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마산 의거’와 그 惡役들 

3.15 마산의거는 역사다. 반세기도 훨씬 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견인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3.15의거 역사에는 숱한 사람들이 나온다. 김주열 열사 등 자신의 목숨을 민주주의 제단에 바친 의인들도 있고, 부정과 살인적인 폭력으로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한 한 자들도 있다. 사람은 희망이자 절망의 존재라는 말은 3.15의 역사 속에서도 읽혀지는 경구다. 

 

'3.15 마산의거' 기념탑

‘3.15 마산의거’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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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의 진상은 대부분 밝혀졌다. 십 수 명을 죽게 하고 수백 명을 다치게 한 경찰의 발포와 무자비한 고문, 특히 김주열 열사의 살해와 사체유기 과정 등은 당시 한옥신 부장검사 등 소신 있는 검찰수사반에 의해 그 면모가 드러난다. 마산 3.15를 오열에 의한 용공조작으로 몰아가려한 흉모(凶謀)도 밝혀진다. 하지만 자유당정권의, 3.15의거를 촉발케 한 부정선거계획 전모는 끝내 밝혀내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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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시위 중인 마산여고생들에게 소방차가 물을 뿌리고 있다.

1960년 3월 15일, 시위 중인 마산여고생들에게 소방차가 물을 뿌리고 있다.

숱한 방해공작 등으로 어려웠던 수사과정에서 3.15의거를 촉발케 하고 더럽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3.15의거의 악역들이다. 서득룡(부산지검 마산지청장). 손석래(마산경찰서장). 박종표(마산경찰서 경비주임). 이종덕(마산경찰서 수사주임). 노장현(마산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 강상봉(마산경찰서 사찰계장). 주희국(마산경찰서 수사계형사). 김종복(남성동파출소 주임). 이만호(북마산파출소 주임) 등이 그들의 면면이다. 물론 최남규(경남경찰국장). 이화식(도경사찰과장) 등 이들 경찰의 윗 선도 있다. 이들 외에 이필재(서울신문 마산지국장). 이상희(마산시교육위원)도 나온다. 
이들은 마산의 3.15의거와 관련해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댄 경찰의 발포 와, 연행된 시민들을 대상으로 고문과 폭력을 행사하는 한편으로 사건을 조작하거나 시위를 용공에 의한 것인 양 조작으로 몰아가는 일에 직. 간접으로 엮어진 면면들이다. 이들 가운데 주요 면면을 한번 들여다보자.  
서득룡은 지청장지위의 검사 신분으로 손석래와 함께 경찰의 발포를 명령해 수백 명을 살상케 한 장본인이다. 서득룡이 검사의 신분으로 어떻게 경찰의 발포에 관여했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기록이 없다. 하지만 그는 3.15이전부터 온갖 정치. 경제적인 술책으로 마산을 부정. 부패로 곪게 한 악명 높은 인물이다. 
그는 정치권력의 끄나풀이었다. 당시 일자무식의 자유당 실세 국회의원으로 마산을 주무르고 있던 이용범의 사주로 서복태 세무서장과 합세, 마산굴지의 대기업인 동양주정을 정치적인 모략과 술책으로 강제 매각케 한 게 서득룡이다. 그는 3.15이후 수배자 신세로 대구로 줄행랑을 쳐 숨어버린다. 그리고는 5.16후 혼란의 와중에 슬그머니 나타나 군사법정에 서지만 솜방망이 처벌로 모면, 더럽고 모진 삶을 이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손석래는 마산경찰서장의 지위에서 경찰의 발포를 명령한 인물이다. 그는 3.15 후 국회조사단 증언에서 “발포하지 않았더라면 마산시가 폭도들의 방화로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증언으로 자신의 발포를 정당화하는 파렴치한 언행을 보였다. 손석래는 특히 김주열 열사의 사체를 바다에 유기케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3월15일 밤 10시경 신마산 南電지점 앞에서 경비주임 박종표의 최루탄에 의해 중상을 입고 죽어가는 김주열 열사를 박종표더러 “적당한 방법으로 처리하라”고 지시해 박종표가 월남동 세관 앞바다에 돌을 묶어 김주열 열사의 사체를 수장, 유기케 했다. 손석래 또한 서득룡과 마찬가지로 3.15이후 도망쳐 다니며 은신해오다 5.16후 나타나 역시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는 풀려나 목숨을 부지하고 살았다.

