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배는 낯이 익은 어느 인상파 배우를 좀 닮았다. 그 인상의 얼굴에 걸쳐지는 걸죽한 입담이 술 맛을 돋운다. 좀 가까워진 느낌인가. 옛 얘기들이 나온다. 마산의 누가 어떻고 저떻고,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아프고. 그런 얘기들을 주고받고 있는데, 어느 대목에서 이런 말을 나에게 던졌다. “니 맛제? 그 5소대 조교.” 뭔가를 묻는 말이었는데, 무슨 말인가 했다. 처음 듣는 말이니 내가 알리가 없다. “5소대 조교라니요?” 항상 웃는 상인 그 선배의 얼굴이 좀 심각해지는듯 했다. 그러더니 다시 묻는다. “니 그 때 훈련소 5소대 조교아이가? 내 조인트를 맨날 까던.” 훈련소는 뭐고 5소대 조교는 뭐고 조인트는 또 무엇인가. 함께 한 선배도 의아한 표정이다. 그 선배가 거든다. “아인데. 이 친구는 39사단에 안 있었는데.”
그 선배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릴 적 한 동네에 살았다는 것. 그리고 국민학교 때부터 한 해 선배라는 것도 그랬다. 그 선배도 그럴 줄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해서 어쩌다 마산 거리에서 마주치면 아는 체는 했다. 근자에 그 선배를 좀 자주 본 것은 교방탕에서다. 자주 봤다는 것은 그만큼 나도 마산을 자주 내려갔다는 얘기다. 교방탕은 고향 마산의 목욕탕이다. 무학산에서 발원한 교방천이 흐르는 서원골에 인접하면서 교방천 맑은 물로 인근의 교방동 사람들 몸을 씻긴, 그 동네의 사랑방처럼 오래 된 목욕탕이다. 그 목욕탕 주인이 또 한 학교 선배고, 그 선배랑은 동기다.
몇 달 전인가 탕에서 봤을 때는 더 아는 체를 했다. 그러더니 그 날 아침, 또 탕에서 봤을 때는 아주 친근하게 다가왔다. 홀랑 벗고 마주 앉아 얘기까지 적잖게 주고받았다. 같은 대학 동문이고 연극영화를 전공했다는 것도 잘 안다. 그 선배가 MBC 탤런트 2기인 줄은 몰랐다. 아버지 가업을 이어받는 바람에 연기의 꿈을 접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결국은 아침술로 이어진다. 같이 간 한 선배 해서 세 명이다, 그 선배 역시 그 선배와 동기다.
어떤 감이 왔다. 나를 어떤 사람, 그러니까 39사단 신병훈련소 5소대의 조교 출신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나는 39사단하고는 거리가 먼 전방 1사단 출신이다. 당연히 조교도 아니었다. 처음에 나는 농담 삼아 재미로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농담으로 들으며 아니라니까 거짓말하는 줄로 여겼던 것 같다. 언뜻 그 선배의 표정 속에 불쾌감 같은 게 묻어났다. 어라, 싶었고 이러다 말겠지가 아니고, 이대로 가다간 뭔가 일이 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시 정색을 했다. “선배님, 나는 아닙니다. 그 무슨 뚱딴지같은 억지를 부립니까.” 내 말에 그 선배도 정색을 한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때까지 40년이 넘었는데도 니가 그 때 조교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왔었는데, 아니라고 하니 내가 어이가 없다. 니는 내가 지금껏 마음에 품어왔던 그 조교였다.”
그 선배의 말인즉슨 그랬다. 39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를 했는데, 이른바 고문관이었다고 한다. 자기 말이다. 고문관이었으니 조교들 눈에 많이 거슬렸을 것이다. 그 때 자기를 거의 매일이다시피 닦달 낸 자가 그 5소대 조교였다는 것이고, 그 게 바로 나였다는 것이다. 그 조교가 학교 후배였다는 것도, 그리고 같은 선창가에 살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때부터 나를 바로 그 조교로 규정해버리고 지금껏 그렇게 생각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 ‘원한‘이 얼마나 맺혔던지 지난 수 십 년간 나를 지켜보고 있어왔다는 끔찍한 말도 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어떤 자리에서든 한번 발라버려야겠다는 ‘마음의 비수‘를 갈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는 중에 어쩌다 교방탕에서 자주 마주치면서 ‘그 날‘이 온 것으로 여겼고 그렇게 해서 만난 자리에서 품어 온 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구 부인하는 것도 한두 어 번이다.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몇 번씩이나 얘기하는데도, 아니라고 우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웃으며 하는 부정이 먹히지 않으면 짜증이 섞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 지경까지 갔다. 술판 분위기도 좀 이상해졌다. 그 선배가 다시 정색을 하며 묻는다. “진짜로 니 아이가, 진짜로?” “예, 선배님 저는 그 5소대 조교가 아닙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선배도 다시 거든다. “아이라 캐도 자꾸 그라네. 니가 좀 취한 것 같은데, 니 정말 자꾸 이라모 술 맛 떨어진다.” 그 선배는 나를 잠시 좀 빤히 쳐다보더니 술 한 잔을 길게 들이킨다. “알았다. 니가 아니라니까 아닌 것으로 하자. 그라모 나는 뭐꼬. 이때까지 그리 생각하고 살아 온 나는 뭐꼬?” 이 또한 무슨 말인가. 분위기가 이러고 또 삼자가 있으니 일단 이 문제는 접겠지만 자기 확신은 변함이 없다, 그런 얘기 아닌가. 슬슬 내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다. 이 양반을 어떻게 하고 이 문제 아닌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하나.
