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의 馬山 바다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마산은 작은 도시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몇 사람 거치면 대개는 걸쳐지게 돼 어느 정도는 윤곽이 들어 온다. 소설가 정미경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여러 허울스런 명목아래 마산이란 지명이 각중에 사라지고 난 후 마산 사람들은 상실감에 시달렸다. 그 즈음 어느 신문에 마산 사람들의 그 허망스런 심정을 대변하는 글이 한 편 실렸다. 그 글을 쓴 분이 정미경이다. 그 글을 보고 울컥해하지 않은 마산 사람들이 있었을까. 그 글을 복사해 여러 사람들에게 돌리면서 자연 정미경이라는 사람이 누군인지가 궁금했다. 앞에서 얘기했든 몇 사람 거치지 않아 답이 나왔다. 누구 누구 알만한 고교 후배의 여동생이라는 것. 그 후배와 전화통화까지 시켜 준 후배도 있었다. 그 후 정미경은 내 마음에 담겨진 작가였고, 언젠가 한번 꼭 만나야 할 버킷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이없는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오늘 새벽 인터넷 검색을 하다 눈을 의심했다. 소설가 정미경이 투병 중에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기사였다. 이럴 수가 있을까 싶었다. 아침 신문에 벌써 추모의 글이 실렸다. “… 잡문 한 줄도 직조공처럼 언어의 날줄과 씨둘을 엮어 혼신의 힘을 다해 쓰던 치열한 글쟁이…”, 그가 바로 정미경이었다. 근자에 세상을 뜬 어떤 문학인 보다 강한 추모의 글이었다. 몇 개의 신문에 난 그녀의 별세 기사엔 하나같이 마산이 함께 하고 있었다. 마산이 고향이라는 것. 황망 중에도 이 건 좀 역설이 아닌가 싶었다. 
정미경은 마산이 없어지고 난 후 쓴 위의 글에서 작품집을 출간하면서 약력 소개난에 ‘마산 생’이라는 부분을 지워달라고 편집자에게 요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고향 마산이 사라졌는데, 태연하게 출생지를 그곳으로 적고있는 게 마산 사람으로서의 자존에 과연 타당한 것인가하는 함의를 담고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랬던 그녀가 죽고나서야 새삼 ‘마산 생’으로 소개되고 있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죽었고, 산 사람들이 그렇게 했으니 그녀의 뜻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사가 오간 이런 역설에서 그녀가 아끼고 사랑했던 마산이 더 강렬하게 느껴져 오는 것을 어찌해야 할까.
생전에 한번 뵙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육신을 벗어난 그녀의 영혼은 이제 펄펄 날아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마지 않았던 ‘가고파’의 파란 마산 바다를 맴돌고 있을 것이다. 명복을 빈다.  

 

[소설가 정미경]

이상문학상 등 받은 중견 작가… 本紙 ‘인문의 향연’ 에세이 연재
남편 김병종 화가 “아내의 못다한 문학적 성과 정리하는 게 나의 몫”

남편 김병종 교수가 그린 아내의 초상화.
남편 김병종 교수가 그린 아내의 초상화.

“인생이란 무대는, 열심히 한다고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최선을 다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지 말고 그런 자신에게 격려와 선물을 준비해보자. 여행이든, 한 아름의 책이든. 그게 며칠간의 게으름이면 또 어떤가.”

꼭 한 달 전, 조선일보 12월 19일 자에 실린 에세이가 그의 생애 마지막 글이 됐다. 말기 암(癌), 소생하기 힘들다는 진단을 받고도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가며 밤새워 쓴 글이었다. 글을 보낸 작가는 본지에 전화해 숨이 찬 목소리로 연재 중단 의사를 밝혔다. “돌아보니 긴 시간 귀한 지면에 글을 쓰는 것이 참 보람찬 일이었습니다.” 남편인 화가 김병종(64) 서울대 교수는 이튿날 아침 신문에 실린 아내의 글을 읽고 울었다.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댄서가 됐을 것”이라며 화사하게 웃던 소설가 정미경(57)이 18일 새벽 4시 30분 급환으로 별세했다. 오늘의 작가상, 이상문학상을 받은 중견 작가이자 김병종의 아내로 널리 알려졌다. 그녀는 조선일보에 2년 가까이 연재한 ‘인문의 향연’ 에세이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생 속으로 불쑥 들어가 볼 수 있는 것. 다른 종족, 다른 직업, 다른 성(性)이 되어 다른 장소에서 살아보는 것. 오직 문학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고 예찬했던 그는 잡문 한 줄도 직조공처럼 언어의 날줄과 씨줄을 엮어 혼신의 힘을 다해 쓰던 치열한 글쟁이였다.