 

고문경찰 구속과 잡혀간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는 마산의 여학생들.

고문경찰 구속과 잡혀간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는 마산의 여학생들.

박종표는 서득룡과 손석래와 함께 마산3.15의 최대 악역으로 꼽혀지는 인물이다. 그의 악행은 그가 일본군 헌병보조 병으로 일제강점기 말 갖은 방법으로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투옥시키는 일본헌병의 앞잡이로 살아오다 해방과 함께 다시 경찰로 들어와 저지른 것이란 측면에서 더욱 가증스런 것이다. 박종표는 일제헌병 당시 ‘아라이 겐뻬이’임을 자처하고 다녔다. 바로 ‘아라이 헌병’이라는 말로, 아라이(新井)라는 자신의 일본 창씨 명에다 헌병의 일본말 겐뻬이를 갖다 붙인 것이다. 
그가 부산의 일본헌병대 보조병으로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에게 자행한 만행은, 해방 후 반민특위에 회부돼 조사받을 당시 적시된 죄목만 9가지이니 그 정도를 가늠케 한다. 9개 죄목가운데 ‘황학명사건(일명 소련계국제혁명단사건)은 학병과 징병기피자들을 중심으로 황학명. 이창석. 신동균 등이 규합해 다양한 독립활동을 벌이다 일본헌병대에 발각된 사건이다. 박종표는 이 사건 조사에 보조로 한 몫 하는데, 그의 상관으로 주무를 맡았던 헌병이 바로 시게미쓰 구니오 헌병군조로 조선이름 신상묵이다. 그는 국회의원 신기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사건조사과정에서 박종표는 황학명을 비롯한 관련자 9명을 무자비한 고문 끝에 진술을 얻어내 투옥시킨다. 
박종표는 고문치사도 서슴지 않았다. ‘부산세무과직원사건’ 조사에서 박종표는 김대근을 고문치사케 하고 최용환은 고문후유증으로 병사케 한다. 부산 동래중학 출신인 박종표는 학교 은사와 동문까지도 체포해 고문을 자행하다 주모자 김한경을 죽게 한다. 박종표가 일본헌병 보조병으로 저지른 만행가운데 가장 악랄한 것이 ‘정장호 사건’이다. 정장호는 닷새에 걸친 고문으로 빈사상태에 이른다. 박종표는 이런 정장호를 탈옥도주로 가장시키기 위해 헌병대 뒷담으로 정장호를 밀어 던져 버렸고, 정장호는 피를 토하며 죽고 만다. 이런 죄과에도 박종표는 반민특위 재판에서 황당하게 무죄로 풀려난다. 더 황당한 것은 신상묵은 기소는 물론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방 후 변신에 성공한 박종표는 3.15당시 경위계급의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었다. 박종표는 3.15선거 전에 최루탄 20발을 지급받아 그 취급과 발사방법 등을 익힌다. 이 대목에서 3.15부정선거가 사전에 이미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3월15일 밤 7시경부터 최루탄 발사용 총을 휴대하고 시청 앞에 이르러 다른 경찰관들이 실탄사격을 하는 사이사이에 도합 12발의 ‘폭도 진압용’ 미제 최루탄을 쏘았고, 이 중 한발이 김주열 열사의 왼쪽 눈에 꼽히면서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프라이스 마이트’로 알려진 이 최루탄은 인마살상용으로 그 폭발력과 위력이 대단했다. 후에 시신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이를 참관한 병기장교 그 누구도 시신 곁에 가기를 꺼렸다고 한다. 결국 시신을 묶어놓고 천장에다 레일을 달아 30m 길이의 로프를 이용, 멀리서 뽑아낸 것으로 전해진다. 
박종표의 죄상은 이에 그치지 않고 참혹한 상태의 사체를 바다에 유기까지 한 것이다. 5.16후 군사법정에 섰던 박종표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박종표는 그날 밤 10시쯤 시위대가 무학초등학교 부근 길에 흉측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시체가 있다는 보고를 교통계장으로부터 받고 경찰 지프차에 실은 다음 부두로 나가 돌에 단단히 매달아 바다 속에 쳐 넣은 것이다. 이에 앞서 박종표가 시신을 실은 상태로 경찰서로 가 손석래 서장에게 보고를 하고 그의 지침을 받았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다. 그의 김주열 열사 시신유기에는 한대진 순경과 지프차 이모 운전사가 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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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27일 동안 물에 가라앉아 있다가 4월11일 오전 11시경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거룻배를 타고 쇠갈고리로 홍합 잡이를 하던 김경룡 노인(당시 67세)에 의해 발견돼 건져 올려 져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찍은 처참한 모습의 사진이 전 세계로 타전된다. 결국 김주열 열사의 이 시신이 도화선이 되어 마산시민들이 총궐기하게 되고, 이게 4.19로 이어지면서 이승만 독재정권이 타도되기에 이른다.