그 선배의 취기가 오락가락한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누구 뒷 담화를 재미있게 한다. 서로들 박장대소 했고, 분위기는 이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선배로서는 그럴 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 선배는 그런 요상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그 말을 뜬금없이 반복했다. “니 맞제? 아이다. 니 아이라 했제.”
그 선배와 단둘이 앉았다. 함께 있던 선배는 일 때문에 진해로 넘어갔다. 그 선배는 끝까지 나를 붙들려는 듯 했다. 중국집에서 배갈 한 잔 더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집에 앉았다. 이과두주가 세 병째로 넘어가고 있었다. 선배는 조교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시 지나간 옛 이야기들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됐다. 네 병째를 시킨 상태에서 그 선배의 얼굴이 이상해져갔다. 말도 자꾸 헛도는 듯 했다. 더 마셔서는 안 될 것 같아 나가자고 했다. 내 말에 선배는 부리나케 지갑을 꺼낸다. 신용카드로 재빨리 계산을 했다.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리고는 나를 다시 빤히 본다. “니 돈 없제? 여 있다. 어여 받아라.” 선배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내 앞에 내민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또 그것이다. “옛날에 글마한테 돈도 마이 뺐깄다 아이가. 자 받아라. 니가 달라하기 전에 미리 준다.” 선배의 나에 대한 그 의심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답답하고 갑갑했다. 화가 다시 슬며시 치오르고 있었다.
밖은 아직도 대낮이다. 중국집을 나와 몇 걸음을 옮겼을까. 선배가 갑자기 주저앉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그냥 땅바닥에 드러누워 버린다. 눈은 멀거니 뜬 채로. 지나가는 행인이 쳐다보고 있었고, 그 중에 어떤 이는 “일일구, 일일구“하고 있었다. 전화기를 꺼내 일일구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전에 한번 일으켜보려고 양 겨드랑이에 팔을 넣었다. 의식은 있는듯 했다. 하지만 내가 일으키기에 그 선배의 체중이 너무 무거웠다.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눕혀놓고 전화기를 꺼내고 있는데, 내 발을 툭축 친다. 선배는 두 눈을 뜬 채로 하늘을 보고 있었지만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아이다. 아이다. 분명히 니가 맞다. 니가 아이면 나는 지금까지 헛살았다.”
일일구가 오기 전에 선배는 멀쩡히 자기 발로 일어났다. 택시를 타고 지척 거리에 있는 선배 집 앞에 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했다. 택시를 내리면서 나더러 잘 가라고 했다. 인사를 했더니 씽긋 웃었다. 표정은 말짱했다. 그리고는 아파트 자기 집 현관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갔다. 오버랩이 이런 것일까. 그 선배의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이 언뜻 어떤 생각을 떠 올리게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정말 저 선배가 원수 삼아 찾고 있는 그 조교였을지 모른다는. 어쨌든 그 날 나는 온전히 39사단 신병교육대 5소대 그 조교로 되어 있었다.
– 해 묵은 확신은 그 진위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
journeyman
2017년 2월 21일 at 4:37 오후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는 듯합니다.
끝까지 의심의 줄을 놓치 않은 대목에서는 뒷골이 송연하게 만들기도 하네요.
다 읽고 나서는 별일이 없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하게 되네요.
koyang4283
2017년 2월 22일 at 10:45 오전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세상살이입니다. 건필하십시요
J Kim
2017년 2월 22일 at 9:02 오전
정말 기가 막히고 억울하셨겠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선배분께서 받아들이길 거부하시는 듯하고 이미 자기 확신에 귀를 막아버린 분께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을 듯하네요. 그 선배분과의 만남을 피하시는 수 밖에 없을 듯합니다. 앞에 포스팅하신 마산 씨름계 선배분들과 남포동씨에 관한 얘기도 잘 봤습니다. 언제 마산에 가게되면 고양님 포스팅에 나온 마산 맛집들을 가보고싶습니다.
koyang4283
2017년 2월 22일 at 10:44 오전
그리 기가 막히고 억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살이가 재미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선배는 한편으로 저를 또 끔찍히 좋아합니다. 마산에서 단 한 대밖에 없다는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데, 서원골에서 남성동까지 태워주기도 했지요. 집에는 또 페라리 한 대가 더 있다더군요. 마산가서 맛 있는 고향 음식을 맛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