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나 자신이 좀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부지불식간이지만,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것이 지난 후다. 好, 不好의 개념으로 보자면 후자다. 후에 그것을 깨닫고 뭐랄까, 창피감을 느끼지만 이미 차는 떠난 후다. 후회가 수반한다. 하지만 그 때 뿐이다. 내가 좀 이상해졌다고 느끼고 또 그것을 깨닫고 후회하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패키지로 연동된다. 그리고는 쉽게 그러려니, 또는 뭐 그럴 수 있는 거지 하는 능청심으로 치환시켜 버린다. 이 때 가장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변명거리가 있다. 나이다. 아, 내가 나이를 먹으니 그렇게 되는구나 하 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는 것이다.
여러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내가 봐도 좀 심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말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말이 많다는 것은 한편으로 쓸데없이 나선다는 의미도 있겠다. 이런 짓거리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 있을 때 두드러진다. 집에 아내와 있을 때 그러면 칭찬받을 짓이다. 그만큼 말이 없다고 책망아닌 책망을 받고 있기에 그렇다. 잘 모르는 사람들, 혹은 그런 사람들과의 모임에 어쩌다 가는데, 모임이 끝나고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올적에는 잘 모르는데, 다음 날이면 그런 생각이 불쑥 내 염치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저께 한 모임이 있었다. 고등학교 동문들과의 모임이다. 창립된 게 한 6, 7년전인데, 그 때 참석하고는 수년 만에 나가보는 모임이다. 계기가 있다. 친하게 지내는 한 후배가 그 모임의 총무를 맡았는데, 그 열성이 대단한 탓이다. 지난 해 한 번 나가고 올들어 그저께 모임까지 세번 째다. 창립 당시만 해도 선배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가보니 그 선배들 대부분이 없다. 그러니까 어쩌다 내가 상당한(?) 기수의 선배가 돼 있었던 것이다. 후배들도 물론 다들 사회적으로 중견을 넘긴 이들이다. 공무원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기류가 한 특성일 수도 있는 모임이다.
그런 자리에 내가 낀다는 것은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관계를 떠나 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주고받는 애깃거리의 화제도 나와는 사뭇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후배들도 그것을 알 것이다. 그게 모임자리의 대세일 경우 나의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나의 그런 처지를 후배들은 ‘선배님, 선배님’하는 추켜세움의 경칭으로 메워 나간다. 그렇다고 가만 앉아 술잔만 기울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결국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좌중이 귀담아 들을 얘기는 아니다. 나이 차가 있으니 관심사나 화젯거리도 다를 것이다. 내 얘기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에 가장 걸맞는 것이 있다면 결국은 옛날 얘기들이다. 옛날에 내가 어쩌고 저쩌고 운운 하는.
내가 말이 많아지면서 분위기가 다소 썰렁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을 알았을 때도 염치불구하고 또 나를 몰아가게 해주는 것이 바로 술이다. 술이 오르면 그 때부터는 완전 ‘노인 모드’로 들어간다. 후배들을 부르는 호칭도 딴에는 정겨답는 뜻에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그들이 듣기에는 완전히 집안 동생 부르듯 해진다. 후배들은 노인 뒷바라지하는 심정으로 모임이 빨리 파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차를 제의한 것도 나였다. 2차에 가서도 호기를 부린 것은 나였다.
예전 현직에 있을 때 나를 잘 보살펴주는 십 수년 위의 한 선배가 계셨다. 그 선배가 지금의 내 나이 쯤 때였을 것이다. 선배는 후배들을 잘 챙기셨는데, 그 말은 나를 포함한 후배들 술 사주는데 아주 했다는 얘기다. 선배는 우리들과의 모임을 좋아했고 어떻게든 참석하려 했다. 근데 그 때 내가 좀 고약했다. 언론계에 있으면서 소설을 쓰시던 선배는 술이 한 잔 오르면 낭만적으로 변하곤 했다. 옛 사랑 얘기가 단골 메뉴다. 그리고 당신의 작품에 관한 얘기 등등. 그런 얘기들을 나직한 목소리로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우리들은 그 얘기들에 곧잘 식상하곤 했는데, 그 때 내가 제일 많이 나서 훼방(?)을 놓았다. 나의 단골 훼방 메뉴는 노래 부르기였다.
그 선배는 금생의 마지막 술을 나와 함께 했다. 이제는 사라진지 오랜 광화문의, 부산 할매가 하는 ‘옴팡집’에서 선배는 통음을 했다. 선배는 그 며칠 후 입원을 했고, 그 얼마 후 세상을 떴다. 그날 밤 ‘옴팡집’에서 나는 말짱했다. 그래서 기억이 생생하다. 선배는 외롭고 쓸쓸하다고 했다. 이즈음 나의 말이 많아지는 행태에서 그 선배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할까.
누구든 나이가 들면 외롭다. 변해가는 세상과 세태에 적응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가끔 익숙치 않은 것들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말이 많아지는 것도 그 한 부분일 것이다. 익숙치 않은 분위기에서 잘 두드러지는 것은 외로움과 소외감이다. 말이 많아지는 것은 그로부터 어떻게든 나도 여기에 있소 하며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려니, 말하자면 외로움과 소외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이가 들 수록 타 연령등의 사람들과 많이 접하라고들 한다. 젊은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나 아닌 또 다른 나가 있을 수 없는 일이겠거니와, 나이들어 후회와 후과가 따르는 언행을 쌓아가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평소의 나 다웠으면 한다. 나이가 들 수록 말을 아껴했으면 싶다는 것이다. 말을 하나 만들어보면 ‘연부석언(年富惜言)’이라 할까. 그러니 사람들 만나는 것도 그저 유유상종(類類相從)이 좋겠다.
데레사
2017년 2월 9일 at 3:51 오후
대부분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과 말을
잘 안할려고 하죠. 한번 시작하면 살아 온
평생얘기 뿐만 아니라 자식에서 손주까지로
이어지거든요.
그래서 선배들을 보고 배웁니다.
그러지 말자고요.
말을 아끼는게 누구든 쉽지는 않지만 노력
해볼려고요.
저도 그래서 허물 안 잡히는 동년배와 수다
떠는걸 즐깁니다.
koyang4283
2017년 2월 10일 at 9:45 오전
그래서 유유상종이 좋다고 했습니다. 아내도 그 비슷한 류이겠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