이런 말로도 표현 못할 죄를 지은 박종표는 그 후 어찌되었는가. 그는 4월18일 죄상을 고백한 후 부산교도소에 수감된다. 그에 대한 재판은 허정 과도정부와 장면 정부를 거치는 동안 무슨 이유에서인지 속도를 내지 못하다, 결국 이듬해 5.16이 일어나고 난 후 이른바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다. 선고는 당연히 사형이었다. 최루탄으로 김주열 열사를 살해한 점과 사체를 유기한 죄목이다. 그러나 경찰발포에 대한 죄목과 그에 대한 처벌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또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최루탄 발사도 부인돼 시신유기 하나의 죄목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박정희 정권의 사면으로 겨우 7년만 살고 풀려난다. 그러고는 종적을 감춰버린다. 
그의 종적은 ‘3.15義擧史’ 편찬위원장을 역임했던 마산의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인 홍중조에 의해 2009년 그 일단을 드러낸다. 홍중조에 따르면 박종표는 최소한 1994년까지 부산 서면에서 식당을 했고, 마산경찰 출신들과 왕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의 소식은 알려진 게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즈음을 전후해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1921년생이니 만약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90대 후반이다.
이들 3.15당시의 마산 경찰관들 가운데 사찰계 형사주임이었던 노장현 경위는 시위를 용공조작으로 몰아간 인물이다. 그는 3월12일 마산상고 학생 3명이 영어시험 답안지에 “백만학도여 궐기하라, 자유당 때려 부숴라”라고 적은 전단 100여장을 뿌리는 것을 검거했던 바 있었다. 그는 3.15의거 당일, 압수보관 중이던 이 삐라에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한 줄을 더 써넣은 다음 도립병원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시위 중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학생 3명의 시신 주머니 속에 이 삐라를 각각 한 장씩 집어넣었으며 이를 완강히 제지하는 병원장 박정석(명도석 선생의 사위)을 권총으로 위협하고도 했다. 그리고 이를 후에 공산당 배후조정의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노장현의 용공조작은 무자비했다. 특히 3.15 당일 경찰에 강제 연행된 정남규에 대한 용공조작은 집요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남규의 아들인 정현팔까지를 역시 조작된 북마산파출소 방화혐의로 연행해 정남규의 취조실 옆방에서 고문하면서 그 비명을 정남규로 하여금 듣게 해 자백을 받아내려는 짓까지 자행하기도 했다.
그는 3.15후 이리저리 몸을 숨기며 은신해 지내오다 4.19후 김해서 자살한다. 노장현은 당시 마산경찰의 사찰담당으로, 최인규로부터 부정선거 및 그 대책과 관련한 지령을 받은 장본인이다. 하지만 자살로 인해 지령의 베일은 끝내 벗겨지지 않았다.
당시 서울신문 마산지국장이었던 이필재와 이상희 마산시교육위원도 용공조작에 가담한 인물들이다. 이 둘은 3.15진상조사단에게 “3.15날 밤, 시위대에서 ‘인민공화국 만세’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허위증언으로 자유당정권과 경찰의 용공조작을 도움으로써 3.15의거를 더럽힌 또 다른 악역들이다.
이들 마산 3.15의거의 악역들 가운데 죄업에 맞게 엄중한 처벌을 받은 자는 없다.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극형 등 중형을 받은 자는 한 명도 없다. 최인규 내무장관이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부정선거와 발포명령 책임자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대부분 각가지 변명과 명분 등이 앞세워졌고, 이를 받아들인 흐지부지한 재판으로 이들은 얼마간의 옥살이를 한 후 대부분 감형과 특사로 풀려난다. 3.15의거는 이런 점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역사라 해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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