생전에 “내 글쓰기의 원천은 운명”이라고 했던 소설가 정미경. 남편 김병종 교수는 “누이 같고 어머니 같던 아내는 내 그림의 가장 혹독한 비평가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생전에 “내 글쓰기의 원천은 운명”이라고 했던 소설가 정미경. 남편 김병종 교수는 “누이 같고 어머니 같던 아내는 내 그림의 가장 혹독한 비평가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채승우 기자

병마는 한 달 전에 덮쳤다. 손쓸 새 없이 악화되자 작가는 치료를 거부했다. 친정엄마가 오랜 병고에 시달리다 돌아가시는 걸 보고 자기는 인생의 정점에서 하루 이틀 앓다 어느 날 홀연히 떠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녀였다. 김병종 교수는 “남은 시간 가족과 집에서 보내고 싶다는 아내의 소망대로 마당의 커다란 나무가 보이는 서재에서 24시간 함께 지내며 문학과 예술, 인생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이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된다”고 했다. 지난 주말 맏아들 지훈(32·서원대 겸임교수)씨 결혼식에 함께하지 못한 걸 고인은 가장 가슴 아파했다. “화장까지 다 했는데 거울을 보더니 ‘몰골이 이래서 손님들에게 덕이 되지 않겠다’며 혼자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결혼식 후 급격히 나빠져 3일 전 병원으로 옮겼고 오늘 새벽 저와 5분쯤 눈인사를 나눈 뒤 평안히 떠났습니다.”

문화계에 금실 좋기로 소문났던 정미경·김병종 부부.
문화계에 금실 좋기로 소문났던 정미경·김병종 부부. /주완중 기자

정미경 작가·김병종 교수는 ‘글 잘 쓰는 부부’였다. 남편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김병종의 화첩기행’을 통해, 소설 ‘장밋빛 인생’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린 아내는 화려하고 속도감 넘치는 문체로 사랑을 받았다. 두 사람 인연도 글에서 시작됐다. ‘대학입시’라는 잡지에 기고했다가 둘 사이 표절 시비가 일어 옥신각신하던 중 사랑에 빠졌다. 김 교수는 “누이 같고 어머니 같던 아내는 문학과 예술의 동지이자 가장 혹독한 비평가였다”고 했다. 화가 남편은 가끔 아내의 얼굴을 화폭에 담았다. “만날 밉게 그려준다고 섭섭해했지요. 나중에 예쁘게 그려준다고 약속했는데 그 나중이 없네요. 그림 그리려 아내를 앉혀놓고 보면 신산한 세월의 우수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 붓질이 영 착잡하더니….”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폭설’이 당선돼 데뷔했다. ‘장밋빛 인생’ ‘나의 피투성이 연인’ 등 10권의 소설집을 냈다. 김병종 교수는 “아이들 다 키우고 이제부터 좋은 글 써봐야겠다 했는데 여기서 꺾이는구나, 하며 아내가 슬퍼했다”면서 “세상이 채 알아주지 못한 아내의 문학적 성과를 정리하는 게 내게 남겨진 몫”이라고 했다. “투병 중에도 잔소리하대요. 커피 좀 줄이라고. 아침부터 밤까지 커피를 입에 달고 살면 몸이 감당해내겠느냐며….” 발인은 20일 오전 8시 평촌 한림대성심병원, (031)386-2345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19/2017011900132.html

 

 

[ESSAY] ‘가고파’의 馬山을 가슴에 묻어야 하나

  • 정미경·소설가

입력 : 2010.08.09 23:11 | 수정 : 2010.08.10 15:06

이름을 잃는 것은 존재를 잃는 것이다
도시는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만의 것 아니다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삶과 추억이 녹아있다
천상병 시인이 즐거이 소풍 갔던 곳 ‘잔잔한 고향 바다’
가곡 가고파가 탄생한 내 영혼의 안식처
馬山이란 이름은 영영 가슴에 묻어야만 하나


정미경

얼마 전 편집자 J가 전화를 했다. 책을 다시 찍는다며 혹 수정할 것이 없느냐 물었다. “작가 약력에서 ‘마산 생(生)’이라는 부분을 지워주세요” 했더니 내 심사를 알 리 없는 그녀는 그러겠노라 시원스레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 새로 찍은 책이 도착했다. 나는 책의 표지를 열고 몇개의 글자가 사라져버린 부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음 한구석이 툭 뜯어지고 그곳으로 무언가가 술술 쏟아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밀려왔다.

