가져다 뚜껑을 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게 무슨 술인가고 살펴 보았더니 일련번호가 적힌 보증서와 함께 영국왕실의 ‘왕실보증서(Royal Warrant)’도 있다. 우리같은 범인들이야 술 좋은 거라면 우선 가격부터 따진다. 선배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비싼 술이라는 것이다. 면세가가 얼마고, 발렌타인 30년산과 비교하기도 하면서 좀 소란스러워 졌다.
그 사이 후배는 뚜껑의 봉합을 벗겨내고, 나더러 뚜껑을 열라고 했다. 열었다. 연 순간 뚜껑의 무게가 손에 가득 잡혔다. 묵직한 느낌의 뚜껑이다. 첫 잔이 내게 돌아왔다. 달포나 지난 출판을 다시 한번 기념하자는 의미라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잔이다. 한 잔을 들이켰다. 위스키 잘 마시는 사람은 입에 조금 머금은 뒤 마신다고 했는데, 조니워크 블루를 마셔 본 경험이 나로서는 중요했다. 입에 들이부어 가득 청량감을 느껴본 뒤 그냥 스트레이트로 삼키는 것. 한 선배가 참 촌놈처럼 마신다 운운했지만, 나로서는 정말 오랜 만에 맛보는 블루라 그 말은 귀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맛있는 술이다. ‘킹 조지 5세’ 브랜드의 이 술에 관한 글을 봤는데, 1930년대 증류소에서 제조한 위스키 원액은 그 당시의 것이라했고, 그 증류소가 사라진 후로는 그 맛을 영영 맛볼 수 없는 술이라 했다. 그러니까 나도 그 한 잔으로서 그 증류소의 술 맛을 마지막 맛본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는 얘기다.
형수 두 분 포함해 여섯명이 마셨으니 얼마 못가 병은 바닥이 났다. 그 다음이 문제일 것이다. 어차피 술은 더 마셔야하는데, 어떤 술을 마셔야하느냐다. 소주밖에 다른 게 있을 수 없다. 만장일치의 소주로 ‘킹 조지 5세’를 이어갔다. 그날 대취했고, 어스럼한 겨울 저녁을 경의선 전철에 몸을 맡긴 채 한참을 어슬렁거리면서 집으로 왔다. 같은 방향이라 같이 와야하는 한 선배도 잃어버리고 혼자서 왔다. 그 선배는 그 선배대로 경의선 전철을 타고 야당골 집으로 갔다고 했다.
데레사
2017년 1월 2일 at 1:43 오후
양주로 시작하셔서 소주로 마감하셨군요.
저는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이라 술맛을 모릅니다.
우리 둘째 사위가 프랑스 사람인데 얘네들도 한국오면 꼭
소주를 사가더라구요. 우리 소주도 어느새 세계화가 된건지
그냥 소주가 값도 싸고 좋다고 합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그리고 만사형통 하시길 바랍니다.
koyang4283
2017년 1월 2일 at 5:22 오후
죄송합니다. 정초부터 술 이야기를 늘어놓아 혼란스럽게 해 드린 것 같습니다. 저는 술을 일찍부터 마셨지요.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입니다. 그래도 농땡이는 아니어서 어느 정도 선생님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마셨었지요. 사회에 나와서는 직업이 원래 그래서 또 많이 마셨습니다. 이즈음도 가끔씩은 마십니다. 소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술에 인이 박혀 그런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소주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에서 연유를 더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ss8000
2017년 1월 3일 at 5:18 오전
거의 주선급 해설(?)이라 엄감생심 범접하기 두렵습니다마는, 고급 양주 보다 더
감칠 맛 나는 해설에 그만 발길이 머물고 말았습니다.그런 내력의 술인 줄 모르고 제가 그 술을 두 병을 약 20년 전에 구입 했는데 아직도 개봉을 않고 보관 중입니다. 음~! 명주는 명주군요. 기회가 닿는다면 저도 그 놈에 대한 썰 한 번 풀어야 겠습니다. 재미낳게 읽었습니다. 새해 만사여의 하십시오.
koyang4283
2017년 1월 3일 at 10:30 오전
20년 전이면 에디션으로 보아 프리미엄급입니다. 지난 2006년인가 조니워커에서 ‘킹 조지 5세’ 블루 라벨을 출시한 게 마지막입니다. 잘 보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관조만 하시지는 말고요. 따뜻한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