근래에 나는 고향을 잃은 여자가 되었다. 고향이 북녘도 아니고 수몰이 된 것도 아닌데, 고향이 어디냐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는 어느 유행가의 주인공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지난해던가. 마산과 창원·진해를 통합한다는 얘기를 흘려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는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신문에서 그 후속 기사를 보았다. 통합은 기정사실이었고 이름마저 바꾼다는 것이었다. 뒤늦게 고향 마산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펄펄 냈다. “너희들, 바보 아니야? 이 지경이 되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 수화기 너머에서 친구는 말이 없었다. “그러는 너는?” 묻고 싶었겠지.

통합의 까닭이 수긍할 만한 것이었다면 그렇게 화가 나진 않을 것이다. 행정적 편의와 경제적 이득이라니. 모든 가치의 기준이 돈이 되어버린 시대지만 한 도시의 가치를 전자계산기로 간단히 산출하고 땅따먹기 하듯 합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폭력적 사고방식이 나를 아프게 했다.

도시의 이름이 없어진다 해도 그 땅과 사람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은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이름을 잃는 것은 존재를 잃는 것과 같다. 한 도시는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 이름에는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삶의 조각과 내밀한 추억들이 응축되어 있다. 내 안에도 마산의 그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自畵像) 하나가 들어 있다.

바닷물이 밀려나간 개펄에 여자 아이 하나가 엎드려 있다. 종아리엔 뻘이 잔뜩 묻은 채 자잘한 게나 고둥 같은 걸 집어 봉지에 조심스럽게 담곤 한다. 수그린 단발머리 저 너머로 밀물이 밀려든다. 마음을 온통 개펄에 빼앗긴 아이는 그걸 알지 못한다. 맨발에 파도가 와 닿고서야 아이는 달리기 시작한다. 파도는 한순간 허리를 감는다. 바닷물이 그리 힘이 센 줄을 미처 몰랐다. 가까스로 기슭으로 나왔을 때 물가에 벗어놓았던 신발은 자취가 없었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 엄마 앞에 서서야 목놓아 울었다. 울면서도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했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는다. 그때까지도 움켜쥐고 있던 봉지 안의 게들은 죽거나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엄마는 쓸데없는 걸 줍느라 옷을 버렸다고 지청구를 하시며 그것들을 마당가 포도나무 아래 묻어버렸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먹는 것 외엔 아무 관심이 없던 어린 내가 우주 안의 외로운 단자인 자신의 존재와 세계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인식한 날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너무도 강렬해서 내 존재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기억은 다시 맨발로 걸어오던 언덕길 주변으로 확장된다. 길가에 있던 친구의 집.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3·15학생의거 기념탑. 팥빙수가 맛있던 분식집. 관람 불가 영화를 보다 어깨에 조용히 내려진 선생님 손길에 기절할 뻔했던 극장. 또, 또….

그랬다. 내게 고향은 흙과 공기와 바다가 어우러진 영혼이었다. 그 도시에서는 어디서나 바다가 보였다. 산기슭의 여학교에서도 고개만 돌리면 고요한 바다와 앙증맞은 섬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믿고 있다. 한없이 무딘 자의 영혼마저 일깨울 만한 그 도시의 어떤 기운이 나를 결국 문학으로 이끌었다고.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음모론은 꽤 널리 퍼져 있다. 지난해 여름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는 그의 생가를 찾았을 때다. 인파에 떠밀리며 삐걱거리는 마루를 걷는데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가 가공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영국은 국운을 걸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 들겠구나. 그가 아니라면 불로초를 나눠준다 한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구석진 곳으로 달려왔을까. 당대 양식을 재현한 극장에서는 밤마다 그의 연극이 상연되었지만 표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그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우산과 찻잔을 샀다. 그 찻잔에 커피를 마실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비 내리던 그 거리의 풍경이 떠오른다. 셰익스피어로 가득 차 있던, 작아서 더 살갑던 그곳이….

마산 역시 그 못지않게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준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했다. 귀천(歸天)의 시인 천상병은 마산에서 자라나 학창 시절을 보냈다. 천진난만하게 살다 세상을 떠난 그에게 마산은 즐거이 놀다 돌아간 ‘소풍지’였을 것이다. 마산중학교 시절 어린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워준 국어선생님이 김춘수 시인이다. 그는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고향 떠난 자들의 향수를 촉촉이 적셔주던 가곡 ‘가고파’를 지은 이은상 역시 마산에서 태어나 그 쪽빛 바다를 보며 자라난 사람이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고향을 잃은 자, 이 노래를 부르며 그 이름을 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것인지. 머지않아 그 이름을 다시 부를 날이 있으리라 믿고 싶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09/2010080901954.html

 

 

7 Comments

  1. 데레사

    2017년 1월 19일 at 2:34 오후

    저는 이 작가는 잘 모르지만 김교수의 화첩기행은
    즐겨 읽었습니다.
    그분의 부인이시군요.
    젊은 나이닌데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부디 편히 가십시요.

    • koyang4283

      2017년 1월 19일 at 9:14 오후

      그렇게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작가는 아닙니다. 저 또한 문학적으로는 잘 알지 못한 작가였습니다. 2010년 우연히 그녀가 쓴 한편의 에세이 때문에 알게 되었지요. 문학적으로도 관심을 갖고 좀 알려고 했는데 황망스런 부음을 접했습니다. 따뜻한 추모의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2. J Kim

    2017년 1월 19일 at 3:58 오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미경 작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작가의 글을 보니 마산이라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아끼는 마음이 마산 출신 누구 못지않게 컸었던 것 같습니다. 한창인 나이에 그것도 갑작스러운 병마로 세상을 떠났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마산이라는 도시명이 사라진 데 대해서는 유구무언입니다. 저도 합병소식을 들었을 때 납득할 수 없었고 고향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마산시로 독립하면 좋겠습니다. 마산에서 살고있는 분들은 저보다 훨씬 더 괴롭고 힘들겠지요. 마산에서 당분간 활동하시며 관련된 글을 쓰실 예정이라니 반갑습니다.

    • koyang4283

      2017년 1월 19일 at 9:11 오후

      저도 생각은 있었지만 한번도 뵙지는 못했습니다. 부음을 들은 후에야 학력이 나오던데 제일여중과 마산여고를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여고 선배가 될 것입니다. 마여고 출신 중에서도 글 잘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 동기로 극작가인 김옥영 씨가 있고, 또 현재 마산문인협회 회장으로 있는 서일옥 씨가 있습니다. 이 두분은 여고시절, 마산고와의 문학동인인 ‘돛섬’의 동인이었지요. 마산에 가면 정미경 씨를 추모하는 조그만 일부터 먼저해야할 것 같습니다.

      • J Kim

        2017년 1월 20일 at 7:37 오전

        마여고 선배셨군요. 고인의 생년월일을 보니 저보다 2-3 년 선배셨던 것 같습니다. 이은상 시인이 마산 출신인 것은 잘 알고있었지만 천상병 시인도 동향 인지는 몰랐습니다. 김옥영 씨와 서일옥 씨에 대해서도 검색해 봐야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3. 김수남

    2017년 1월 21일 at 10:52 오후

    너무 감사합니다.저도 몰랐던 분인데 오늘 나눠 주신 고정미경작가님에 대한 글을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소식이네요.그렇게 갑자기 떠나시면서도 의연하신 모습을 뵈며 가슴 뭉클해집니다.아래 올려 주신 마산 관련 글이 작가님의 마음을 더 자세히 느낄 수 있어 눈물이 핑돕니다.마산여고 선배님이시라니 그 누구보다 더욱 마음 속에 가까이 느껴지시고 새론 다짐을 갖게 하시는군요.네,koyang님의 발걸음을 기대하며 응원합니다.

    • koyang4283

      2017년 1월 22일 at 8:30 오후

      감사합니다

Leave a Reply

응답 취소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